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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57)화 (57/141)

57화

테시우스는 다리를 펴고 일어나면서 아드넬의 손목을 잡아 마찬가지로 일으켜 세웠다.

홀린 듯 일어선 아드넬은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물론 큰 무례를 저질렀으니 그에 대한 벌은 내릴 거야.”

“아…….”

“무슨 일인지 내게 말해 주는 것. 그것으로 벌을 대신하지.”

그리 말하며 테시우스는 정자에 앉아 옆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사뭇 다정한 태도가 퍽 낯설었지만 아드넬은 순순히 그의 옆에 앉았다.

그리곤 잠시간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곧 입을 열었다.

“실은……. 오늘 황후 폐하를 뵙고 왔습니다.”

아드넬은 테시우스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과 공녀에게 했던 제안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동안 테시우스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이며 조용히 경청할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아까 전 울컥했던 제 마음도 얘기하게 되었다.

“저라고 그 문제를 생각하지 않았던 건 아닙니다. 큰돈을 벌려던 건 더더욱 아니고요. 그저, 화장수 대용으로 쓸 수 있는 플로럴 워터 하나만으로도 기뻐하던 별궁 하녀들을 보고 더 많은 사람들이 사용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을 뿐입니다. 물론……. 시작하기도 전에 끝나 버렸지만요.”

“……그랬군.”

“예…….”

다시 생각하니 또 침울해져 아드넬이 고개를 푹 수그렸다.

뭔가 다른 방법이 있다면 좋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 머리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질 않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포기하자니 아쉬워서 놓질 못하겠고, 이래저래 복잡하기만 했다.

테시우스는 그런 아드넬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리곤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가 싶더니 곧 입을 열었다.

“……꼭 모델이 필요한 것만은 아니지.”

“예? 그게 무슨…….”

“굳이 모델이 있어야지만 사업을 진행할 수 있는 건 아니잖나.”

“아……!”

핵심을 찌르는 답변에 아드넬이 놀라 탄성을 내뱉었다.

당장 눈앞에 놓인 상황만 본 탓에 공녀들을 모델로 삼으려던 본래 목적을 깜박 잊은 것이다.

‘모델이 되어 준다면 물론 좋겠지만, 꼭 필요한 것만은 아니야. 나는 지금 살롱을 열려는 게 아니니까.’

게다가 공녀를 모델로 삼지만 않는다면 황후가 말한 대로 사업을 접을 필요도 없었다.

이렇게 대번에 문제를 해결해 주다니, 아드넬은 조금 감동한 얼굴로 테시우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전하……! 덕분에 어찌해야 할지 방향이 잡힌 것 같습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군.”

테시우스는 아드넬을 향해 미소 지어 보였다.

원래 이리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한때 바스토르를 보며 성격이 유일한 흠이라고 비교했지만, 병증도 많이 사라지고 확실히 차도를 보여서인지 그는 처음 만났을 때와는 무척 달라졌다.

그래서인지 그 새로운 모습이 못내 설레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아니야! 자꾸 이런 마음을 먹으면 안 돼.’

지금까지 몇 번이고 되뇌었다.

누구든 이 사람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렐 것이라고, 그러니 딱히 다른 감정이 있어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근래 2황자를 보면, 또 그가 다정하게 웃고 말해 주면 주책맞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연애 한 번 못해 본 티를 여기서 내는 건가, 아드넬은 속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황급히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테시우스의 탄신연에 가기 전 생각했던 것을 얘기하기엔 지금만큼 적절한 때가 없을 것 같았다.

“저어……. 전하, 한 가지 청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청이라니?”

“그게……. 실은, 저번에 가지 못한 라그랑에 다녀왔으면 합니다.”

테시우스와 조금 떨어져 있을 필요도 있지만, 실제로 한 번 다녀오긴 해야 했다.

요리도 마찬가지지만 화장품 또한 대량 생산을 하게 되면 레시피의 용량이 일부 달라지기도 할뿐더러, 라그랑 주민들의 교육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도 확인해야 했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저와 함께 일하는 카리아 상회의 상단주님이 많이 신경 써 주셔서, 가서 확인만 하고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

“……전하?”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아드넬이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묻자, 테시우스는 언제부터 쥐고 있었는지 움켜쥔 주먹을 슬쩍 뒤로 빼며 웃어 보였다.

“그……래, 일 때문이라는데 어쩔 수 없지.”

“…….”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얼굴과 달리 목소리엔 어떤 감정이 섞여 있었다.

뭔가 싫은데 억지로 수긍하는 느낌이랄까.

이에 아드넬이 눈치를 보자 테시우스는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정말 괜찮으니 다녀오도록 해. 일전에 말하지 않았나, 네가 바라면 언제든지 별궁 밖에 나갔다 와도 좋노라고.”

“예…….”

“다만 가는 길에 험한 일을 당하진 않을까 그게 걱정이로군. 가능하면 호위 기사를 대동하는 것도…….”

그때 테시우스가 말을 하다 말고 핫 하며 멈칫하더니, 황급히 덧붙였다.

“그러니까 그대는 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변고라도 당하면 안 되지. 그래서 하는 말이야.”

“아, 예. 하지만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조수들이 함께 갈 거라서요.”

“조수들?”

순간 테시우스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그 조수들이라 함은 매일같이 아드넬의 뒤만 졸졸 쫓아다니는 대형견 두 마리가 아니던가.

‘……내 얼굴엔 한참 못 미치지만, 그래도 도저히 못 봐 줄 얼굴은 아닌데.’

물론 아드넬이 그들을 좋아할 리는 없지만.

아니 뭐, 좋아해도 상관이 없긴 한데.

묘하게 심기에 거슬리는 것이 썩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당장 라그랑에 다녀온다는 말만 들었을 때도 “안 돼!”하고 소리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지 않았던가.

‘……아니야, 자꾸 이러면 안 돼. 아드넬은 그러니까, 친구야. 소중한 아렌 같은 친구일 뿐이지, 내가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테시우스는 안쪽 입술을 꾹 깨물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잠시 후, 낮게 숨을 뱉으며 그가 말했다.

“그 조수들, 제 한 몸 지킬 능력은 있다던가?”

“한때 용병으로 일했던 사람들입니다. 전하께서 우려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 그렇다면야.”

제기랄, 검 한 번 제대로 쥐어 본 적 없는 애송이이길 바랐는데.

테시우스는 속으로 욕지기를 중얼거리며 마지못해 수긍했다.

“그럼 몸 조심히 다녀오도록. 그리고…….”

잠시간 머뭇거리던 그가 뒤이어 말했다.

“가능하면 빨리, 돌아와. 기다리고 있을 테니.”

* * *

다음 날 이른 아침.

아드넬과 제이든, 그리고 필립은 곧장 마차에 올라 라그랑으로 출발했다.

사실 제이든만 데려갈 생각이었는데 필립이 “나 혼자 별궁에서 뭐 하고 있으라고!” 하며 물고 늘어진 탓에 어쩔 수 없이 그도 함께 가게 되었다.

덕분에 남장을 하지 않으려던 계획은 물 건너갔지만, 그래도 아드넬은 바깥나들이를 간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다만 아드넬은 마차에 오르고도 어딘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창밖만 응시하고 있었는데, 제이든은 그런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으며 둘 사이에 낀 필립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눈치만 보고 있었다.

“…….”

덕분에 마차 안에는 어색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중간중간 멈춰 쉴 때를 제외하고선 오가는 대화도 전혀 없었다.

그로부터 더 시간이 흘러 라그랑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여관에 도착했을 때였다.

“나는 방에서 혼자 먹을게. 두 사람 모두 저녁 맛있게 먹어.”

“아드넬…….”

일부러 대화를 피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드넬은 음식을 주문하자마자 제 방으로 올라갔다.

그녀와 여행할 때는 언제나, 여관 1층 식당에서 함께 식사했는데.

작은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웃고 떠들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텅 빈 자리를 응시하며 제이든이 주먹을 꽉 쥐었다.

“어제부터 뭔가 이상하지 않아? 아니, 요 근래도 이상했어. 침실에 틀어박히질 않나, 툭하면 우릴 떼어 놓고 다니질 않나. 아드넬이 저럴 사람이 아닌데…….”

“…….”

“아, 진짜 답답해! 너라도 말 좀 해 봐!”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모습에 필립이 가슴께를 주먹으로 쿵쿵 치며 제 답답한 심경을 내보였다.

그제야 제이든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2황자가……. 아드넬을 좋아하는 것 같아.”

“……뭐?”

그때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이야기가 나왔다.

필립은 두 눈을 크게 뜨는가 싶더니 이내 오만상을 쓰며 버럭 역정을 냈다.

“이 상황에 농담이 나와? 2황자가 아드넬을 좋아한다니 무슨 그런 미친 소리를……!”

“넌 지금 내가 농담하는 걸로 보여?”

그 순간 필립은 제이든의 서슬 퍼런 눈동자를 발견했다.

하얗게 질리도록 꽉 쥔 주먹과 잇새로 새어 나오는 차가운 목소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왜, 네가 화를 내는 건데?

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어 필립이 묘하게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답해 줄 마음이 전혀 없다는 듯 제이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난 아드넬한테 다녀올게.”

“어, 야……!”

필립이 채 붙잡기도 전에 제이든은 쿵쾅쿵쾅 소리를 내며 계단을 올랐다.

그의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담긴 요란한 걸음이었다.

마침내 아드넬의 방 앞에 도착한 제이든은, 잠시 문 앞에서 숨을 고르다 가볍게 노크했다.

“……아드넬. 잠깐 들어갈게.”

본래 이런 식으로 통보하는 사람이 아니나, 허락을 구하면 거절할 것 같아 제이든이 곧장 문을 열었다.

그런 그의 태도에 놀란 아드넬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제이든을 쳐다보았다.

“제이든……?”

“어제 2황자랑,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엔 불안감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러나 제이든의 마음을 꿈에도 모르는 아드넬은 “후우…….” 하고 작게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심각하거나 안 좋은 일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그냥, 더는 바라지 않을 테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만이라도 말해 줘.”

“제이든.”

“아드넬, 제발.”

“…….”

단호하게 거절했음에도 제이든은 물러서지 않았다.

아드넬은 그런 그를 쳐다보다가 손바닥으로 눈을 덮으며 또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말해 줄게. 일단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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