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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51)화 (51/141)

51화

그 2황자가, 보검을 선물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모두가 놀라 웅성거리며 시선을 집중했다.

놀란 건 바스토르도 마찬가지였기에, 그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선물하고 싶은 이가……. 있다고?”

“예. 지금 이 자리에 절 서게 해 준 사람이 있습니다.”

“…….”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혹 내게 말하지 않은, 마음에 품은 여인이 있던 것인가?

바스토르가 생각하는 찰나 테시우스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가 계단을 올라 관중석에 다다르자 웅성거림은 더욱 커졌다.

테시우스는 느긋하게, 그러나 너무 느리지도 않게 한 곳으로 향했다.

그런 그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아드넬의 앞이었다.

“……아드넬.”

“전하……?”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주변의 귀족 영애들은 얼굴을 붉히며 연신 저들끼리 수군거렸고, 제이든은 물론 필립과 아드넬까지 이보다 더 놀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하지만 테시우스는 태연한 얼굴로, 그러나 진심을 담은 눈으로 아드넬을 응시하며 말했다.

“네 덕분에 나의 오랜 병증이 비로소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고, 그 덕에 이 자리에도 떳떳하게 설 수 있었다. 그에 대한 감사함을 표현할 방법이라곤 이런 것뿐이더군.”

테시우스는 화려한 보검을 아드넬에게 내밀며 덧붙였다.

“그대의 공로에 비하면 하잘것없지만, 그래도 내가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전하고 싶었다. 그러니 부디, 받아 줬으면 해.”

“하, 하지만……. 제겐 너무 과분한 물건입니다, 전하.”

“글쎄……. 네가 한 일에 비하면 이 정도는 과히 대단치도 않아.”

그리 말하며 테시우스는 아드넬을 향해 싱긋 미소 지어 보였다.

이 순간 내 심장이 얼마나 시끄럽게 뛰고 있는지 그는 알까.

그러나 2황자가 처음으로 주는 승리의 증표를 거절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결국 아드넬은 그가 내민 보검을 받아 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테시우스도 만족한다는 듯 눈을 살짝 내리깔며 몸을 돌렸다.

“그럼, 별궁에서 보지.”

“예, 예에…….”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응시하는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그러나 옆에 앉은 제이든의 주먹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 * *

무투회는 성황리에 끝났지만 그 여파는 오래도록 남았다.

2황자의 놀라운 실력은 무투회가 끝나면 으레 안줏거리가 되던 이야기였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그가 직접 무투회에 참여한 이래 처음으로 승리의 증표를 누군가의 손에 쥐여 줬기 때문이었다.

자연히 보검을 받은 예쁘장한 청년에 대한 이야기도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글쎄 2황자 전하께서 앓으시던 병을 그 청년이 감쪽같이 낫게 해 줬대.”

“뭔진 몰라도 지금까지 아무도 치료하지 못한 병이라더구만.”

“그걸 고쳐 줬으니, 2황자 전하께서도 오죽 고마우셨으면 그 귀한 걸 덥석 주셨겠어?”

사람들 사이에서 퍼져 나가는 이야기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테시우스가 계획했던 대로, 실제로 그를 대기실에서 봤던 탈락자들의 증언 또한 새바람을 몰고 왔다.

“왜, 그 카리아 상회에서 풀었던 연고 말이야. 한정 수량만 팔았던 그 연고.”

“대기실에서 보니까 2황자 전하께서도 그 연고를 쓰시더라고! 분명 내가 쓸 때 맡았던 그 냄새였어.”

“어쩌다 2황자 전하께서 쓰시는 연고를 카리아 상회에서 팔게 된 거지?”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지, 효과가 좋다는 얘기를 듣고 우리처럼 사 가셨을지도 몰라.”

“하기야 높은 분들은 아랫사람 시켜 가져오라 명하기만 하면 되니…….”

“어쨌든 그 2황자 전하도 쓰실 정도면 진짜 효과가 있다는 소리잖아.”

“그건 우리가 보증해! 전날에 바르고 자면 뻐근하고 쑤시던 게 훨씬 개운해진다고!”

덕분에 무투회가 끝났는데도 근육통 연고에 대한 이야기는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언제 다시 판매를 재개하냐는 문의가 빗발쳤고, 클리프는 그때마다 ‘정식 판매를 준비 중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는 대답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모든 소동의 주인공인 아드넬은, 침실에 틀어박혔다.

‘도저히 못 보겠어…….’

아드넬은 테시우스가 준 보검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무슨 의미로 이 검을 줬는지는 직접 말해 줬으니 알고 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날을 떠올리면 저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날 보았던 2황자의 강인한 모습만으로도 심장이 쿵쾅거렸는데 눈앞까지 찾아와 보검을 줬을 때는 정말이지, 그때의 느낌은 가슴이 간질거린다는 말로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었다.

‘물론 멋있는 사람이니까. 잘생겼고, 내 취향이기도 하지만……. 다른 의미로 준 게 아닌데, 왜 자꾸 이러는 거지.’

정체를 숨기고, 성별을 바꾸고, 여태 2황자에게 보여 준 모습은 전부 거짓된 것밖에 없었다.

그런 저를 좋아할 리도 없고 또 그렇게 높은 사람과 이어질 가능성도 없건만, 저를 찾아와 보검을 안겨 준 테시우스의 얼굴만 생각하면 볼이 화끈거렸다.

이래서는 도저히 그를 마주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아드넬은 침실에 틀어박혔다.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나아지겠지 하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 가지 않았다.

아드넬에게 도착한 서신 때문이었다.

“……어?”

어차피 급한 일도 모두 해치웠고 하니 탄신연이 시작되기 전까진 얌전히 방 안에 있을 생각이었는데, 식사를 가져다주러 온 모나가 아드넬에게 도착한 서신을 건네주었다.

그녀가 나가고 수신인을 확인해 보니 처음 보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노르디안 벨리페……?’

그게 누구지?

아드넬은 눈알을 굴리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과 이름들을 대조해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럼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일까?

모르는 사람이 서신을 보낼 이유가 뭐가 있지?

아드넬은 궁금증을 담아 봉인된 편지를 뜯었다.

그리고 편지를 읽어 내려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드넬의 바닷빛 눈동자가 동그랗게 벌어졌다.

‘나한테 부탁할 게 있다고?’

편지를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노르디안 벨리페 후작으로, 황실 견습 기사들의 훈련 교관으로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부탁할 일이 있다며, 본성 별관에 찾아와 줄 것을 간곡히 청한다는 문장으로 편지의 끝을 맺었다.

편지를 다 읽고 난 후 아드넬은 알쏭달쏭한 기분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 사람이 나한테 부탁할 일이 뭐가 있지?’

견습 기사들의 훈련 교관이자 황실 2기사단의 기사단장으로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아드넬은 화장품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부탁할 일이 있다니, 설마하니 화장품을 따로 만들어 달라 하는 건 아닐 테고.

아무리 생각해도 아드넬의 머리로는 그의 저의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한테 선택지는 없지. 뭐, 언제는 있었냐 만은…….’

다짜고짜 별궁에 끌려왔을 때도 그렇고, 공녀들의 부탁을 받았을 때도 그렇고, 이런 일이 있을 때만큼은 신분의 차이가 못내 억울했다.

혼자서 조용히 있고 싶어도 주변에서 그렇게 두질 않는다.

아드넬은 한숨을 폭 쉬며 조만간 찾아가겠다는 답신을 보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아드넬은 처음으로 본성 별관으로 향하게 되었다.

황실 기사단이 훈련하는 연무장은 동쪽 별관에 있었다.

기사들이 한창 훈련 중인지 가까워질수록 기합 하는 소리도 점점 커졌다.

‘그러고 보니 궁금하긴 하네. 여기 연무장은 어떠려나?’

지금까지 연무장이라곤 2황자의 개인 연무장만 봐서, 기합 소리가 커질수록 궁금증도 커졌다.

아드넬은 의문을 품고 걸음을 빨리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벌어진 입술 사이로 놀라 감탄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

본성 별관 연무장은 아드넬이 상상한 것 이상으로 크고, 넓었다.

대충 눈으로 보이는 크기만 가늠해도 별궁 후원을 훌쩍 넘길 만큼 넓었는데, 기사단이 머무르는 별관 건물도 3층에 달했으며 연무장의 끝과 끝 길이만큼 컸다.

연무장 한쪽은 검술을 훈련하는 연습용 허수아비가 열을 맞춰 있었고, 또 한쪽은 대련을 목적으로 분리해 둔 구역이 있었다.

훈련할 때 사용하는 목검과 묵직한 철퇴, 석궁, 대검 등 무기도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잡초 하나 자라지 않은 연무장에서 기사들이 칼을 맞댈 때마다 쨍한 마찰음과 함께 흙먼지가 일었다.

과녁 정중앙에 화살이 맞는 것도 신기하고, 훈련 중이어선지 묵직한 쇠갑옷을 입고도 자유로이 움직이는 몸놀림도 신기했다.

‘역시 기사는 기사구나.’

그동안 여행하면서 나름 산전수전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따금 나타나던 도적 떼가 보여 준 실력은 저들 발끝에도 못 미칠 것 같았다.

아드넬이 멍하니 연무장을 응시하던 그때, 입구 앞에 서 있던 근위병이 그녀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누구십니까? 신분과 소속을 밝혀 주십시오.”

“……아! 저는 그, 별궁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아드넬이라고 합니다.”

“혹시……. 2황자 전하의 병을 치료하신다는 분이십니까?”

내 이름이 그렇게까지 소문이 났나?

아드넬은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무슨 이유로 방문하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노르디안 벨리페 후작님을 뵈러 왔습니다.”

“……그럼 혹시 약속은 잡고 오셨는지요?”

황실 2기사단장이 설마하니 먼저 불렀을 거라고는 상상이 안 되는지 근위병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하기야 나도 처음엔 왜 불렀나 싶었으니까.

아드넬은 바지춤에 넣어둔, 노르디안이 보낸 서신을 꺼내 보였다.

“예. 후작님께서 제게 별관에 찾아와 달라 말씀하시어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실례했습니다. 2기사단장님께선 지금 별관에 계십니다.”

“감사합니다.”

아드넬은 그의 반응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연무장 안쪽으로 성큼 들어섰다.

갑작스런 등장에 잠시간 이목이 쏠리긴 했지만 당장이 급했으므로 빠르게 별관으로 들어가 집무실부터 찾았다.

신기하게도 방의 목적이 적혀 있지 않은 별궁이나 본성과 달리, 기사들이 머무르는 별관엔 방마다 명패가 걸려 있어 누군가에게 묻지 않아도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노르디안의 집무실은 별관 서쪽 1층에 있었다.

“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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