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전하께서도 황태자 전하와 마찬가지로 이미 결혼 적령기를 넘기셨습니다. 이젠 제 짝을 만날 때가 되셨지요.”
“난 아직 결혼 생각이 없습니다만.”
“그러하니 더욱 아리따운 여인을 곁에 두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그쪽……. 취향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문도 그냥 둘 수는 없는 노릇이고요.”
“소문이란 건 언제고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기 마련입니다.”
“대부분의 소문은 그렇지만, 전하께서 오래도록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으시면 오히려 그 소문에 부채질만 하는 격입니다. 전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
“마침 제가 적당한 아이를 알고 있습니다. 그저 친구로서, 종종 찾아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인정하긴 싫지만,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리고 라이칸 후작이 말하는 건 당장 혼인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소문을 잠재울 가짜 정인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겸사겸사 ‘그쪽 취향’이라는 불미스러운 소문도 없애고.
‘……무투회 때 일로 더 불거졌다고는 들었어.’
이젠 두 사람의 사랑을 응원하는 이들도 생겨났다며 펠릭스가 파리해진 얼굴로 말했었다.
확실히, 라이칸 후작의 말은 실리를 따지자면 실보다 득이 많은 의견이었다.
다만 문제는…….
‘아드넬도 남자인데 별궁에 부른 영애를 보고 반하기라도 하면…….’
한창 혈기 왕성한 나이, 스무 살.
여기에 아드넬은 성격도 세심하고 또 다정해서 여자들에게 인기도 많다.
이미 별궁 하녀들 중 몇몇은 그를 보고 얼굴을 붉히기도 한다.
그런데 신분도 높고 예쁜 영애를 만나면, 분명 그도…….
둘이 함께하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상상한 순간, 누가 바닥으로 끌어 내리는 것처럼 기분이 와장창 무너졌다.
테시우스는 와그작 미간을 구기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됩니다.”
“하지만……!”
“선물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럼 이만 돌아가 보십시오, 외숙.”
명백한 축객령에 라이칸 후작은 벙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으나, 테시우스는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휙 고개를 돌렸다.
그의 기분을 살피기엔 당장 본인이 무척 불쾌했다.
하지만 라이칸 후작이 마지못해 자리를 뜨고서도 마음은 더욱 뒤숭숭해졌다.
‘……이제 겨우 조금 친해졌는데.’
처음으로 사과를 하고, 마음을 풀어 주려 노력했다.
아드넬에게 도움이 되면 그가 좋아할 것 같아 대기실에서 일부러 연고까지 바르며 은근슬쩍 홍보했다.
그렇게 간신히 곁에 두긴 했지만, 그마저도 시한부인데.
마음 같아선 최대한 치료를 오랫동안 끌어서라도 계속 붙잡아 두고 싶었다.
그런 와중에 예쁜 영애가 별궁에 들락날락하다 보면 또 모르지, 아드넬이 저도 모르게 괜스레 시선을 주면서 마음까지 줄지도.
‘……그것만큼은 절대 용납 못 해.’
언젠가는 저도, 아드넬도 제 짝을 만날 때가 찾아오겠지만.
아무튼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절대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왜인지 모를 그 이기적인 마음에 테시우스는 이후로도 줄곧 얼굴을 구긴 채로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 불쾌함은 곧 눈 녹듯 사르르 사라졌다.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아드넬이 작은 선물 상자를 들고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시지?’
오늘은 탄신일인데.
세상에서 자기가 주인공인 날인데.
웃는 낯으로 있어도 모자랄 판국에 테시우스는 미간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
그러나 아드넬이 고개를 한 번 숙였다가 다시 들었을 때, 그의 얼굴은 또 딴판이 되어 있었다.
“와 줬군.”
활짝 웃는 낯은 아니었으나 한쪽 입꼬리가 위로 올라간 채였다.
얼핏 보면 비웃는 것이라 오해할만 하지만, 이젠 그에 대해 퍽 잘 아는 아드넬은 저 미소가 기분이 좋을 때 나오는 것이라는 걸 금세 눈치챘다.
“스물세 번째 탄신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전하.”
“고맙다, 아드넬.”
“그리고 이건 약소하나마……. 제 선물입니다.”
옆에 수북이 쌓인 선물 더미를 보자니 당연하지만 주눅이 들었다.
그렇다고 초대까지 받아서 온 마당에 준비한 선물을 안 줄 수는 없어, 아드넬은 뻣뻣하게 선물을 내밀었다.
그리곤 빠르게 자리를 뜰 생각으로 말했다.
“그럼 전 이만…….”
“기다려.”
그런데 테시우스는 이상하게도, 선물을 받아 옆에 두는 대신 그 자리에서 풀어 보았다.
아드넬은 물론이고 권좌에 앉아 위에서 줄곧 지켜보던 바스토르 또한 눈을 크게 떴다.
붉은 리본이 풀리고 상자의 뚜껑이 열리자 찬란한 조명 빛을 받아 반짝이는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아드넬이 준비한 건 다름 아닌 검집을 끼울 수 있는 벨트로 작은 소지품을 담을 수 있는 주머니까지 달린, 특별히 주문해 만든 벨트였다.
허리를 고정하는 버클은 강철과 섞은 은으로 만들어 반짝였고, 벨트도 최고급 가죽을 사용해 무척 튼튼했다.
그것만으론 영 허전한 감이 없지 않아 있어 나름 멋있는 무늬도 주문해 새겨 넣었는데, 다른 온갖 귀한 선물들을 보자니 초라하기 그지없어 아드넬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여기서 꺼내 볼 줄은 몰랐는데……!’
지금껏 받은 선물들은 다 옆에 쌓아 놓기에 당연히 그럴 줄 알았는데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아드넬은 마치 변명하듯 황급히 말했다.
“그, 그러니까, 작은 연고 같은 건 들고 다니기 번거로우실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따로 주문해 만든 것입니다만 그리 대단치도 않고 볼품없는…….”
“아니, 무척 마음에 들어. 내가 가장 필요하던 물건이야.”
“예, 예?”
“네 말마따나 작은 소지품은 들고 다니기가 퍽 번거로웠는데, 이런 주머니가 달린 벨트라니. 실용성도 뛰어나고 소재도 아주 튼튼한 듯하군. 진심으로 마음에 든다.”
빈말이 아니라는 듯 테시우스는 상자에서 아예 벨트를 꺼내 여기저기 살펴보기까지 했다.
그리곤 아드넬을 쳐다보며 예전에 무투회에서처럼 싱긋, 웃어 보였다.
“고맙다. 아드넬.”
“……소…… 송구합니다.”
저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고마워할 만한 물건이 전혀 아닌데!
어느새 아드넬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달아올라 있었고 바스토르는 그 모습을 위에서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곁에 누군가 다가와 작게 속삭였으나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아드넬은 물론, 테시우스도 보지 못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래. 이번엔 손님으로 왔으니만큼 연회도 편히 즐기도록 해.”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전하.”
왜 이렇게 다정하지, 내가 알던 그 2황자가 맞나?
아드넬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안 그래도 지난번 무투회 후로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는데.
이젠 목소리마저 퍽 다정하니 주책맞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설마 내가 2황자 전하를 좋아하는 걸까?’
그런 게 아니라면 왜 자꾸 가슴이 뛰는 거야?
아드넬은 문득 고개를 돌려 테시우스를 바라보았다.
높은 단상 위, 자리에 앉아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그는 아름다웠고 또한 권태로웠다.
아까 제게 보여 준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싸늘하리만큼 무표정한 얼굴로 인사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저가 어떤 마음을 품고, 그가 어떤 마음을 품든 간에 애당초 이루어질 수 있는 사이 자체가 아니었다.
‘2황자 전하는 언젠가 저분만큼이나 높으신 분과 맺어지실 거야. 나도, 나와 비슷한 사람과 맺어질 거고.’
어디로 보나 부족함이 없고 빼어난 사람이 다정하고 또 상냥하게 대해 주면 설렐 것이다.
그리 대단한 사람이 저를 보며 웃어 주고, 특별한 사람을 대하듯 특별한 선물을 주면 가슴이 두근거릴 것이다.
그러니까 이 박동은, 당연한 것이었다.
저가 아닌 누구든 당연히 느낄 설렘이었다.
문득 아드넬의 얼굴 위로 씁쓸함이 어렸으나, 그녀는 몸을 돌렸다.
평민 신분으로 초대를 받아 온 것만으로도 과분한데 다른 귀족들처럼 춤을 춘다거나 하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연회를 편히 즐기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아드넬은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그의 탄신일을 축하하며 조용히 연회장을 떠났다.
누군가의 시선이 제 걸음을 뒤따라오고 있었다는 걸 꿈에도 모른 채.
* * *
왜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저 아이가 만든 화장품이 효과가 아주 뛰어나다지?’
‘……벌써 소문이 났습니까?’
‘알면서 모른척하긴. 황후 폐하께서 부르시는 걸 네가 막고 있잖아.’
황태자를 처음 만난 날, 바스토르와 테시우스 사이에서 오갔던 짧은 대화는 스쳐 지나가듯 금세 잊혔다.
그래서 큰 걱정 없이 2황자와 두 공녀를 위한 화장품만 만들던 것이었는데.
‘나한테 무슨 말을 하려고 부르는 걸까.’
느지막한 오후, 갑자기 본성에서 찾아온 시녀는 대뜸 황후가 만나길 원한다며 빠르게 준비할 것을 재촉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드넬은 덜컥 겁부터 났다.
별궁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자신을 찾던 사람인데 그걸 막아 주던 2황자라는 벽이 사라지고 나니 허허벌판에 홀로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서 말실수라도 하면 어쩌나, 예상치 못한 말을 들었을 땐 어찌 반응해야 하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들에 자꾸만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러나 조금만 미적거려도 채근하는 시녀의 닦달에 아드넬은 깨끗이 씻고 저가 가진 것 중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입자마자 본성으로 출발해야만 했다.
본성에 다다라 드넓은 연회홀을 지나고, 공녀들이 머무르는 처소를 지나고, 본래 알던 곳이 아닌 처음 가 보는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불안감에 가슴이 졸아들었다.
먼지 한 톨 앉지 않은 화려한 장식품과 위용을 뿜어내는 역사화를 볼 때마다 점점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아드넬은 반투명한 유리문 앞에 멈춰 섰다.
“황후 폐하께선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