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송구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선……. 말씀드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역시 예민한 질문이었나 보군. 다시 한번 미안하네.”
“……송구합니다.”
“이만 돌아가도 좋네.”
“예, 단장님.”
다행히도 그는 더 붙잡는 대신 축객령을 내렸다.
그러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아드넬은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넙죽 숙여 보이고는 거의 도망치듯이 빠르게 집무실을 나섰다.
그제야 호르세도 “후우…….” 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실은, 아까 그 시종 말입니다…….’
‘어쩐지, 엘튼과 닮은 것 같습니다.’
‘물론 머리 색이나 눈동자는 전혀 다르지만……. 가까이서 보니 어딘가 엘튼과 닮은 구석이 있더군요.’
‘……혹시 아버지가 찾던 그분의…… 아니, 선을 넘었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그랬습니다.’
두 공녀의 입성 축하 연회 날, 저를 닮아 허튼 말은 하지 않는 켈리언이 조심스럽게 꺼낸 이야기.
그리고 뒤이어 떠오른 한 가지 생각.
‘……3개월. 그래, 3개월이었다.’
시간이 지나 아드리아나를 다시 찾았지만, 그녀와 재회하고 3개월 즈음이 되던 어느 날 그녀도 벨라가 임신했을 때처럼 속이 좋지 않다고 했었다.
하지만 뭘 알아채기도 전에 아드리아나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다.
그러니까 정말로 내 짐작이 맞다면, 아드리아나가 아이를 가져 떠난 걸지도 몰랐다.
황실 기사단장인 제게 사생아를 안겨 주었다간 가문에 큰 오점이 남을 테니.
더구나 그녀는 반역자의 딸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쓴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 엮인다면 아드리아나는 물론이고 갓 태어난 아이와 로란트 가문까지 몰살당할 터였다.
그러니까 정말로, 짐작일 뿐이지만.
‘아드리아나가 내 아이를 가져서 떠난 것이라면…….’
켈리언이 엘튼과 닮은 구석이 있노라 말한 아이.
아드리아나의 찬란한 에메랄드 바닷빛 눈동자를 가진 청년.
보는 순간 왠지 모르게 그녀를 떠올리게 만든 그 평민은.
정말 어쩌면, 내 아이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별관에서 우연히 마주친 순간 호르세는 저도 모르게 그를 불러세우고 말았다.
박동하는 긴장감에 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입 안이 바짝 말라 마른침을 삼키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따라오라 말했다.
그리고 마주한 얼굴은…….
‘켈리언의 말을 들어서인가, 정말로 어딘가……. 닮은 것 같아.’
켈리언의 성격은 저를 빼닮았지만, 얼굴은 모친인 벨라를 더 닮았다.
반면 엘튼은 벨라의 붉은 눈동자를 가진 대신 자신의 이목구비를 많이 닮았다.
그렇다고 아드넬이 저를 닮았다는 건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아드리아나와 자신의 어느 중간 즈음 머무르는 외모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니 이젠 정말로 아드넬이 제 핏줄일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차츰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드넬은 대답하지 않았다.
호르세는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밝은 밀빛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제 와 무슨 소용인가 싶으면서도…….’
그녀가 떠난 뒤 상처받은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다신 찾지 않으리라 수백 수천 번을 다짐했으면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쪽이 욱신거리는 그 이름을 다시 한번 잡고 싶다는 미련은 아직까지도 여전했다.
아드리아나, 봄날 아지랑이처럼 사라진 나의 여인.
온 마음을 주어 사랑했던 당신을 딱 한 번만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아무래도……. 내가 직접 알아보는 게 좋겠어.’
* * *
그로부터 시간은 더 흘러 어느덧 2황자 탄신연 당일.
보통 연회는 사흘간 진행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황태자 바스토르는 물론이고 테시우스 또한 화려함과 사치를 싫어해서, 지난번 축하 연회 때와 마찬가지로 하루만 열리게 되었다.
그래서 아드넬은 본래 계획했던 것과 달리, 수도에 나가 노는 대신 탄신연이 열리기 전 번화가에 갔다가 돌아왔다.
‘이번엔 정식으로 초대를 받아 가는 거니까.’
예전에 축하 연회에 갔을 땐 테시우스의 시종으로 둔갑해 갔지만 이번에는 정식 초대장을 들고 가는 만큼 옷도 다르게 입어야 했다.
때문에 의상실에 들러 보통 귀족 영식들이 입는 것처럼 처음으로 연회복을 맞췄는데, 혹여 치수를 재다가 성별이 들킬까 치수는 미리 재서 종이에 써 가고 아드넬이 직접 원단과 디자인을 골랐다.
그렇게 완성된 연회복은 며칠 만에 도착했다.
주름진 프릴이 달린, 목까지 올라오는 새하얀 셔츠에 갈색빛 조끼를 겹쳐 입는 옷이었는데 위에 걸치는 재킷은 밝은 밀색으로 맞추었다.
색만 보면 다소 밋밋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검은 실로 자수를 새겨 크게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부족하지 않고, 적당히 무난한 중간 점에 머물렀다.
바지 또한 재킷과 같은 밀색 원단으로 만들었는데 여기에 가죽 벨트를 차고 금색 무늬가 그려진 검은색 구두를 신었다.
머리는 단정하게 빗어 넘기고 장신구는 일절 하지 않았지만 간만에 머리를 넘겨서인지 반짝이는 바닷빛 눈동자가 유독 눈에 띄었다.
‘……아니야, 머리는 내리자.’
아드넬은 쓸어올린 앞머리를 내려 미간을 가렸다.
얼마 전 마주친 기사단장, 호르세가 했던 말이 떠오른 탓이다.
‘정확히 무슨 이유로 물어봤는지는 몰라도 절대 들켜선 안 돼.’
제국에서 부모의 죄는 곧 자식의 죄였다.
그 연좌제의 대표적인 예가 지금은 앓아누운 황제의 악명으로, 그는 과거 리아누 황비의 죽음에 관여한 가문과 그 핏줄을 이 땅에서 완전히 지워버렸다고 한다.
그런 사람이 황제로 있는 지금, 엄마가 뒤집어쓴 죄목이 제게로 이어졌다간 어떻게 될지 몰랐다.
가능하다면 누명을 벗는 것이 제일 좋지만 아드넬은 그와 관련해 들은 바가 없어 지금으로서는 무조건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가슴이 답답해.’
매일같이 답답한 복대를 가슴에 차고 지내서인지, 아니면 상황 때문인지 몰라도.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하다못해 하루만이라도 편하게 있을 수 있다면…….
‘……라그랑 핑계를 대서라도, 잠시 나갔다 올까 봐.’
전엔 2황자 때문에 포기했지만.
지금까지 겹친 상황들만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려 진이 쭉 빠졌다.
대충 어떻게 진행되는지 확인만 하고 돌아오겠다고 하면 2황자도 허락해 줄 것 같긴 한데.
앞으론 간섭하지 않겠다고도 했으니까, 그리고 그때는…….
‘여자의 모습으로 지내도 되지 않을까.’
엄마를 잃고 7살 때부터 지금까지, 무려 13년 동안 아드넬은 남장을 해 왔다.
매 순간 목소리를 낮춰 말하는 것도, 가슴을 꽉 조이는 복대를 차는 것도,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행사를 몰래 해결하는 것도, 하나같이 힘들지 않은 일이 없었다.
당연하지만 지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드넬이 남장을 시작한 데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타오르는 화염같이 붉고 윤기 어린 머리칼, 유명한 휴양지의 에메랄드빛 바다를 고스란히 담아 온 듯한 눈동자.
새하얗고 투명한 피부와 또렷하고 아름다운 이목구비의 곡선.
엄마, 아드리아나는 아름다웠고 어딜 가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시선을 끌었다.
때문에 아드넬에겐 어린 시절 틈만 나면 도망치듯 거처를 옮겼던 기억이 유독 많았다.
사병을 보내 엄마를 강제로 끌고 가려던 영주도 있었고, 앞에선 애절한 외사랑인 척하나 실은 호색한으로 소문이 자자한 상단주도 있었다.
두건으로 머리를 가린들 미모까지 모두 덮어지는 것은 아니라, 어딜 가든 남자들의 추파가 끊이질 않았다.
그렇게 끝없이 도망쳤으나, 주점에서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드리아나는 취객과 몸싸움을 벌이다가 식탁 모서리에 머리를 찧어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취객이 그녀를 희롱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아름다운 건 독이야. 그것도 여자라면 더더욱.’
아드넬은 예쁘장한 편이었다.
아드리아나처럼 화려하게 아름다운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꾸며 놓으면 어느 귀족가 영애처럼 보일 만큼 예뻤다.
아드넬은 제 외모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 남장을 시작했다.
덥수룩하게 머리를 자르고 목소리를 낮게 내며 일부러 거칠게 행동하고 여느 말썽꾸러기 남자아이처럼 굴었다.
몸이 자라고서부터는 특수 제작한 복대로 감추었고, 원피스나 치마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입지 않았다.
그렇게 13년이란 세월을 남자로서 살아왔다.
그런데 어떻게 지치지 않을 수 있을까.
‘……어차피 제이든은 내가 여자인 걸 알고 있으니까. 함께 가더라도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거야.’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 억지로 목소리를 낮추거나 복대로 가슴을 감추지 않고서, 한산한 거리를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만 있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일이 있을까.
그러잖아도 무투회 날 이후로 2황자만 떠올렸다 하면 자꾸 얼굴이 화끈거려서 보기가 꺼려지던 참인데, 오늘 탄신연만 잘 넘기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그리 생각하니 조금 기분이 좋아져 아드넬은 번화가에 나갔을 때 산 선물과 초대장을 챙긴 채 침실을 나섰다.
이제 본성으로 가는 길은 빠삭하게 외워 누군가에게 묻거나 혼자 헤매지 않아도 되었다.
하늘은 붉은 노을로 막 물들어가는 참이었고, 본성에 가까워질수록 화려한 마차들이 줄줄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드넬 또한 마찬가지로 연회홀 앞에 도착해 높은 계단을 올랐다.
활짝 열린 문 앞엔 명부를 확인하는 시종이 있었다.
그에게 초대장을 내밀자, 시종은 봉인을 뜯어 내용을 확인한 뒤 명부의 이름과 대조해 보곤 다시 초대장을 돌려주었다.
“들어가도 좋네.”
“감사합니다.”
말은 들어가도 좋다는데 눈으로는 힐끔힐끔 아드넬을 쳐다보았다.
사실 명부를 확인하는 시종뿐만 아니라 연회홀에 들어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아드넬을 힐끔거렸다.
아무래도 지난번 무투회 일 때문에 얼굴이 더 팔린 듯싶었다.
일전에 난 소문도 있고 하니 어쩔 수 없겠다 싶어 아드넬은 모르는 척 무시했다.
‘전하께선 아직 안 오셨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