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아드넬은 잠시 앞에서 숨을 가다듬은 뒤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닫힌 문 너머로 묵직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도록.”
절제된 음성은 군인의 그것과 비슷했다.
아드넬이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인영이 고개를 들었다.
새하얗게 센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노장, 노르디안이었다.
“2기사단장님을 뵙습니다. 아드넬이라고 합니다.”
“……아!”
그제야 누군지 알아봤다는 듯 노르디안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잠시간 허둥지둥하는가 싶더니 곧 집무실 한쪽에 있는 응접용 소파를 가리켰다.
“일단 앉지.”
“예.”
그나저나 정말 왜 불렀을까.
아드넬은 생각하며 잠자코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착석하자 노르디안은 냉큼 맞은편에 앉으며 뭐가 그리 급한지 곧장 본론부터 꺼냈다.
“이리 와 달라 부탁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근육통 연고’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서라네.”
“연고라면…….”
“카리아 상회에서 선보인, 그 연고 말일세.”
노르디안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깍지낀 손 위로 턱을 올려놓았다.
“듣자 하니 근육통뿐만 아니라 관절염에도 좋다는데, 사실인가?”
맨 처음 연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땐 아무래도 이름 때문에 근육통에만 효과가 있을 줄로 알았다.
그래서 관심을 거두었는데, 우연히 연고를 구한 견습 기사 하나가 관절염으로 고생하시는 어머니께 발라 드렸는데 놀랍게도 효과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사실 노르디안은 지옥 같은 훈련으로 견습 기사들이 1순위로 기피하는 훈련 교관이었지만, 집과 밖에서의 행동이 180도 바뀌는 애처가로도 유명했다.
그의 아내인 실비아 벨리페가 오랜 관절염으로 고생 중이라는 사실도 파다하게 알려져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의 관절염을 치료하고자 별별 방도를 찾아보며 치료를 시도했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비아의 관절염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 심해졌다.
관절염은 이렇다 할 치료 약이 없는 병이었고, 실비아는 거동이 불편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통증만큼은 어떻게 할 수 없어 많이 힘들어하는 중이었다.
“그 연고라면 카리아…….”
“카리아 상회에 문의를 해 봤지만 정식 판매를 준비하는 중이라는 답변만 돌아오고, 그게 언제쯤이라고는 말해 주지 않더군. 그리고 그 연고를 만든 사람이 자네라는 건 이미 알고 있어. 2황자 전하의 병까지 치료한 자네가 아니면 그런 약을 만들 수 있는 이는 제국에 아무도 없을 테니까.”
“…….”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내 아내가 관절염으로 고생 중인데 연고를 구할 수가 없으니 네가 만들어 달라, 대충 이런 뜻이잖아.
가뜩이나 머리도 복잡한데 이런 부탁이라니.
아드넬은 한숨을 쉬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으며 2황자 핑계를 대서라도 거절할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가 말을 막 꺼내려는 찰나, 노르디안이 덧붙였다.
“초면에, 다짜고짜 이리 불러 부탁하는 게 얼마나 무례한 행동인지 알고 있네. 2황자 전하의 치료만으로도 바쁜 사람이라는 것도 물론 알고 있네, 하지만……. 내 아내는 십 년이 넘도록 그 고통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어.”
노르디안이 눈을 들어 그녀를 직시한 순간, 아드넬은 그의 눈시울이 발갛게 물들었음을 눈치챘다.
철혈의 노장이라는,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수식어는 지금 이 순간 그에게 적용되지 않았다.
노르디안은 한 여인의 남편으로서, 또 정인으로서, 아드넬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대가는 얼마든지 지불하겠네. 그러니 제발……. 내 아내를 위해 만들어 주게, 제발 부탁하네.”
심지어 그는 아드넬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기까지 했다.
아드넬은 그런 노르디안의 모습에 놀라고 말았다.
‘그 사랑이란 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신분의 높낮이도, 자존심도 버리고 머리를 조아리게 만드는 건지.
아드넬은 그런 노르디안을 지켜보다가 결국 후 하고 숨을 내뱉었다.
“……알겠습니다. 후작님께서 이리 부탁하시니……. 연고는 만드는 대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아……! 고맙네, 정말로 고마워!”
마침내 원하는 바를 얻어 낸 노르디안은 크게 기뻐하며 팔을 뻗어 덥석 아드넬의 손을 붙잡고 위아래로 붕붕 흔들었다.
퍼진 소문에 비해 표정 변화가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잠시간 기분이 상하긴 했으나 이렇게까지 기뻐하는 모습을 보자니 아드넬도 마음이 조금 풀려 살짝 웃고 말았다.
“더 할 말이 없으시다면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내가 바쁜 사람을 너무 붙잡아 놨군, 어서 가서 일 보게.”
“예, 그럼.”
좀 피곤하긴 해도 근육통 연고는 예전에 만든 상처 연고 정도로 간단한 난이도라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아드넬은 별궁에 돌아가는 대로 작업실에 들러 빠르게 만들 생각으로 노르디안의 집무실을 나섰다.
그러나 그녀를 붙잡는 사람은 노르디안뿐만이 아니었다.
“……아드넬?”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드넬이 몸을 돌렸다.
그곳엔 밝은 밀빛 머리에 호수같이 푸른 눈동자를 가진 중년의 사내가 있었다.
‘저 사람은 분명…….’
퍽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처음 가 본 연회홀에서도 바스토르와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졸졸 따라다녔으며, 얼마 전 있었던 무투회에서도 늘 황태자 곁에 있던 사람이었다.
“……잠시 할 말이 있는데 따라오겠나.”
“제게……. 말씀이십니까?”
“그래.”
하지만 얼굴만 멀리서 몇 번 봤다 뿐이지 정확히 누구인지는 몰랐다.
아드넬은 진심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그냥 나 좀 내버려 두면 안 되나, 지끈거리는 두통에 관자놀이라도 꾹 누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거절할 수도 없어 그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문 앞에 도착한 순간, 노르디안의 집무실과 마찬가지로 붙어 있는 명패를 보고서야 아드넬은 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황실 친위대 기사단장, 호르세 로란트.’
이 사람이 기사들의 머리 꼭대기에 서 있는 사람이구나.
한편 호르세는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아드넬에게 자리를 권한 뒤 방 한쪽에 있는 테이블에서 차를 내리기 시작했다.
설마하니 기사단장이 시종을 시키지 않고 직접 차를 내릴 줄은 몰랐던지라 아드넬은 신기한 눈으로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여기, 편히 들게.”
“……감사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왜 날 부른 걸까.
그게 뭐든 빨리 끝났으면, 아드넬은 간절히 바라며 뜨거운 찻잔을 집어 들었다.
“…….”
그런데 차를 몇 모금 홀짝여 봐도 막상 들려오는 말은 없었다.
아까 노르디안처럼 곧장 본론을 꺼내는 게 되레 편한데, 호르세는 입을 꾹 다문 채였다.
그러면서도 눈동자는 연신 아드넬을 살피고 있었다.
그 불편한 침묵 속에서 마찬가지로 불편하게 앉아 있던 아드넬이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꺼냈다.
“……저, 그래서 제게 하실 말씀이란 게…….”
“…….”
순간 호르세의 몸이 흠칫 떨린 것 같았으나 그는 금세 동요를 감추었다.
내가 잘못 본 건가 하고 아드넬이 생각하던 찰나, 호르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2황자 전하의 치료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
“예……?”
“…….”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거지.
아드넬은 차마 겉으로 드러내진 못하고, 마음속으로나마 인상을 팍 구겼다.
황태자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는 사람이 갑자기 불러세우더니 2황자의 근황을 물어볼 건 뭐란 말인가.
이해는 안 가는데 높으신 분이 물어보니 대답을 피할 수도 없어, 아드넬은 마지못해 답했다.
“지금은……. 크게 차도를 보이고 계십니다. 병증도 많이 사라지셨고요.”
“……그런가.”
“…….”
그러고 호르세는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
원래 이렇게 말이 없는 사람인 건가.
가슴이 답답해 할 말이 있으면 빨리 말하라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짜증만 더해졌다.
‘그냥 확 나가 버릴까.’
할 말이 없으시면 이만 가 보겠다고 하고 나가는 거야.
그럼 뭐라 못하겠지.
아드넬이 잠시간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그때였다.
“……그건 그렇고, 이건 좀 다른 얘기네만.”
답답한 침묵 끝에 그가 마침내 본론을 꺼냈다.
호르세는 찻잔을 달각 내려놓으며 아드넬을 쳐다보았다.
“혹시, 그 눈동자 색은 양쪽 부모 중 누굴 닮은 건지 물어봐도 되겠나.”
“……예?”
그런데 호르세가 꺼낸 이야기는 아드넬이 전혀 예상치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뜬금없이 눈동자 색을 묻다니, 아드넬이 당황해 벙한 얼굴로 되묻자 호르세는 “흠흠.” 하며 낮게 헛기침을 하더니 곧 덧붙였다.
“일전에……. 그 눈동자를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있어서.”
“그……러십니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면 미안하군. 무조건 대답하라는 것은 아니었네.”
저가 물어보고도 민망한지 호르세가 몇 번 더 헛기침했다.
아드넬은 그런 그의 반응에 고개를 수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왜 갑자기 저런 걸 묻는 거지……?’
양쪽 부모 중 누굴 닮았냐니.
여태 살면서 그런 종류의 질문은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었다.
애초에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데 그런 걸 생각해 본 적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불현듯, 불안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절대, 말해선 안 돼.’
호르세 로란트, 황실 기사단장이자 황실을 오래도록 보필해 온 친위대 가문의 수장이었다.
그런 그에게 어머니를 닮았노라 말할 순 없었다.
‘엄마는 한때 귀족 영애셨다 하셨어.’
평민인 아드넬이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정확한 사정은 듣지 못했지만, 당시 엄마는 어떤 큰 누명을 쓰고 도망치듯 가문을 나왔다고 했다.
누명이라 함은 당사자에겐 억울한 일이나 남이 보기엔 죄라는 낙인이니만큼 이를 황실 기사단장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그는 일전에 제 눈동자 색을 가진 이를 본 적이 있다 했다.
그 말대로라면 엄마의 얼굴을 알지도 모른단 소리인데 이실직고할 수 있을 리가.
“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