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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49)화 (49/141)

49화

한편 그 시각, 참가자들이 모여 있는 대기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웅성웅성한 소음에도 불구하고 참가자들은 한 곳을 힐끔거리기 바빴다.

다름 아닌 2황자, 테시우스였다.

온갖 무기류가 모여 있는 곳 앞에 마련된 간이 의자에 앉은 그는 팔짱을 낀 채 멀뚱히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마음을 가다듬어도 모자랄 판에, 참가자 중 몇몇은 처음 보는 2황자의 모습에 연신 그를 살폈다.

테시우스도 그런 저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에겐 나름의 계획이 있었다.

‘아드넬에게 도움이 될지도 몰라.’

며칠 전 별궁 후원에서, 아드넬은 그에게 연고 하나를 주고 갔다.

다름 아닌 근육통 연고로, 근육통은 물론이고 상처가 있는 부위에 발라도 좋을 것이라고.

그가 만든 것이야 늘 효과가 있었으니 테시우스는 아무런 의심 없이 발랐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늘 몸을 뻐근하게 만들던 근육통이 많이 사라진 것으로도 모자라 가려움증이 확연히 사라졌다.

짐작하기로는 발랐을 때 느껴지는 화한 느낌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 그런 걸 떠나서라도 예전에 차갑게 보관하는 스킨을 발랐을 때보다도 훨씬 효과가 좋았다.

‘상처도 전에 비해 많이 아물었어.’

아드넬이 오기 전엔 끝내 참지 못하고 긁는 일이 많았다.

그럴수록 상처는 덧나고, 흉터도 짙게 남았다.

하지만 아드넬이 온 후론 긁는 일도 사라지고, 또 상처 연고를 꾸준히 바르다 보니 전에 비해 훨씬 많이 아물었다.

딱지가 앉은 자리엔 새살이 돋았고 흉터는 차츰 사라져 갔다.

그래서 테시우스는 지금껏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결심을 하게 되었다.

다름 아닌 전신을 옷으로 꽁꽁 싸매지 않은, 상의를 탈의한 맨몸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동안은 늘 감추고 외면했지.’

라크란 병은 전염성은 없으나 극심한 가려움증에 피딱지가 앉을 정도로 긁게 되고, 그로 인해 남은 흉터가 흉측하다는 점 때문에 귀족들이 특히 기피하는 병이기도 했다.

옮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테시우스가 그걸 구태여 바로잡지 않은 이유는 낮은 자존감 때문이었다.

저가 보기에도 가려움증을 참지 못해 마구잡이로 긁어대는 모습은 부끄럽고, 또 창피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늘 발갛게 달아올라 있던 상처들은 이미 다 아문 흉터처럼 약간의 선홍빛만 띨 뿐이었고, 전에 비해 확연히 없어졌다.

더는 그 스스로를 감추고 싶지 않았다.

병에 차도를 보이고 있고, 더는 자신을 두고 수군거리게끔 두고 싶지 않았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러한 변화를 오늘 참석한 아드넬에게 확실히 보여 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아드넬에게 도움이 될 거야.’

테시우스가 아드넬에게 연고를 받았다는 걸 모르는 펠릭스가 수도에 ‘근육통 연고’라는 아주 신박한 치료제가 나왔다며 전하께서도 쓰시면 어떻겠냐 말을 올렸기 때문이었다.

매일같이 훈련하는 사람이니만큼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한 말일 게 분명했다.

다만 그 말을 듣고 좀 더 자세히 알아보니, 아드넬이 줄곧 거래하는 카리아 상회에서 푼 한정 물품이라고 했다.

여신 마르타의 상징을 새겨 유통했다는데 여기까지 듣고 나자 뭔가 아드넬에게 다른 계획이 있는 거란 생각이 번뜩 하고 들었다.

‘살롱을 위해서 하려는 걸 수도 있겠어.’

살롱에 투자하겠다 말했던 건 사실상 핑계에 불과하고, 아드넬이 훗날 별궁을 나가도 연을 이어 가고 싶다는 마음에 한 말이었지만.

시종과 작위라는 제안까지 거절할 정도로 아드넬은 그 사업에 진심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라도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테시우스는 보란 듯이 바지춤에서 연고를 꺼냈다.

“어, 저건…….”

그가 뚜껑을 열자 박하 같기도, 민트 같기도 한 알싸한 향이 대기실 안에 퍼졌다.

대기실에 모여 있는 참가자들 중 절반은 그 향을 일찍이 맡아 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직접 산 사람도 있었고, 함께 참가했지만 떨어진 친구가 효과가 좋다고 줘서 써 본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그 근육통 연고를, 무려 2황자도 쓰다니?

대기실에 모인 사람들인 익숙하면서도 낯선 향에 코를 킁킁거리며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그 시선을 다분히 느끼며 테시우스는 태연하게 어깨는 물론이고 팔뚝과 무릎 등 곳곳에 펴 발랐다.

그리고 자연히, 참가자들 사이에서 작은 속닥거림이 나오기 시작했다.

“저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연고, 맞지?”

“연고 통은 잘 안 보이는데 맞는 것 같아.”

“허, 설마하니 그 2황자 전하께서 우리들이나 쓸 줄 알았던 근육통 연고를 쓰실 줄은.”

“그런데 그보다 말야……. 원래 몸에 저리 흉터가 많으셨던가?”

“그동안은 늘 옷을 입고 계셨잖아. 여름에 덥지도 않으신가 했는데, 저런 흉터가 있는 줄은 아무도 몰랐지.”

“그럼 이번엔 왜 상의를 안 입으신 거지?”

“높으신 분들 생각을 우리가 알 수야 있나, 그보다도 2황자 전하께서도 쓰시는 연고라면 나중에 기사들이 독점할 것 같은데. 미리 구해 놔야 하지 않을까?”

“안 그래도 무투회가 끝나면 카리아 상회에 문의해 볼 생각이었어. 내가 운영하는 훈련소에 가져다 놓으면 좋을 것 같더라고.”

원체 작게 속닥거려 그 구체적인 내용까지 테시우스가 전부 다 들을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반응은 꽤 긍정적인 편이었다.

‘예전엔 극비에 부쳤지만.’

테시우스가 병을 앓고 있고, 그 때문에 성정이 포악해졌다는 건 익히 난 소문이었으나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병을 앓는지에 대해선 밝히지 않았다.

황실의 위엄이 추락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수도의 귀족들은 알고 있지만 딱히 떠들어댈 이유도 없거니와 황후의 엄명이 있었기에 평민들은 테시우스가 라크란 병을 앓는다는 건 몰랐다.

하지만 이렇게 큰 차도를 보인 이상, 더는 숨길 이유가 없었다.

실은 아드넬에게 보여 주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지만 어쨌든.

‘네가 좋아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 순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떠오른 생각에 테시우스가 흠칫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테시우스는 작게 고개를 저으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건 절대 다른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야.

아드넬은 나에게 있어 소중한 아렌과 비슷한 사람이니까.

이만큼이나 날 치료해 주고, 또 아렌처럼 아무렇지 않게 날 대해 줬으니까.

그 고마움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또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물론 귀엽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르게 생각하는 건 아냐.’

저가 참가했다간 예선에도 못 올라가고 서류 심사에서 탈락할 거라 했던 아드넬의 엉뚱한 말은 퍽 귀여웠다.

잔뜩 당황했던 얼굴도 그랬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어린 동생을 보는 듯한 마음에서 비롯된 귀여움일 터였다.

예전에 저더러 귀엽다며 웃던 아렌을 봤을 때도 저보단 그가 훨씬 귀엽다고 생각했으니까.

‘아무튼 이렇게만 지내면 되는 거야. 사과도 했으니까, 전에 아렌과 그랬던 것처럼 친구로 지내다 보면 아드넬을 볼 때 드는 이상한 소유욕도 사라질 테지.’

테시우스는 문득 고개를 들어 큰 환호성이 새어 들어오는 닫힌 문을 응시했다.

그가 등장할 때가 머지않았다.

* * *

‘난 진짜 못 보겠다…….’

아드넬은 제이든이 준 손수건에 거의 얼굴을 묻듯 고개를 푹 숙인 채,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소리만 들어도 잔인하기 그지없건만 그 피 튀기는 광경이 뭐 그리 재밌다고 환호하는지 그녀로서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8강의 대진표대로 진행되며 승패가 갈라질수록, 마음 한편에 드는 불안함과 초조함은 더욱 심해졌다.

‘상대가 2황자이니만큼 큰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지만…….’

최종 우승자는 무려 세 번에 걸친 싸움 끝에 테시우스와 대결하게 된다.

하지만 그만큼 체력 소모가 크기 때문에 한 번의 대결마다 15분이라는 시간제한이 있고, 눈에 보기에 확연한 승패가 나지 않으면 심판이 판단해 승패를 가른다.

여기에 중간중간 쉬는 시간도 있어 체력을 비축할 수 있게끔 배려해 주지만, 2황자와의 대결은 조금 다르다.

애당초 시간제한도 없을뿐더러 승패가 확실히 갈리지 않으면 어느 한쪽이 패배를 인정해야지만 끝이 나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이 싸우는 것도 보기 힘든데 아는 사람이 다치기라도 하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제이든은 그런 아드넬을 안쓰럽다는 듯 연신 살피고 있었으며, 필립은 눈치껏 소리 없이 환호하며 무투회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마침내, 최종 우승자가 나오게 되었다.

“이번 무투회의 최종 우승자는 다르굴에서 온 카르손! 그대는 앞으로 나와 황태자 전하께 예를 갖추라!”

“……제국의 하늘을 수호하는 고귀한 검이자 방패이시며, 제국의 땅을 비추는 지고한 별이신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카르손이라고 합니다.”

우승을 치하하기 위해 바스토르가 직접 빠르게 마련된 경기장 임시 단상에 내려왔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카르손이 예를 갖추자 시종장이 묵직한 우승 상금을 들고 왔다.

“제국에 이리 뛰어난 인재가 있음에 기쁘기 그지없군. 앞으로도 계속 정진하여 제국의 뛰어난 무술을 널리 알리길 바라네.”

“송구합니다, 전하!”

“또한 승자에게 새로운 이름을 내리는바, 앞으로 그대의 이름은 ‘카르손 바르티안’이네.”

무투회의 최종 우승자에겐 엄청난 상금 외에도, 작위가 세습되진 않지만 기사 서임을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인 준남작 위가 주어졌다.

카르손은 감복한 얼굴로 ‘바르티안’이라는 자신의 성을 작게 되뇌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경기장의 모든 이들이 기대하는 이벤트가 이어졌다.

바스토르가 사뭇 어두워진 얼굴로 말했다.

“……마지막으로 카르손 바르티안. 그대에게 엔하시아 제국의 2황자, 테시우스 폰 아이테라와의 영광스러운 대결의 기회를 선사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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