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46)화 (46/141)

46화

일 년에 한 번, 수도에서 열리는 무투회는 여름의 대표 행사였다.

본래 가을에 열렸으나 2황자의 무예가 출중하고 또 좋아해서 탄신연과 겸하게 된 행사이기도 했다.

승자에겐 정식 기사 서임을 받을 수 있는 최소 자격인 준남작 위와 어마어마한 상금이 주어지기 때문에 참가자는 물론이고 그 치열한 대결을 구경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 왔다.

그렇게 열리는 무투회는 총 사흘에 걸쳐 진행되는데, 첫날에는 대진표를 짜기 위한 예선이 진행되어 관람객이 거의 없는 축에 속했다.

기껏해야 관계자나 참석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둘째 날엔 32강의 대진표대로 진행이 되는데 이 또한 시간이 오래 걸리고 또 지루해서 마찬가지로 관람객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대망의 셋째 날은 다르다.

8강까지 올라온 이들의 경합이 이루어지는 것은 물론, 최종 우승자를 뽑는 결승전이 진행되기 때문에 무투회 티켓을 구매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몰린다.

여기서 셋째 날의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었다.

바로 2황자 테시우스와 우승자와의 경합이었다.

‘설마하니 지금껏 이 사람을 꺾은 사람이 없을 줄은.’

무예를 좋아하는 성정 탓에 가을에 있던 무투회가 여름으로 앞당겨진 것 외에도 2황자와의 대련이라는 새 이벤트가 생긴 것인데, 놀랍게도 산전수전 다 겪고 실전에 능한 기사와 용병조차도 테시우스를 꺾지 못했다고 했다.

아드넬도 얼마 전에야 안 사실이지만 그래도 놀라웠다.

제아무리 육체적인 능력이 타고나도 실전 경험이 적은 사람은 무릇 밀리기 마련인데, 그런 리스크조차 뛰어넘을 만큼의 재능을 가졌다니 놀랄 수밖에.

‘검을 맞대어 이길 사람이 나타나긴 할까.’

그런 사람이 나온다면 정말 볼만할 텐데.

여하간 아드넬은 무투회에 참석하기로 했고, 첫날과 둘째 날엔 공녀는 물론이고 황족들도 참석하지 않아 다른 방향으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다름 아닌 클리프를 만나는 것이었다.

‘오늘부터 진짜 시작이니까.’

공녀들을 모델로 삼고, 대량 생산을 하는 방향으로 새 사업을 진행하겠다는 계획을 위해서는 오늘이 가장 중요했다.

그렇게 무투회 첫째 날, 아드넬은 미리 약속을 잡고 곧장 클리프의 상회로 향했다.

그는 이전에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사무실에 있었다.

아드넬이 작게 노크하자 문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아드넬이 들어가자 한창 서류를 살피던 클리프가 고개를 들었다.

이내 그의 얼굴 위로 싱긋 하는 미소가 떠올랐다.

“아드넬.”

“그동안 잘 지냈어요?”

“물론이다 마다. 라그랑 개발 사업 건으로 좀 바빠지긴 했지만.”

클리프가 자리를 권하자 아드넬도 응접용 소파에 앉았다.

다과를 가져오려는 그를 제지하며 아드넬이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동안 계속 생각해 봤는데, 우리 사업의 첫 상품을 근육통 연고로 하면 어떨까 싶어요.”

“근육통 연고? 그런 게 있어?”

“이번에 주인님이 새로 레시피를 주셔서 만들어 본 연고에요.”

사실 아드넬이 테시우스를 위해 근육통 연고를 만들 때는 단순히 라크란 병을 치료하고, 또 하루도 빠짐없이 무예를 갈고 닦는 사람에겐 이만한 화장품이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막상 만들고 보니 대량 생산 사업의 발판으로 삼을 첫 제품으로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드는 난이도가 어려운 편도 아니고.’

물론 지금 가지고 있는 마도구 자체는 소량 생산에 적합해서 대량으로 만들려면 꽤 오랜 시간을 들여야 했다.

어차피 당장 사람을 구하고 공정을 가르칠 여력은 없었기 때문에, 아드넬은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한정 수량을 풀어서 선보이는 거야!’

아드넬이 한창 바빴던 데엔 이 이유가 가장 컸다.

무투회가 다 지난 시점에서 한정 수량을 푸는 것보단 여행객이 잔뜩 몰린 지금이 가장 적기였다.

하지만 혼자서 만드는 데엔 꽤 많은 시간이 걸려서, 아드넬은 그동안 거의 하루 종일 작업실에 틀어박힌 채 기계처럼 만들어야만 했다.

공녀들을 위해 만든 메이크업 베이스, 블레미시 밤, 2황자를 위한 치료제와 한정 수량으로 풀 근육통 연고까지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것이다.

덕분에 눈 아래는 퀭하게 물들었고 무척이나 피로했지만 사업만 성공적이라면야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그럼 혹시……. 그 많은 재료를 조달해 달라고 한 게……?”

“맞아요. 1층에 진작 가져다 두었어요.”

본래 라그랑에 다녀오려고 했으나 무산되고 난 뒤, 클리프는 아드넬이 보낸 서신을 보고 기함하고 말았다.

화장품에 들어갈 재료의 양도 어마어마했거니와 그 종류도 무척 다양했으며, 뜬금없이 어떤 그림을 동봉하더니 그 형상을 연고 통 뚜껑에 새겨 달라 요청한 것이다.

이에 대한 것들은 직접 만나 얘기해 주겠다고만 했고.

여기에 클리프는 라그랑 개발 사업 건 외에도 할 일이 많은 사람인지라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겼을 뿐이었다.

하지만 막상 이야기를 듣고 보니 너무 놀라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드넬이 진작 챙겨온 근육통 연고를 꺼내 보였을 때였다.

“지금은 ‘아실라’라는 주인님의 네임 밸류가 있지만 평민들과는 거리가 너무 멀어요. 그래서 새로운 상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상호라 함은 다름 아닌 브랜드였다.

다만 평민들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고, 글자가 들어가도 알아볼 수 있게끔 브랜드를 대표하는 로고도 필요했다.

그래서 아드넬은 머리를 감싸 맨 끝에 마침내 로고 디자인을 완성했다.

동그란 연고 통 뚜껑 모양에 맞춰 평화를 상징하는 올리브 나뭇가지로 원형을 그렸는데, 상단 중앙부엔 비둘기를 넣고 그 아래엔 공평함을 상징하는 저울을 그려 넣었다.

저울 아래엔 ‘마르타’라 쓰인 이름이 있었고, 연고 통 가장 하단부엔 카리아 상회를 대표하는 상징인 배의 키와 이름이 작게 그려져 있었다.

여기서 아드넬이 굳이 그 세 가지 상징을 고른 데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오래전에 사라진 여신이지만 모두가 기억하는 상징이지.’

여신 마르타, 오백여 년 전 사라졌으나 거의 모든 평민이 익히 알고 있는 여신이었다.

공평성과 평화를 추구하며 신분에 위아래를 두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평민들의 큰 지지를 얻었으나, 신분제에 크게 반한다는 이유로 34대 황제가 신전을 모두 부순 것으로도 유명했다.

이에 평민들이 목소리를 높이자 35대 황제는 철폐를 취소했으나 신전의 재건립은 허용하지 않아서, 아쉽게 부활하진 못했다.

그래도 덕분에 그 상징을 사용하는 데엔 문제가 없었다.

지금 막 처음 본 클리프가 보기에도 이 상징이라면 평민들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꽤 뿌듯한 얼굴의 아드넬과는 달리, 클리프는 사뭇 어둡게 표정을 굳혔다.

“……아드넬.”

“네, 말씀하세요.”

“왜 이 큰일을 나한테 말하지 않은 거야?”

클리프는 어딘가 조금 섭섭해 보이기도, 또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말에 아드넬이 “어…….” 하며 말끝을 흐리자 그가 덧붙였다.

“새로운 상호를 정하는 것만도 무척 큰일인데, 그런 게 있다면 같이 의논을 했어야지.”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동안 클리프가 해 준 일이 너무 많다 보니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별궁에 끌려온 이후로, 클리프는 줄곧 아드넬이 필요로 하는 재료 조달을 맡아 주었다.

2황자를 위한 화장품부터 시작해서 시간이 흘러서는 라그랑에 있는 미용 흙과 금홍석의 추출이며, 근육통 연고를 위한 대량의 재료 조달이며, 남부 지방에 있는 희귀한 재료까지 수소문해 구해 주었다.

안 그래도 상회 일로 바쁜 사람이 이렇게까지 도맡아 해 주는 건 두 사람이 쌓아 온 오래된 신의 때문이지, 그가 벌어들이는 수익을 생각하면 클리프가 이만큼씩이나 해 줄 이유는 없었다.

그걸 알기에 아드넬 혼자 로고 디자인을 구상해 만들고, 이를 새긴 연고 통 제작만 부탁한 것이나, 클리프가 저리 말할 줄은 몰랐던지라 그녀 또한 얼굴을 조금 굳혔다.

“미안해요……. 제 생각이 짧았어요.”

“나도 물론 바쁘지만, 네가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2황자의 치료부터 시작해서 지금은 황후와 공녀들을 위한 것까지 만들고 있잖아. 나야 직원들과 일을 분담할 수 있지만, 넌 오롯이 혼자서 하고 있고. 그럼 너는 누구와 일을 분담하고 쉴 수 있겠어?”

걱정기가 다분한 목소리, 하지만 핵심을 찌르는 말.

‘클리프의 말이 맞아. 나도 많이 지치긴 했어…….’

다짜고짜 끌려와 화장품을 만드는 것으로도 모자라 다른 사람들 것까지 강제로 떠안게 되고, 여기에 줄곧 숨겨 왔던 능력까지 개방해 치료제를 만들었다.

그러나 손쉽게 만들 수 있는 화장수만으로도 좋아하는 별궁 하녀들을 보고, 클리프의 대량 생산 사업 제안을 받았을 땐 살롱 그 이상의 꿈이 생겨났고, 그래서 더 무리한 감도 없지 않아 있었다.

브랜드를 선보이는 첫 제품으로 근육통 연고를 선정한 만큼 무투회라는 좋은 시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당연하지만 힘들고, 지쳤다.

그래서인지 클리프의 말을 들은 순간 아드넬은 울컥 감정이 차올랐다.

“너는 너 자신을 조금 더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해. 네가 없으면 누가 2황자를 치료하고, 공녀들이 필요로 하는 화장품을 만들 수 있겠어?”

“……그거야 주인님께서 대신…….”

“물론 다른 대리인을 세울 수도 있겠지. 하지만 봐, 누가 너만큼이나 혼자서 새 상호를 디자인하고 또 자진해서 수고하겠어? ‘아실라’의 대리인으로 있는 건 알지만 그 사람만큼이나 너도 중요한 사람이야.”

사실은 모두 거짓말이고, 아드넬 혼자 감당하는 게 맞았다.

그러나 아실라의 대리인으로 알고 있는 클리프가 이렇게까지 말해 줄 줄은 몰랐던 터라 괜스레 눈물이 글썽 맺혔다.

“……고마워요, 클리프. 명심할게요.”

“다음부턴 꼭 나랑 같이 상의해 줘. 고민이 있을수록 같이 머리를 맞대야지.”

“네, 물론이에요. 약속할게요.”

“자, 그럼 이제 우리의 ‘첫 제품’을 어떻게 선보일지 본격적으로 얘기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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