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아……. 예, 감사합니다.”
함께 들어가지는 않는 듯 시녀가 문 옆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섰다.
아드넬은 소리 나지 않게 침을 한 번 꿀꺽, 식은땀이 배어 나는 새하얀 이마를 한 번 슥 훔친 뒤, 후 하고 숨을 고르곤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본성 밖으로 나오진 않은 것 같은데, 유리문을 열자마자 화사한 꽃내음이 훙 하고 불어왔다.
‘여기가 그 유명한 실내 화원이구나.’
이백여 년 전, 애처가로 유명하던 선대 황제가 황후를 위해 만들었다는 실내 화원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자연 속에 그대로 들어온 듯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화원은 여러 가지 나무들과 기화요초들로 만발해 있었다.
낯선 꽃향기엔 싱그러운 풀 내음이 섞여 있었고, 어디 하나 모난 것 없이 잘 다듬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러웠다.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조경사들과 마법사들이 힘을 합쳐 만들었다더니, 과연 그 명성에 걸맞은 곳이었다.
물론 이 아름다운 풍경을 마음껏 즐길 여유는 없었다.
아드넬은 바닥에 나 있는 조약돌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한 번 내디딜 때마다 심장이 쿵 쿵 하고 뜀박질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길의 끝에 도착한 아드넬은 황후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기도 전에 냅다 허리부터 깊숙이 숙여 보였다.
“제국의 하늘을 수호하는 고귀한 검이자 방패이시며, 제국의 땅을 비추는 지고한 달이신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아드넬이라고 합니다.”
“이제야 그 값비싼 얼굴을 보는구나.”
“……송구합니다, 제가 일찍이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고개를 들어라.”
낮은 목소리에 섞인 조소는 싸늘했다.
존재만으로도 위압감을 뿜어내는 이가 그러하니 더욱 두려웠다.
하지만 선택지는 없었다.
아드넬은 마지못해 깊게 숙인 허리를 곧게 펴며 떨리는 눈으로 황후를 마주했다.
그녀는 잠시간 아드넬을 위아래로 훑어보는가 싶더니, 곧 턱을 까딱하며 맞은편 빈자리를 가리켜 보였다.
이에 아드넬은 냉큼 빈자리에 앉아 꿀꺽하고 침을 삼켰다.
“내가 왜 불렀는지 퍽 궁금할 테지.”
“……예, 제 부족한 식견으로는 감히 황후 폐하의 뜻을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장사치라 그런지 말재주는 좋구나. 카리아 상회의 상단주와 똑같아.”
달칵.
알라니아가 찻잔을 내려놓는 순간 아드넬의 몸이 움찔하고 떨렸다.
“본래는 이보다 일찍 만나려 했지만……. 테시우스, 그 아이가 어찌나 둘러대던지.”
피식하는 소리엔 비웃음이 스며들어 있었다.
알라니아는 눈을 살짝 내리깐 채로 아드넬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래, 네 주인이 더는 카리아 상회와 거래하지 않는다고.”
“예, 주인님께선 수도에 살롱을 열 계획이 있으셔…….”
“한데 내가 들은 건 그것과 좀 다르더군.”
“예……?”
“어여쁜 디아나 영애가 직접 듣고 말해 주길, 살롱을 여는 대신 화장품의 대량 생산 사업을 진행하려 한다던데. 영애를 위한 화장품을 만든 대가로는 화첩의 모델이 되어 달라 했다지?”
이미 다 알고 있으니 거짓말할 생각은 말라는 기색이 다분한 투였다.
물론 그랬다간 이 자리에서 목이 잘려 나가도 할 말이 없기에 아드넬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평민들은 화장품을 접할 기회가 적다 보니…….”
“바로 그게 문제야.”
그때, 또 한 번 말을 자른 알라니아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티 테이블 위에 있던 부채를 착 하고 펼쳤다.
그녀의 감정을 대변하듯 부채 너머로 찌푸려진 눈살이 선명하게 보였다.
“제국의 두 공녀는 이미 황태자비 후보로 들어와 경합을 진행하고 있다. 한데 훗날 나의 뒤를 이어 황후의 자리에 오를 영애들을 한낮 화첩의 모델로 세운다니, 황실의 위엄을 어디까지 떨어트릴 생각이지?”
“아…….”
“제국민을 생각하는 마음은 칭찬받아 마땅하나 아랫것들이 윗사람의 이름을 마음껏 팔게 둘 수도 없는 노릇. 시도는 좋았지만 그 사업은 이만 접도록.”
이미 저 혼자 생각하고 저 혼자 결론까지 내린 후였다.
하지만 반박할 수 없는 이유는, 상대가 황후라서가 아닌 아드넬이 우려하던 점도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황후가 아닌 공녀의 환심을 사서 시작하려던 건데.’
귀족들은 희소가치가 높을수록, 가격이 높을수록, 그런 물건을 소유할 수 있는 재력에 자부심을 가진다.
아드넬이 저렴한 값에 화장품을 공급해 봤자 오히려 코웃음을 치는 것이다.
그러나 사교계의 정점에 서 있는 공녀들이 사용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화려한 연회장에서 누구보다 돋보이게 만들어 주는 화장품을 이미 사용하고 있는 공녀를 보는 순간 가격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질 테니까.
문제는 황후였다.
디아나와 율리시아 둘 중 누가 황태자비가 되든 간에 바스토르가 황제로 즉위하기 전엔 황후의 말이 절대적이어서 그녀가 반대하는 이상 누구도 아드넬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을 터였다.
그래도 경합에 참여한 두 공녀의 새로운 화장법과 화장품을 보면 마음을 다르게 먹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을 품었건만.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줄은…….’
마치 출발선에 서기도 전에 결승선의 끈을 잘라 버린 느낌이었다.
한편 아드넬의 얼굴이 침중하게 가라앉자 알라니아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기도 아깝다는 듯 매섭게 쏘아붙였다.
“그래서 대답은?”
“아……! 그……. 예, 황후 폐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그것 말곤 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제야 알라니아는 얼굴을 반쯤 가린 부채를 탁 접어 내려놓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동시에 덧붙였다.
“추가로, 더는 카리아 상회와 거래를 진행하지 않는다 하니 앞으로는 네가 나의 화장품까지 도맡아 제작해 보내도록.”
* * *
진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디아나가 아드넬이 기대감을 위해 덧붙인 자초 립밤, 미네랄 파우더 같은 화장품까지 황후에게 말한 탓에 오랫동안 붙잡혀 미주알고주알 설명하느라 시간도 훌쩍 지나갔다.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가며 붉은 노을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기분은 더 축축 처지며 어깨도 힘없이 늘어지고 말았다.
터덜터덜 지친 걸음으로 별궁에 돌아온 아드넬은 홀린 듯이 후원으로 향했다.
그저 지금은 쉬고 싶다는 마음만이 간절했다.
그렇게 멍하니 걷길 한참, 마침내 후원의 정자에 도착한 순간 울컥하며 눈물이 치밀어 올랐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공녀들에게 모델을 부탁하고 디아나가 긍정적인 답을 돌려주었을 때, 아드넬은 일말의 기대를 품었다.
황후가 한 말 그대로의 여파는 물론 걱정스러웠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일단 한 번 보여 주기만 하면 될 거라고, 새로운 화장법을 보여 주면 황후도 마음을 바꾸지 않을까 하고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그건 제 착각이었다.
그렇게 시작도 전에 끝나 버리니 허무함이 극에 달했다.
‘게다가 이젠 자기 화장품까지 만들라 하니……. 도대체 난 뭐 이리 잘 풀리는 게 없을까.’
예전부터 계속 부르려던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겠지.
상회를 통해 공급하지 않고 살롱을 세운다는데 그러기까진 시간이 오래 걸릴 테니까.
때마침 디아나를 통해 얘기도 들었고 큰 행사도 끝났으니 이때다 싶어 부른 게 틀림없었다.
“……아, 몰라! 나도 모른다고!”
아드넬은 짜증스럽게 외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런데 막상 얼굴을 가리고 나니 참았던 눈물이 펑 하고 터져 나왔다.
너무 힘들어.
여기저기 치이고 싶지 않아.
그냥 예전처럼만 살고 싶은데…….
“……아드넬?”
바로 그때, 익숙하면서도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드넬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곳엔, 테시우스가 서 있었다.
“잠깐만, 얼굴이……!”
“가까이 오지 마세요!”
그때 테시우스가 우는 얼굴에 놀라 가까이 다가오려 하자 아드넬이 버럭 소리쳤다.
이런 추한 모습을 보여 주려던 게 아닌데, 창피함으로 두 볼이 발갛게 익었다.
“그냥, 그냥……. 원래 가던 길 가셔도 돼요. 저는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당황해서인지 늘 격식을 차리던 말투도 다소 친근한 투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건 2황자가 아닌 위로였고, 그를 보면 오히려 복잡해지기만 했다.
그러니까 그냥 이대로, 무시해 줬으면.
얼마나 큰 무례인지 결코 모르지 않지만 지금은 누구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드넬은 아까 전처럼 다시 다리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2황자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지금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풀잎이 짓밟히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에 아드넬도 시위하듯 꼼짝도 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더 지나도 발소리는 여전히 들리지 않았다.
‘기어코 사과를 받아 내야 속이 시원하다, 이거야?’
감히 황족을 상대로 이런 무례를 저지르다니, 2황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꼭 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문득 속에서 뭔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뜨겁고, 억울하고, 화도 나고, 대체 왜 날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느냐는 그런.
결국 참다못한 아드넬이 번쩍 고개를 쳐들며 소리쳤다.
“처벌을 하시겠다면 얼마든지……!”
하지만 아드넬은 뒷말을 채 잇지 못했다.
고개를 든 순간, 2황자의 얼굴이 대번에 눈에 들어왔다.
칠흑 같은 흑발과 황금처럼 빛나는 금안.
그는 꽤 가까운 거리에서, 아드넬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굽혀 앉은 채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곤 눈물 젖은 얼굴로 손을 가져갔다.
“무슨 일인지 말해 줄 수 있겠나.”
평소와 같은 말투.
평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
그러나 눈물을 닦아 주는 손길은 부드러웠고 뺨에 닿은 온기는 따듯했다.
그리고 그의 황금빛 눈동자엔, 진심 어린 걱정이 담겨 있었다.
‘왜……. 이런 눈으로 날…….’
어쩐지 가슴이 콩닥거렸다.
테시우스의 손이 얼굴에서 떨어지자 아드넬이 물었다.
“화를……. 내지 않으십니까?”
“화를 내다니, 내가 네게?”
“그, 그러니까 아까 제가 전하께 말실수도 하고 소리도 치고 그래서…….”
“……글쎄. 딱히 화가 나진 않는걸. 오히려…….”
테시우스가 아드넬을 응시하며 가볍게 웃어 보였다.
“날 전보다 더 편하게 생각해 주는 것 같아 기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