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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54)화 (54/141)

54화

열심히 눈알을 굴려 보았지만 두 번째 상석은 물론이고 일전에 바스토르가 앉았던 자리도 비어 있었다.

아는 이 하나 없는 연회홀에서 아드넬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구석진 곳에서 얌전히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아드넬은 멋쩍은 얼굴로 볼을 긁으며 조용히 탄신연의 시작을 기다렸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초대받은 대부분의 사람이 도착하자 마침내 시종장이 모습을 드러내며 홀을 울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바스토르 폰 아이테라 황태자 전하, 테시우스 폰 아이테라 2황자 전하께서 드십니다!”

지난번 축하 연회 때와 비슷한 레퍼토리였다.

아드넬은 고개를 들어 먼 곳에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저도 모르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작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아…….”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이는 황태자인데, 정작 아드넬의 눈에는 테시우스만 들어왔다.

이전에 보았던 것과 비슷한 형태의 예복으로 크게 바뀐 것이라곤 색깔뿐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층 빛나 보였다.

늘 편하게 입던 사람이 갖춰 입어 그런 것도 있겠으나, 높은 자리에 앉아 귀족들을 내려다보며 밝은 빛을 한 몸에 받는 모습은 그간 아드넬이 봐왔던 테시우스가 아니었다.

감히 그를 향해 손을 뻗을 수도 없을 만큼 고귀한 이였다.

“……친애하는 내 동생의 탄신연에 와 준 그대들에게 감사를 표하는바, 다들 진심 어린 축하와 함께 편히 즐겼으면 하네.”

아드넬이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자리에서 일어나 짧게 연설하던 바스토르가 연회의 시작을 알리자 악단도 멈췄던 곡을 다시 연주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져온 선물을 들고 테시우스의 앞에 나아갔다.

‘나는 조금 있다가 가자.’

아무리 정식으로 초대장을 받아서 온 손님이라지만 화려하기 그지없는 귀족들의 차림새와 그들이 가져온 온갖 진귀한 선물들에 상대적으로 주눅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드넬은 얌전히 구석진 자리에 앉아 적당한 때를 기다렸다.

그러던 그때, 기둥 뒤에 있어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그녀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머리 위로 내려앉은 그림자에 아드넬이 고개를 들자 낯선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네가 아드넬이란 평민인가?”

갑작스레 ‘아드넬’이냐 물어본 이는 다름 아닌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중년 남성으로, 아드넬이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는 짙은 회색 머리에 테시우스와 같은 금안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다소 날카롭게 느껴지는 말투와는 달리 얼굴엔 퍽 온화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아드넬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일단 고개부터 숙이고 보았다.

“예, 그렇습니다만……. 제겐 무슨 일로…….”

“이런, 소개가 늦었군. 난 리비엘이라고 하네. 편히 라이칸 후작이라 부르게.”

라이칸 후작.

낯설지만 동시에 익숙한 이름은 제국민이라면 대부분 아는 이름으로, 죽은 리아누 황비의 동복 오빠이자 2황자 테시우스에겐 외숙이 되는 이였다.

‘이 사람이 리아누 황비를 죽인 독살범을 잡은 사람이구나.’

대륙 전역을 휩쓴 황제의 분노를 가라앉힌 사람.

아드넬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냉큼 다시 숙였다.

“송구합니다. 천한 것이라 감히 알아뵈지 못했습니다.”

“괜찮으니 고개를 들게. 내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 찾아온 것이니.”

라이칸 후작은 자연스럽게 아드넬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아드넬도 다시금 착석하자 그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래, 지금 2황자 전하의 병을 치료 중이라지?”

“예, 그렇습니다.”

“현재 병증은 어떤가?”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흉터에는 꾸준히 연고를 바르고 있고, 긁어 덧나지 않게끔 가려움증을 가라앉히는 화장품도 주기적으로 바르고 계십니다. 아마……. 올해 안으로 확실히 차도를 보이실 듯합니다.”

“올해 안이라……. 그렇군.”

라이칸 후작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 입가에 손을 가져가 톡톡 두드렸다.

그리곤 대뜸 씁쓸한 얼굴로 작게 말했다.

“보통 황족들은 어릴 때부터 친분을 다지기 위해 비슷한 신분과 지위에 있는 가문의 자제들을 놀이 친구로 두어 어울리곤 하지. 하지만 2황자 전하께선……. 그마저도 편히 두실 수 없었네.”

“예……?”

“아, 미안하네. 2황자 전하를 생각하니 옛일이 떠올라서 말이야.”

말을 잇는 얼굴로 수심이 떠올랐다.

그 모습에 아드넬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비슷한 신분과 지위에 있는 가문의 자제들을 놀이 친구로 삼는다면 최소한 후작가 이상은 되어야 한다는 소리인데, 그마저도 편히 둘 수 없었다는 건 누군가의 개입 혹은 시선이 있었다는 소리였다.

‘아마도 황후겠지.’

테시우스가 놀이 친구를 두었을 나이라면 아마도 그가 후계자 수업을 포기하기 전일 터였다.

자연히 견제도 심했을 거고.

아드넬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러셨군요.”

“2황자 전하께도 오랜 친구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들곤 한다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전하께선……. 외로운 분이시니까요.”

바로 그때, 아드넬은 저도 모르게 본심을 내뱉고 말았다.

그 말에 라이칸 후작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쳐다봤다.

“2황자 전하와 퍽 가깝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 듯하군……?”

“소, 송구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실언을 했습니다.”

“아니, 아니야. 전하께서 가깝게 지내는 이가 있다면 다행이지. 자네의 말마따나 외로우신 분이니…….”

아드넬이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내리깐 사이 라이칸 후작이 덧붙였다.

“제 편 하나 없는 외로운 황궁에서 지내시는 것이 못내 마음 쓰여 서신이라도 자주 보내고 싶었건만, 그마저도 할 수 없었네. 그래도 자네가 이리 가까이 지내니 한결 마음이 놓이는군. 뭐……. 머지않아 함께 있어 드릴 사람이 생길 테지만.”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라이칸 후작은 뭐라 말하더니 마지막 문장은 작게 중얼거렸다.

이를 제대로 듣지 못한 아드넬이 되물었으나 그는 다시 물어보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이만 자리를 비켜 주겠네. 그럼 편히 쉬고 있게.”

“아, 예.”

아드넬이 황급히 일어서 묵례해 보이자 라이칸 후작은 연회홀 어딘가로 사라졌다.

하지만 왜인지 묘한 기분이 들어 아드넬은 괜스레 팔을 문지르다가 바깥을 힐끔 살폈다.

라이칸 후작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초대를 받아서 온 사람들의 선물 행렬도 차츰 끝나가서, 이젠 나가도 될 것 같았다.

아드넬은 진심을 담아 고른 선물을 두 팔로 소중히 안아 든 채 구석진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짧은 줄 끝에 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사라질수록 테시우스의 옆엔 수북한 선물 상자가 쌓였다.

아드넬이 단상 앞에 서게 된 건 그로부터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난 뒤였다.

* * *

모든 것이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반짝이는 샹들리에도, 화사하게 만발한 꽃도, 어디 하나 부족함 없이 준비된 탄신연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 자리의 주인공인 테시우스는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지루하다.’

황태자비 경합이니 뭐니 하는 것들엔 관심도 없었다.

황제파인 체스터 영애가 준비했든 귀족파인 하르트 영애가 준비했든 그건 제 알 바가 아니었다.

생각나는 건 단 하나, 어서 이 지루한 연회가 끝나는 것뿐이었다.

‘아드넬은 어디 있을까.’

열심히 찾아 보았지만 그는 어디에 숨었는지 통 보이질 않았다.

일찍이 초대장을 보내긴 했는데 혹시나 아예 오지 않은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문득 들었다.

어쩌면 그 보검이 너무 부담스러웠는지도 몰랐다.

그러다 연회가 시작되고, 초대를 받아 온 이들의 선물 행렬이 이어졌다.

그때마다 테시우스는 감사의 말로 화답했으나 귀로 듣지 않아도 눈에서 드러나는 속내를 보노라면 혀에 가시가 돋는 듯했다.

‘훗날 바스토르가 즉위하고 내가 다른 영지를 갖게 되면 제게 뭐 하나 떨어지길 바라는 거겠지.’

찾아오는 사람들의 지위가 그러했다.

수도의 귀족들이 아닌, 그들에 비해선 재력과 신분이 떨어지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바스토르는 황태자였고, 머지않아 황제 자리에 오를 테니 누군가에게 붙는다면 그에게 붙는 것이 맞았다.

테시우스도 이를 모르지 않기에 더 진저리가 났다.

그러던 중 마침내 반가운 이가 나타났다.

그의 외숙이자,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어머니를 떠올리게 만드는 사람.

라이칸 후작이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전하.”

“오랜만입니다, 외숙.”

라이칸 후작의 주름진 얼굴에선 테시우스의 얼굴 또한 찾아볼 수 있었다.

듣기로는 어머니와 많이 닮았다는데, 그를 볼 때마다 드는 묘하면서도 그리운 기분은 언제나 마음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라이칸 후작을 따라온 시종이 선물을 막 내려놓은 참이었다.

“편히 서신이라도 보낼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러지 못해 제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전 잘 지내고 있으니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보다 외숙은 잘 지내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전하의 무탈이 곧 제 무탈인 것을요, 그보다…….”

라이칸 후작이 말끝을 흐리자 테시우스가 그를 빤히 응시했다.

“전하의 오랜 병을 치료할 이를 데려오셨다 들었습니다.”

“……아, 예. 좀 되었습니다.”

“아까 잠시 만나 보았는데 그 아이가 전하와 퍽 가까이 지낸다더군요.”

아드넬이 왔구나, 일순 기분이 좋아졌다.

테시우스의 얼굴 위로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를 눈치챈 라이칸 후작의 눈동자 위로 무언가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으나 테시우스는 미처 보지 못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무릇 황족이라면 그 위치에 맞는 이를 친구로 삼아야지요. 더구나 그 청년과는 이미 한 차례 불미스러운 소문이 나지 않았습니까.”

“……하고 싶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외숙.”

테시우스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자 라이칸 후작이 “후우.” 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이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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