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무투회의 진짜 시작은 대망의 셋째 날, 느지막한 오후였다.
그래서인지 수도는 물론이고 별궁까지 온통 무투회 얘기로 떠들썩했다.
그중에서도 필립이 유독 신났는데, 그는 갈 채비를 하면서도 연신 조잘조잘 떠들었다.
“그 2황자 전하와의 대결이라니! 게다가 귀빈석이라니! 아드넬, 내가 직접 공녀님께 인사드려도 되겠지? 무례가 아니겠지?”
“묵례만으로도 충분해. 그러니까 너무 흥분하지 말고.”
디아나가 보내 준 티켓의 자리는 상석, 그것도 꽤 좋은 자리였다.
여름의 큰 행사이니만큼 무투회 티켓은 풀리는 순간 매진이 되는데 그 탓에 지금껏 한 번도 무투회를 보지 못한 필립은 잔뜩 흥분한 채였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왜 참가하지 않는 거야? 실력도 좋으면서.”
한편 옷매무새를 다듬던 아드넬이 제이든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생각해보니 실력도 뛰어나고 또 좋아하는 두 사람이 왜 정작 무투회엔 참가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든 것이다.
하지만 제이든과 필립은 너 나 할 것 없이 동시에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답했다.
“그야, 우리는 아드넬의 호위 기사니까.”
“정확히는 가짜 기사지만! 그래도 본업이 따로 있는데 그런 걸 하면 어떻게 아드넬을 지켜 줘.”
“그리고 다쳐서 오면 계속 마음 쓰고 걱정할 거잖아. 그럴 바엔 아예 안 하는 게 나아.”
당연하다는 듯이 나온 대답에 아드넬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두 사람이 지금껏 한 번도 다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여행길에 도적 떼도 몇 번 만났고, 필립이 크게 다쳤을 때는 눈도 붙이지 못하고 간호했던 적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 때문에 좋아하는 걸 포기할 줄은 몰랐던 터라 아드넬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게다가 지금은 별궁에서 지내는데 위험한 일이 뭐가 있으려고…….”
“그래도 엄밀히 따지자면 우리는 지금 아드넬의 ‘조수’로서 와 있는 거니까. 물론 외모만 보면 아무도 안 믿지만, 괜한 소리가 나오는 것보단 나아.”
“그리고 나는 구경만 해도 좋은걸! 무려 귀빈석! 역시 아드넬이 최고야, 능력자!”
구경만 해도 좋다는 말이 과언이 아닌지 필립은 잔뜩 신난 얼굴로 성난 황소처럼 콧김을 씩씩 뿜어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아드넬은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무투회가 시작되는 경기장은 수도 중심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전생의 콜로세움과 모양새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커다란 원형 경기장 벽면엔 아치 형태의 창문이 곳곳에 나 있었고, 하늘이 뻥 뚫려 있어 주변에 모인 인파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시끌벅적한 소음이 새어 나왔다.
여기에 금색 문양이 찍힌 티켓은 귀빈석을 의미하는 것으로 안내자도 따로 있어 아드넬과 필립, 제이든은 경기장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들어갈 수 있었다.
이윽고 북적북적한 인파를 헤치고 내부에 들어선 순간, 세 사람은 모두 입을 모아 탄성을 내뱉었다.
“세상에……!”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장관이었다.
오늘을 응원하듯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했으나 관중석은 사람으로 가득 차 개미 떼처럼 보일 지경이었고, 내부는 밖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크고, 넓었다.
모두가 치열한 대결을 기대하며 이길 것 같은 참가자에게 돈을 걸기도 했다.
여기에 황족들이 앉는 가장 상석은 원형 경기장 관중석의 중간을 통째로 비워 만든 곳이었는데, 엄청난 크기의 천막을 쳐 햇빛을 가리고 금으로 만들어진 권좌를 가져다 두었다.
아직은 비워져 있지만 아마도 저 자리에 황태자 바스토르가, 그 아래엔 황후가 앉을 터였다.
그보다 좀 더 밑에 있는 자리엔 이미 도착한 두 공녀와 그녀들의 아버지가 앉아 있었는데, 아드넬을 인도한 안내자가 도착한 곳은 수도의 귀족들이 모여 앉은 귀빈석이었다.
“……아드넬 님!”
그때 다가오는 아드넬을 발견한 디아나가 반색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옆에 앉은 체르트 공작이 낮게 “흠흠.” 하며 헛기침을 하자 금세 도로 앉긴 했지만, 싱긋 웃는 얼굴 위로 떠오른 반가움은 여전했다.
“이리 귀한 자리까지 직접 마련해 주시다니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초대를 받아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걸요. 그럼 편히 앉아 감상하도록 해요.”
“예, 공녀님.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드넬은 허리를 숙여 보이며 격식에 맞는 예의를 차렸다.
그 모습이 퍽 거슬리진 않았는지 체르트 공작은 금세 고개를 돌렸고, 그제야 세 사람 모두 자리에 착석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화장 잘 먹었네, 배운 대로 했구나!’
잠깐이지만 빠르게 살펴본 디아나는 일전에 아드넬이 해 준 화장법을 그대로 하고 온 채였다.
원래도 하얀 피부긴 했지만 메이크업 베이스에 비비크림까지 바르고 나니 피부톤이 한결 더 자연스러웠고, 얼굴의 유분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입술도 안쪽은 연하게, 바깥으로 갈수록 진하게 발라 사랑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겼고 일자로 그린 눈썹은 보다 유순한 인상을 주었다.
실제로 그녀를 보고 귀족 영애들은 물론, 따라온 시녀들까지 작게 소곤거리며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하르트 공작 영애는…….’
새 화장품을 선보이던 당시, 율리시아는 직접 화장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아드넬이 만들어 준 걸 사용하긴 했다.
피부톤도 균일하고 마찬가지로 유분기 없이 보송했다.
다만 눈썹은 끝이 약간 치켜 올라가게 그렸는데, 인상이 원체 차갑고 또 무표정한 사람이다 보니 오히려 일자 눈썹보다 더 잘 어울렸다.
‘아무튼 성공적이야. 반응도 나쁘지 않고!’
평민들에게 선보이는 새로운 브랜드, 마르타.
그리고 그 브랜드의 대표 모델인 두 공녀!
아직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상상만으로도 완벽했다.
아드넬은 흐뭇하게 웃으며 경기의 시작을 기다렸다.
그리고 머지않아, 뿌우 하는 나팔 소리가 들리더니 모두 약속이라도 한듯 조용해졌다.
침묵을 깬 건 연회홀에서 몇 번 들어본 시종장의 목소리였다.
“알라니아 폰 아이테라 황후 폐하, 바스토르 폰 아이테라 황태자 전하께서 드십니다!”
관중석에 앉은 모든 이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이내 바스토르가 권좌에 앉고, 고개를 들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아드넬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들었다.
‘……저 사람이 황후구나.’
지금껏 이야기만 들었지, 황후의 얼굴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황태자가 누굴 닮았나 했는데 황후의 태양같이 빛나는 금발과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신비로운 보랏빛 눈동자는 바스토르의 것과 똑같았다.
그의 미색 또한 알라니아 황후에게서 물려받은 게 틀림없었다.
다만 둘 사이의 다른 점을 꼽으라면 황태자는 햇살처럼 따듯한 느낌이라는 것이고, 황후는 얼음처럼 서늘한 느낌이라는 것이었다.
‘저런 사람이니 후계자 수업까지 포기했겠지.’
테시우스가 일찍이 후계자 수업을 포기했음에도 견제의 시선을 거두지 않고, 지금껏 납품한 화장품 하나도 별궁에 보내지 않은 치졸한 사람.
아드넬의 머릿속 황후는 딱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아드넬은 바스토르가 무투회의 시작을 알리는 연설도 듣는 둥 마는 둥 한 귀로 흘리며 당장 테시우스는 어디에 있나 생각하기 바빴다.
“……그런고로, 본 무투회의 시작을 알리는 바이다!”
다시 한번 뿌우 하는 나팔 소리가 들리며, 모든 사람들이 와아아 환호성을 질렀다.
이윽고 북소리와 함께 닫혀 있던 경기장의 철창이 올라가자 8강까지 올라온 두 사람이 등장했다.
‘무시무시하네.’
오로지 목검만을 사용하는 둘째 날과는 달리 8강에 올라온 참가자들은 진검 승부를 펼친다.
여기에 독특한 규칙이 하나 있는데, 진검 승부라는 말과 달리 굳이 검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검술에 대한 기초는 예선에서 진작 확인했으니 본선에선 따로 무기에 대한 규제를 두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래서인지 등장부터가 살벌했다.
한 사람은 묵직한 철퇴를 가지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제 몸뚱이만 한 넓이의 도끼를 든 채였다.
‘모, 못 보겠어……!’
초대를 받았으니 오긴 했지만 무서운 건 무서운 거였다.
철퇴에 한 대만 맞아도 머리가 으스러질 것 같고, 도끼에 한 번 찍히기만 해도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데 그 피 튀기는 현장을 어떻게 보나.
여태껏 말로 듣기만 했지, 막상 보려니 무척이나 두려우면서도 테시우스에 대한 걱정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2황자 전하께서 만약 다치시면……. 그땐 어떡하지?’
지금껏 그를 이긴 사람은 아무도 없다지만,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정말 볼만할 거라고도 생각했지만.
실제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기를 든 참가자를 보고 나니 그리 생각했던 게 얼마나 가벼운 생각이었는지 새삼 느껴졌다.
오늘 이곳에서 누군가는 크게 다칠 것이고, 또 누군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패자들을 짓밟고 올라온 승자와 대결하는 것이 바로 2황자였다.
이게 공포 영화라면 이렇게까지 두렵고 걱정되진 않을 텐데.
한편 아드넬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눈을 어디에 둘지 몰라 하자 이를 발견한 제이든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아, 아드넬?”
“어, 어……? 실은…… 너무 잔인할 것 같아서…….”
“아무래도 그렇지. 그래서 하나 챙겨 왔어, 여기.”
그때 제이든이 주머니 춤에서 새하얀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다름 아닌 손수건으로, 그가 평소에 들고 다니는 물건은 아니었다.
“다른 영애들은 부채가 있지만 아드넬은 아니니까……. 너무 보기 힘들면 이걸로라도 가려.”
여름의 초입과 사람들이 자아내는 열기로 땀을 닦아 내기엔 딱 좋은 물건이었다.
정확히는 그런 핑계를 대기에 좋았다.
아드넬은 고마움을 담아 제이든을 바라보며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고마워, 역시 제이든밖에 없어.”
“……아니야.”
그리 말하는 제이든의 귓등은 조금 붉어진 채였다.
그리고 마침내 경기가 시작되었다.
“대결,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