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절대 보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던 것과 달리, 바스토르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드넬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고 말았다.
그 모습에 제이든이 조금 놀랐지만 아드넬은 경기장을 살피며 테시우스를 찾기 바빴다.
그리고 내려간 철창이 올라가며 마침내, 테시우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에, 저게 뭐야?”
“2황자 전하께서 어쩐 일로…….”
놀라기로는 바스토르도, 황후 알라니아도 마찬가지였다.
테시우스는 매 무투회마다 항상 전신을 꽁꽁 감싸는 옷을 입었다.
그 때문에 여름의 무더위가 빠르게 찾아올 때면 보는 것만으로도 답답하다며 불평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테시우스는 몸에 딱 붙는 갈색 바지에 검집이 달린 벨트 하나만 찬 채, 상의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의 몸엔 오래된 흉터가 여럿 남아 있었다.
검상으로 생긴 것도 있었지만 꽤 크게 번지듯이 난 흉터도 있었다.
그러나 이전에 병증이 심했을 때처럼 끔찍하고 흉측한 느낌은 더 이상 없었다.
상처엔 새살이 돋았고 흉터가 지워져 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 변화는 다른 누구보다도 아드넬이 가장 크게 느꼈다.
‘전에 상처 연고만 발랐을 때와는 확연히 달라.’
울긋불긋하고 두드러기나 발진처럼 나는 아토피 증세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한 변화를 발견한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2황자 전하께서 저리 몸이 좋으셨나……?”
“들은 것과 다르게 병증도 그리 심하지 않으신데?”
“원래도 잘생기셨지만 오늘은 유독…….”
아드넬이 예상했던 것처럼, 무투회에 참석한 귀족 영애들에게도 변화가 찾아왔다.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저들끼리 작게 수군거리는 것이다.
그만큼, 달랐다.
상의를 벗은 채 떳떳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선 그는 당당했고 또한 남자다웠다.
몸에 남은 흉터마저 그의 강인하고 남성적인 매력을 돋보이게 했다.
그래서일까.
아드넬은 저도 모르게 마치 홀린 듯, 그를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정말, 다르네.’
잘생긴 것도 알고 있었고, 몸이 좋은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낸 그는 그동안 아드넬이 봐 온 모습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멋있었다.
그 순간, 테시우스는 경기장에 들어서자마자 고개를 들어 아드넬이 앉은 자리를 정확하게 쳐다보았다.
일순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이에 아드넬이 흠칫하고 놀랐으나 테시우스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덕분에 주변에 있는 귀족 영애들만 난리가 났다.
저마다 날 쳐다보시는 것 같다며 부채로 입을 가리고 새침하게 눈을 흘기면서도 힐끔힐끔 그를 살폈다.
그러나 아드넬은 그가 자신을 보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저를 정확하게 직시하는 눈동자가, 저 멀리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명하게 보였다.
그 감상이 깨진 건 바스토르의 부름에 테시우스가 임시 단상으로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모쪼록 훌륭한 대결을 보여 주길 바라네.”
“물론입니다, 황태자 전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카르손과 테시우스가 그를 향해 머리를 숙여 보이자 곧 빠르게 자리가 마련되었다.
임시 단상은 치워졌고 바스토르는 본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와중에 알라니아는 어딘가 굉장히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테시우스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내 경기장엔 카르손과 테시우스,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대결, 시작!”
뿌우 하는 나팔 소리가 울리기가 무섭게 경기장엔 적막이 내려앉았다.
바람에 흙먼지가 날리고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가볍게 묵례한 뒤 각자 자신의 검을 꺼내 들었다.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전하.”
“얼마든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카르손은 검을 쥔 채 훅 하고 거리를 좁혀 들어왔다.
테시우스는 그런 그의 움직임을 눈으로 읽으며 정확하게 비집고 들어온 공격을 피하기가 무섭게 검을 맞부딪혀 흘려냈다.
아드넬이 보았던 허수아비를 내려치던 그때와는 전혀 다른 움직임이었다.
테시우스는 물과 같이 자연스럽게, 또 가볍게 움직였다.
전신의 근육을 완벽히 제어해야지만 가능한 몸놀림이었다.
카르손은 자신의 공격이 실패하자 곧장 몸을 틀어 다시 한번 날카롭게 검을 휘둘렀다.
정확하게 목을 노리는 공격에 일순 “헉!” 하는 놀란 탄성이 관중석 곳곳에서 터져 나왔으나 테시우스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이 또한 가볍게 피했다.
이후의 대결도 비슷한 흐름으로 이어졌다.
카르손은 공격했고, 테시우스는 이를 피하거나 흘려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호시탐탐 빈틈을 노리고 있었다.
마침내 카르손이 자신을 승자의 자리에 앉게 만들어 준 일격을 선보였다.
오른손에 들고 있던 검을 왼손으로 빠르게 바꿔 들며 사선으로 휘둘렀는데, 그와 동시에 몸을 반대로 틀면서 발을 높게 들었다.
하나의 동작처럼 이어지는 두 개의 공격.
지금까지 그와 대결한 참가자들은 검을 바꿔 드는 것에 일차적으로 당황했고, 사선으로 내리긋는 일격을 피하느라 몸을 뒤로 빼는 순간 관자놀이를 정확하게 노리는 발차기에 속절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그동안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테시우스는 그런 그의 공격을 본 적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2황자 전하도 분명 당할 거야!’
경기 내내 거의 고개만 숙이고 있던 아드넬이지만 카르손의 저 일격은 보았다.
제이든이 말하길 저 사람이 가장 유력한 승자 후보라며 피를 보지 않고 상대를 쓰러트린다기에 처음으로 지켜보았는데, 빠르기도 빠르거니와 그 몸놀림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누구든 처음 보면 이렇다 할 대응도 못 한 채 당할 것 같았다.
그리고 테시우스 또한 역시나, 사선으로 그어지는 검선을 피하며 몸을 뒤로 뺐다.
“안 돼……!”
아드넬이 저도 모르게 소리치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테시우스의 무릎이 꺾이며 그의 몸이 완전히 뒤로 젖혀졌다.
눈으로 좇아가기도 부족한 짧은 찰나, 카르손의 공격을 감지하고 무릎을 굽혀 급소를 노리는 일격을 피한 것이다.
갈 곳은 잃은 카르손이 다리가 훙 소리를 내며 내려오고, 그가 휘두른 검은 반대로 돌린 몸과 함께 뒤쪽을 향하고 있었다.
‘지금이다.’
테시우스는 굽힌 무릎을 피고 일어남과 동시에 오른쪽 다리를 길게 뻗었다.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간 앞발이 그의 아래턱을 강하게 후려쳤다.
“크악!”
정확하게 급소를 맞은 카르손의 몸이 휘청거리며 끝내 털썩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날카롭게 빛나는 검 끝이 그의 목을 노렸다.
잠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숨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한 침묵, 그러나 곧 관중석에서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2황자 전하 만세-!”
“제국을 수호하는 검이시다!”
“이번에도 2황자 전하께서 승리하셨어!”
승패가 갈렸음을 알리는 나팔 소리조차 사람들의 환호에 묻혔다.
바스토르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활짝 웃으며 연신 손뼉을 쳤다.
그리고 아드넬은, 멍한 얼굴로 테시우스의 넓은 등을 응시했다.
‘그 일격을……. 피했어.’
제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예측할 수조차 없던 공격이었는데도, 그는 피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짧은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반격해 쓰러트렸다.
천부적인 재능과 감, 그리고 그걸 발현할 끝없는 노력이 없으면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더욱 놀라웠다.
언제나 말로만 들어왔던 테시우스의 무예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순간이었다.
그래서일까.
‘가슴이…….’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평소엔 보기도 어려운 짜릿하고 아찔한 광경에 뛰는 것인지, 혹은 처음 보는 그의 낯선 모습에 놀라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심장이 당장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요동친다는 것.
아드넬은 꽉 움켜쥔 주먹을 가슴께로 올리며 가늘게 숨을 내뱉었다.
‘……아드넬…….’
한편 옆에서 그런 그녀를 줄곧 지켜보던 제이든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지금껏 제대로 경기를 보지도 못할 만큼 무서워하던 아드넬이,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볼 만큼.
혹여나 다칠까 저도 모르게 소리칠 만큼 어느새, 그 2황자가 그녀에게 있어 어떤 의미를 가진 사람이 된 것일까?
혹은 저가 모르는 둘 사이의 어떤 접점이 있던 것일까?
제이든의 갈색빛 눈동자가 이보다 더 심란할 수 없을 만큼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런 와중에 바스토르는 활짝 웃는 낯으로 자리에서 내려와 아까와 마찬가지로 대결이 끝나자마자 빠르게 준비된 임시 단상에 섰다.
다만 카르손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그를 향해 테시우스가 손을 내밀었다.
“좋은 공격이었다. 순간 나도 당할 뻔했어.”
“……저은하…….”
“과연 무투회의 우승자답군. 한 수 배웠네.”
아래턱을 제대로 맞아서인지 발음조차도 부정확했지만, 카르손은 강한 타격에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면서도 감동으로 눈시울을 붉혔다.
지금껏 2황자를 이긴 자가 아무도 없다기에 그에게 큰 상처를 입히면 해를 당할까 일부러 져줬을 거라고 생각한 감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막상 검을 맞대고 보니 전혀 아니었다.
그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 재능을 백분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몸을 단련한 사람이었다.
2황자의 승리에는 그가 지금껏 갈고 닦아 온 모든 노력이 담겨 있었다.
카르손은 감복한 얼굴로 테시우스의 손을 맞잡고 일어섰다.
조금 비틀거리는 그를 부축해 테시우스가 단상 앞에 서자, 바스토르는 기쁨으로 만개한 미소를 띤 채 호탕한 목소리로 외쳤다.
“과연 기대한 것보다 훌륭한 대결이었네. 테시우스 폰 아이테라, 그대에게 진정한 승리를 뜻하는 이 보검을 내리는 바이다!”
시종장이 들고 온 보검은 실제 무술에선 사용할 수조차 없는 작은 장식용 검이었지만 온갖 보석들이 박혀 있는,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보검이었다.
과거엔 우승자가 마음에 드는 레이디에게 선물하는 용도였는데, 테시우스가 무투회에 참가하고서부턴 늘 그가 받고 그가 다시 돌려주어 지금껏 주인을 찾지 못한 보검이기도 했다.
한편 테시우스는 그 보검을 물끄러미 바라보는가 싶더니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 든 채,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 무투회가 끝나기 전 이 보검을 선물하고픈 이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