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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58)화 (58/141)

58화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아드넬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 한쪽에 자리한 테이블 앞에 앉았다.

제이든 또한 맞은편에 앉아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그러니까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도 잘 모르겠어.”

“어떤 걸 모르겠다는 거야?”

“2황자 전하의……. 생각? 마…… 음?”

아드넬이 미묘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흐렸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단어 하나에, 제이든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꼈다.

또 한 번 뾰족한 손톱이 그의 손바닥을 강하게 짓눌렀다.

“……예전에, 병증이 심하게 도지셨을 때. 급하게 별궁에 돌아갔던 날부터 조금 이상했어.”

“어떤 게 이상하다는 거야?”

“말씀하시는 게 뭔가 좀……. 그랬다고 해야 하나.”

“뭐라고……. 말했길래?”

“……가지 말라고. 제발…… 가지 말라고.”

“…….”

왜 불안한 예감은 늘 적중하는 걸까.

마치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에 제이든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제발 아니기를, 아니기를 그토록 빌었건만.

정말로 그 2황자가 아드넬을…….

“내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지금 겪고 계신 모든 것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막막해진대. 그래서 처음엔 그저 병증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어.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걸 모르겠고.”

“……짐작 가는 건 아무것도 없고?”

“응, 나로서는 모르겠어. 정말, 정말 혹시나……. 날 좋아……하는? 그런 비스름한 거라 하더라도 말이 안 되잖아, 지금 나는 남자 모습인데. 남색을 즐기시는 분도 아니시고.”

전부 다는 얘기하기 어렵지만, 생각해 보면 그날을 기점으로 2황자는 변했다.

다짜고짜 불러서는 가지 말라 애원하더니, 처음으로 그녀에게 사과했다.

억지로 끌고 온 것도, 별궁에 가둬 둔 것도, 심한 말을 한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미안했다며, 그리고 그 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다며.

‘그리고 변했지. 꽤 다정한 방향으로.’

제가 한 잘못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용서를 빌기 위해 그러는 건진 몰라도, 그는 사뭇 다정해졌다.

게다가 치료제를 준 이후로 라크란 병이 큰 차도를 보여서 그런지 무투회에선 그 귀한 보검까지 선물로 주었다.

하지만 아드넬이 혼란스러운 건 단순히 그 때문은 아니었다.

‘가능하면 빨리, 돌아와.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리 말하던 얼굴이 아직도 생생했다.

입 밖으로 내뱉은 문장이 얼굴 위에 그려진 것처럼, 얼핏 느끼기에 불안해하는 것도 같았다.

그래서 처음엔 병증 때문일까 생각했으나 큰 차도를 보인 마당에 그렇게만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자연히 아드넬은 어쩌면, 정말 어쩌면.

2황자가 날 좋아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나한텐 그렇게 자주 웃어 주시는 분인데. 탄신연에선 내가 가자마자 또다시 무표정으로 일관하셨어. 꼭 나만 좋아하는 것처럼…….’

그러나 확신할 수는 없었다.

지금의 자신은 남자의 모습인 데다 테시우스는 남색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여자도 가까이 하진 않지만 아드넬이 그동안 지켜봐 온 바로는 그냥 귀찮은 것 같았다.

사랑 놀음보단 몸을 단련하는 것을 더 중시하는 것 같달까.

그러니까 저를 좋아할 리는 없는데, 그럼 대체 왜 자꾸 제게 다정하게 대하고 설레는 말들을 하는 건지 아드넬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이상해졌어.’

날 좋아하는 사람도 아닌데 테시우스만 봤다 하면 얼굴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아름다운 사람이니까 하며 합리화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제아무리 잘생겼다 한들 얼굴만 봤다 하면 가슴이 뛰는 건 확실히 뭔가 이상했다.

그러나 아드넬은 전생을 통틀어서도 사랑이랄 만한 것은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 낯선 심장의 박동이 일전에 바스토르를 처음 봤을 때 생각했던 ‘잘생긴 영화배우와의 1:1 팬미팅’이라도 한 것 같은 기분에서 비롯된 건지, 아니면 눈알이 튀어나오게 빼어난 남자가 자꾸 다정하게 대해 줘서 설레는 건지, 확실하게 정의 내릴 수가 없었다.

그저 혼란스럽기만 했다.

한편 제이든은 아드넬의 말에 간신히 한시름을 놓았다.

천만다행으로 그녀는 아직 2황자의 마음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날 그 눈빛. 그건 절대 아랫사람을 보는 눈이 아니었어.’

그건 누구보다도 제이든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무투회에서 테시우스가 아드넬에게 보검을 주던 그 순간, 아닌 척 가장한 얼굴에 말로는 치료해 주어 고맙다는 명분을 댔으나 눈빛은 전혀 아니었다.

친구를 보는 눈도 아니었고, 신뢰하는 부하를 보는 눈도 아니었다.

2황자는 그날, 자신이 아드넬을 보는 그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행히 아드넬은 모르는 듯하지만 불안한 건 여전했다.

‘아드넬은 지금 내 마음도 모르니까.’

느닷없는 고백으로 당황할까 봐, 또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다음에 좋은 때가 있겠지 하고 기다린 세월만 몇 년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그렇게 하염없이 흘러가는데 아드넬은 여전히 그의 마음을 몰랐다.

아무리 잘 챙겨 주고, 애정을 내보여도 아드넬은 그를 가족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더는 안 돼.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로……. 놓치고 말 거야.’

아드넬을 사랑한다.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고, 평생을 그녀에게 바치고 싶었다.

그런 사람이 눈앞에서 허망하게 떠나가는 모습만큼은 죽어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이럴 수밖에 없어.

누군가는 비겁하다 말할 수도 있지만,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지 않으면.

지금껏 묻어 두기만 한 마음을 꺼내 보일 날이 결코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제이든은 안쪽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곧 다시 입을 열었다.

“……누구도 치료하지 못한 병이었는데 네가 오면서부터 호전되었잖아. 그래서 저도 모르게 점점 의지하게 되다가 나중에 네가 떠나고서 병이 재발할까 두려워 그런 말을 한 것 아닐까.”

“……제이든이 보기엔 그래?”

“네 말마따나 남색에 취미가 있는 사람도 아니고 아드넬은 지금 남자 모습이잖아. 그런데 지금껏 별 접점도 없다가 갑자기 가지 말라며 붙잡는다니, 그럼 달리 뭐겠어.”

“접점…….”

아드넬은 잠시간 생각하는 듯하더니 곧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나랑 그 사람이랑 무슨 접점이 있었다고.

기껏해야 무투회에서 보검을 준 것밖에 없었는걸.

그리고 2황자 전하가 자기 입으로 말했잖아, 고마워서 주는 거라고.

“역시 그렇겠지……?”

“응,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엔 그래.”

“……하긴, 남자 마음은 남자가 더 잘 알 테니까.”

아드넬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하기야, 2황자가 미치지 않고서야 저를 좋아할 리 없었다.

요 근래 퍽 태도가 바뀌긴 했지만 여태까지 제게 화를 내면 냈지, 사람은 그렇게 한순간에 바뀌지 않으니까.

더구나 나는 지금 남자 모습이니까.

게다가 제이든도 병 때문에 그런 것 같다니 복잡하던 머릿속이 조금 비워진 기분이었다.

‘가능하면 빨리, 돌아와. 기다리고 있을 테니.’

……라그랑으로 떠나기 전, 테시우스가 했던 말이 마음에 계속 걸리긴 했지만.

차마 그것까진 얘기하기 어려워 아드넬은 제이든을 향해 살짝 웃어 보이며 말했다.

“고마워, 제이든. 덕분에 기분이 한결 낫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될지 모르겠어서 계속 생각만 하고 있었거든.”

“앞으론 무슨 일이 있든 간에 꼭 말해 줘.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것뿐이잖아.”

“이런 것뿐이라니, 그동안 제이든이 나한테 해 준 게 얼마나 많은데. 아, 배고프다! 우리 이만 내려가서 밥 먹자. 필립이 서운해하겠어.”

“그래. 가자.”

아드넬은 이전보다 조금은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방을 나서 계단을 총총 내려갔다.

그러나 제이든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끝내 결심했다.

‘이제 더는 물러설 수 없어.’

별궁에 돌아가기 전에 반드시, 그녀에게 고백할 거야.

아드넬을 챙겨 주고 아껴 주는 가족 같은 오빠가 아니라 한 남자로서.

길고 긴 짝사랑의 끝이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 * *

라그랑에서의 일정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동안 아드넬은 공정의 세분화 과정과 교육 커리큘럼, 주민들의 고용 여부와 새로 증축 중인 공방 등을 두루 살피며 바쁜 시간을 보냈다.

진작 클리프에게 말을 해 두고 온 터라 둘러보는 데엔 크게 문제가 없었다.

여기서 세심하게 살펴보고 보완이 필요한 부분은 따로 작성해 서신으로 보낼 생각이었다.

그사이 제이든은 호시탐탐 고백하기에 가장 적절한 때를 보는 중이었고, 필립은 이따금 어딘가 묘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으며, 아드넬은 그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제 할 일을 하느라 바빴다.

그러나 이러한 묘한 기류는 비단 세 사람에게만 적용되지 않았다.

아드넬이 라그랑을 향해 떠나고 사흘 뒤, 별궁에도 기묘한 변화가 찾아왔다.

변화의 시작은 시종 펠릭스의 말에서부터였다.

“당분간 2황자 전하의 식사는 후원 정자 뒤편에 가져다 놓도록.”

2황자가 본성에서 별궁으로 거처를 옮기고서부터, 매년 여름과 겨울이 끝나가는 무렵이면 펠릭스는 한결같은 명을 내렸다.

하지만 원체 이상한 명인지라 자연히 별궁 사용인들 사이에서도 여러 가지 말이 나왔다.

“역시 이번에도…….”

“왜 항상 이맘때쯤이 되면 그러시지?”

“누가 물어볼 수나 있겠어? 우린 그냥 하라는 대로만 하면 돼.”

물어볼 수 있는 위치도 아니거니와 물어본다고 대답해 주지도 않기 때문에 사용인들은 그저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날 밤 펠릭스는 2황자의 침실이 있는 동쪽으로의 접근을 일절 막았다.

유일한 출입자는 단 한 명, 황태자 바스토르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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