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아드넬은 앞으로 만들 화장품을 몇 가지 설명했다.
트러블이 올라온 부분만 커버할 수 있는 컨실러와 얼굴이 하얗게 뜨지 않으면서 유분기를 잡아 주는 미네랄 파우더, 자초를 넣어 인공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발색이 나면서도 입술의 건조함을 막아 주는 자초 립밤 등등.
기대감을 위해 일부만 설명했지만 디아나의 눈빛은 벌써부터 잔뜩 기대가 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반면 줄곧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던 율리시아의 낯빛은 조금 어두워졌다.
이를 눈치채지 못한 아드넬이 덧붙였다.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사용해 주시면 저희 쪽에서 화첩을 그려 만든 뒤 대량으로 복사해 홍보할 생각입니다. 일종의 광고지 같은 느낌이랄까요. 다만 고귀하신 공녀님께 보수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으니……. 괜찮으시다면 앞으로 공녀님께서 쓰실 모든 화장품을 대가 없이 보내드리는 것으로 대신해도 되겠습니까?”
“그런 제안이라면 얼마든지 좋아요. 새 화장품을 제일 먼저 쓸 수 있다니 그것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겠나요?”
“율리시아 영애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 저는…….”
그때 아드넬이 몸을 돌려 율리시아를 향해 묻자, 그제야 뒤늦게 어두워진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율리시아는 말끝을 흐리며 조금 머뭇거렸다.
“……당장의 확답은 줄 수 없을 것 같네요. 그 부분은 조금 더 생각해 본 뒤에 얘기해 주겠어요.”
“아……. 예, 괜찮습니다. 천천히 답해 주십시오.”
늘 정적인 사람이니 디아나처럼 반색하는 반응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얼굴이 어두워지는 건 예상하지 못했다.
아드넬은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잘만하면 황후를 모델로 쓸 수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는데. 좀 아쉽다.’
지금이야 공녀 신분이지만 경합에서 이긴 한 사람은 황태자비가, 이후론 황후가 된다.
물론 현 황후도 아드넬의 화장품을 사용하긴 하지만 ‘황후가 사용하는 화장품’이란 타이틀은 지금 귀족들에게나 적용되는 것이고, 평민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일찍이 공녀 신분일 때 포섭한 뒤 훗날 황후 자리에 올라도 모델로서 활동해 주길 바란 것인데 둘 중 누가 황태자비 경합에서 이길지 모르다 보니 율리시아의 불확실한 답이 못내 아쉬웠다.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차후 새 화장품이 완성되면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가는 길 조심히 돌아가도록 해요.”
“예, 그럼.”
아드넬은 마지막까지 정중하게 예의를 갖춘 뒤 응접실을 나섰다.
큰일 하나를 치르고 나니 문을 닫자마자 절로 “후우…….” 하는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일단 이걸로 하나는 끝났네. 다음으로는….’
2황자, 테시우스.
그를 위한 화장품은 진작 만들어 두었다.
그리고 오로지 그만을 위한 화장품이기도 했다.
‘또 연무장에 계시려나?’
원래도 그곳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는 사람이지만 무투회가 하루 앞이니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아드넬은 본성을 빠져나와 테시우스의 개인 연무장으로 향하며 바지춤에 넣어 둔 연고 통을 만지작거렸다.
효과는 당연히 있을 테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능력’을 사용해 만든 것이다 보니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좀 더 흘러 연무장에 도착하자, 전처럼 펠릭스가 먼저 방문을 고하고 이후 아드넬이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아드넬은 꽤 오랜만에, 2황자를 재회하게 되었다.
“아…….”
저 멀리, 테시우스가 보였다.
그는 예전에 입던 것과는 달리 조금 헐렁하고 품이 넉넉한 셔츠를 입었다.
제 머리 색만큼이나 어두운 검은색 바지를 입었고, 팔짱을 낀 채 벤치에 앉아 쉬고 있었다.
바람이 솨 하고 불면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이마를 덮은 앞머리가 옆으로 밀려나서, 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큰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리고 드러나는 얼굴, 눈동자, 코, 입매.
어디 하나 모난 곳이 없는 완벽한 이목구비.
그래서일까.
그를 본 순간 일순 가슴이 두근거렸다.
실로 낯선 감각에 아드넬은 잠시간 멈춰 서 머리를 거세게 흔들었다.
이건, 당연한 거야.
누구든 저 사람을 보면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가슴이 설레고 두근거릴 테니까.
그만큼 아름다운 사람이니까.
아드넬은 콩닥거리는 박동을 애써 외면하며 벤치로 향했다.
이윽고 다가오는 인기척에 테시우스가 고개를 들었다.
“……아드넬.”
낮고 묵직한 음성엔 예전과는 달리 약간의 친근함이 담겨 있었다.
아드넬은 마른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저……. 따로 드릴 것이 있어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뭐지?”
“전하께서도 무투회에 참가하신다 들었습니다. 무투회를 하루 앞둔 시점에 드리게 되어 송구스럽지만……. 받아 주셨으면 합니다.”
아드넬은 바지춤에 넣어 둔 연고 통을 꺼내 공손히 내밀었다.
이를 본 테시우스가 눈을 살짝 뜨며 되물었다.
“연고라면 일전에 축하 연회에서 준 게 있지 않나.”
“그것과는 조금 다른 것입니다. 근육통에 좋은 연고로 운동 후 결리거나 관절염이 있는 부위에 마사지하듯 부드럽게 펴 발라 사용하시면 됩니다.”
아드넬이 새로이 만든 화장품은 다름 아닌 근육통 연고로, 관절염은 물론이고 신경통과 류머티즘에도 효과적인 천연 화장품이었다.
하지만 예전에 만든 화장품들이 단순히 그런 효과에만 치중한 것이라면, 이번에 만든 것은 조금 달랐다.
크라술라라는 남부 지방에서만 나는 식물인 다키탈리스를 넣어 만든 것으로, 아드넬이 마녀의 능력을 각성한 뒤 알게 된 지식들을 바탕으로 만든 제국 최초의 ‘라크란 병 치료제’였다.
꽤 희귀한 식물이라 구하는 데 애를 먹었지만 능력 좋은 클리프가 수소문해 준 덕에 만들 수 있었다.
능력을 들키거나 의심받지 않기 위해 근육통 연고라는 이름 뒤에 숨겼으나 실제로 연고 레시피와 합이 좋아 근육통에도 좋고 또 라크란 병에도 좋았다.
‘용량을 줄여 치료는 다소 더딜 테지만 꾸준히만 쓰면 올해 안에 완치될 거야.’
그러면 2황자도 병마에서 완전히 벗어날 테고, 나도 별궁을 나갈 수 있게 되겠지.
아드넬은 생각하며 덧붙였다.
“조금 화한 느낌이 들 테지만 상처가 있는 부위에 바르셔도 괜찮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네가 만든 것들은 늘 효과가 있었으니.”
테시우스는 피식 작게 웃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꽤 오랜만에 보는 듯한 미소에 또 한 번 주책맞게 가슴이 간질거렸다.
‘그나저나 이 사람은 정말 누구랑 결혼하게 될까.’
지금껏 어떤 접점이 있던 영애는 한 명도 없었다는데.
그거야 지금 앓는 병 때문이라 쳐도, 나중에 완치되고 흉터도 깨끗이 사라지면 여자들이 줄을 설 것 같았다.
게다가 2황자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병증 때문에 잠을 푹 자지 못하면서 성격이 변한 것이라, 언젠가 그 성격까지 유하게 변하게 되면 황태자 다음으로 가는 신랑감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만든 일등 공신은 분명 아드넬 본인일 테고.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남한테 홀랑 뺏기는 기분이 이런 걸까.’
어차피 오르지도 못할 나무라 진작 포기하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 아쉽긴 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또 한 번 낯설어 아드넬은 빠르게 자리를 뜰 생각으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잠깐만.”
그러나 아드넬이 말을 마치고 가려는 찰나, 테시우스가 그녀를 붙잡았다.
무슨 용건이 남았나 싶어 고개를 들자 그가 덧붙였다.
“이번 무투회에 너도……. 참석하나?”
“……예? 제가……요?”
무투회에,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맨날 작업실에 처박혀 화장품만 만드는 사람한테 할 소린 아니었다.
아드넬은 묘하게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답했다.
“그럴 리가요. 제가 참가했다간 예선에도 못 올라가고 서류 심사에서 탈락할 겁니다.”
“……뭐?”
바로 그때, 아드넬의 대답을 들은 테시우스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2황자가 이렇게 웃는 건 처음 보는지라 아드넬도 그가 그러했듯 눈을 크게 떴다.
“하아, 하, 어떻게 그 말을 그렇게 받아들이는지……. 관중석에 앉아 구경하는 걸 말한 거다, 실제로 무투회에 참가하는 게 아니라.”
“……아.”
그제야 말을 잘못 이해한 걸 깨달은 아드넬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바보같이, ‘참석’이라는 단어를 ‘참가’로 잘못 듣고 이상한 답변만 내놓은 것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2황자가 제게 무투회에 참가하냐고 물어볼 리가 없는데, 정신을 어디에 놓고 다니는 건지 스스로 생각해도 기가 막혔다.
하지만 아드넬의 얼굴이 창피함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데에 반해, 테시우스는 크게 웃어 상기된 얼굴로 미소 지은 채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커다란 손은 입가 근처에 다다라 있었고, 올라간 입꼬리가 자아내는 미소는 얼핏 귀여운 무언가를 보는 듯 묘한 다정함을 담고 있었다.
“그래도 간만에……. 이리 웃은 것 같아. 고맙다, 아드넬.”
정말로 고마운지 아직도 그의 얼굴엔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라 아드넬은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그리곤 도망치듯 인사하고 그 자리를 뜰 생각으로 말했다.
“그, 그럼 저는 이제 정말 가 보겠…….”
“아직이야. 대답을 제대로 하지 않았잖아.”
“……아, 예. 저도…… 참석합니다.”
사실 처음엔 참석할 생각이 없었는데, 상냥한 디아나가 아드넬의 자리를 따로 마련해 일찍이 티켓을 보내 주었다.
이에 아드넬이 답하자 테시우스는 잠시간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곧 수긍했다.
“그래, 알았다. 바쁜 것 같은데 이만 가 보도록.”
“……예.”
가겠다는 말만 두 번을 했다 보니 바쁜 것 같다는 말도 일부러 놀리는 것처럼 들렸다.
아드넬은 새빨개진 얼굴로 휙 몸을 돌려 걸음을 빨리했다.
그렇게 멀어지는 작은 등을 응시하는 테시우스의 얼굴 위로 싱긋 웃음기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