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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44)화 (44/141)

44화

새로운 계절은 언제나 설렘을 몰고 온다.

여기에 탄신연과 무투회라는 큰 행사가 있는 만큼 수도의 분위기 또한 크게 들떴다.

무투회를 보기 위해 각지에서 찾아온 사람들로 여관은 가득 찼고, 여행객들에게 하나라도 더 팔고자 시장이고 번화가고 할 것 없이 영업시간도 대폭 늘었다.

무기를 제련하는 대장간도 문전성시를 이루며 철을 내려치는 소리가 끊이질 않고, 밤이 되면 술에 취해 잔뜩 허세를 부리는 사내들의 목소리가 문밖으로 새어 나왔다.

늦은 새벽이 되어도 빛이 꺼지지 않는 건물이 대다수였으며 거리 곳곳엔 무투회를 알리는 공고와 붉은 깃발이 달렸다.

그야말로 생기로 가득 찬 계절이었다.

‘딱, 나만 빼고.’

그동안 아드넬은 공녀가 부탁한 것과 2황자를 위한 치료제, 또 일찍이 생각해 둔 ‘새 화장품’을 만드느라 하루의 대부분을 작업실에서 보내야만 했다.

여기서 아드넬은 공녀들을 위한 화장품을 만들기 위해 라그랑에 직접 가는 대신, 클리프에게 서신을 보내 그가 보여 준 사업 제안서에 대한 답을 돌려줌과 동시에 필요한 재료를 구해 줄 것을 부탁했다.

무투회가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마차로 꼬박 이틀이나 걸리는 라그랑에 가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2황자를 위한 ‘특별한’ 화장품을 만들기 위해서도 ‘특별한’ 재료가 필요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심혈을 기울인 화장품이 마침내 완성된 날, 아드넬은 두 공녀에게 서신을 보냈다.

직접 만나 설명해 주겠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였다.

이윽고 무투회가 시작되기 하루 전, 아드넬은 공녀들이 지내는 본성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곳입니다.”

안내를 위해 디아나가 보낸 시녀는 본성 지리에 전무한 아드넬을 응접실까지 안내한 뒤 똑똑 문을 두드렸다.

“공녀님, 아드넬 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어오라 하세요.”

일전에 들었던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고 시녀가 문을 열자, 별궁에 있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화려한 응접실이 나타났다.

어지간한 의상실만 한 크기의 방으로 새하얀 벽면엔 진짜 황금으로 그린 것 같은 금색 문양들이 빼곡했고 테이블이며 소파며 하다못해 테라스의 커튼마저 고급스러운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그간 잘 지냈나요?”

디아나는 싱긋 웃는 낯으로 먼저 인사를 건넸다.

축하 연회에서 봤을 때와 같이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였다.

다만 얼굴은 아무 화장도 하지 않은, 말간 얼굴이었다.

화장품 설명을 위해 아드넬이 일찍이 부탁한 탓이었다.

이내 아드넬은 허리를 공손하게 굽혀 보이며 인사했다.

“예, 공녀님.”

“일전에 말씀드린 화장품이 완성되었다 들었는데, 어떤 것인가요?”

“직접 보여 드리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잠시 옆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에요.”

아드넬이 디아나의 옆자리에 앉자 찻잔을 기울이던 율리시아도 내려놓고 집중했다.

이윽고 아드넬이 들고 온 고급스러운 원목 상자의 뚜껑이 열렸다.

안에는 총 네 개의 납작한 원통형 용기와 길쭉한 모양의 스킨 용기 두 개가 들어 있었는데, 원통형 용기는 구분을 위해 분홍색과 붉은색으로 뚜껑을 칠해 놓았다.

아드넬은 그중에 분홍색으로 칠한 용기 하나를 들어 보였다.

“이건 메이크업 베이스라고 하는 화장품으로, 피부의 울긋불긋한 부분을 가려 주면서 피부의 색을 균일하게 맞춰 주는 것입니다. 보다 화사한 피부 연출을 가능하게 도와주는 화장품이지요. 혹 밖에 계신 시녀분의 도움을 받아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아드넬의 말에 디아나가 테이블 위에 있던 종을 가볍게 울리자 응접실 밖에 있던 시녀가 들어왔다.

그녀에게 메이크업 베이스를 넘긴 아드넬이 설명했다.

“대충 이 정도 양으로 덜어 피부에 고루 펴 발라 주시면 됩니다.”

속은 여자지만 겉은 남자의 모습인지라 아직 미혼의 영애에게 함부로 손을 댈 수는 없었다.

시녀는 아드넬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디아나에게 메이크업 베이스를 발라 주었다.

줄곧 치장을 돕던 사람이어선지 이전에도 많이 해 본 것처럼 능숙한 모습이었다.

얼굴에 모두 바른 뒤엔 화장품과 함께 가져온 손거울을 꺼내 내밀었다.

“……정말 얼굴이 훨씬 화사해진 것 같아요!”

“이 화장품은 세안 후 바르는 기초 화장품 이후, 치장을 하실 때 먼저 바르시는 것입니다. 다음으론 이걸 바르시면 됩니다.”

아드넬은 붉은색으로 칠한 용기를 내밀며 덧붙였다.

“블레미시 밤, 줄여서 비비크림이라고 부르는 화장품입니다. 손상된 피부를 진정시키고 외부 자극으로부터 피부를 지켜 주면서도 결점을 보완해 주는 효과가 있지요. 마찬가지로 비슷한 양을 덜어 고루 발라 주시면 됩니다.”

아까와 같이 시녀가 비비크림을 발라 주고, 뒤이어 디아나가 손거울을 들었다.

그리고 제 얼굴을 마주한 맑은 연두색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세상에나, 뭐 하나 두드러진 것 없이 피부가 훨씬 깨끗해 보여요!”

“이제 본래 하시던 것처럼 마저 화장하시면 됩니다.”

아드넬의 말에 시녀는 디아나가 평소 사용하는 화장품을 들고 돌아왔다.

눈썹을 그리는 연필과 분가루, 입술에 바르는 것 등 가짓수는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때 아드넬이 자처했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잠시 도와드려도 될까요?”

“……아드넬 님이시라면, 좋아요.”

“감사합니다. 그럼 잠시.”

아드넬은 디아나에게 가까이 다가가 앉아 새하얀 분가루를 먼저 두드렸다.

피부가 번들거리는 것을 가리기 위해서였는데 너무 많이 바르면 얼굴이 하얗게 뜰 수 있어 가볍게만 두드렸다.

다음으론 눈썹이었다.

다소 위로 치켜 올라가게 그리는 모양이 주류였으나, 아드넬은 눈썹 모양에 맞춰 그리면서도 일자형으로 그려 채웠다.

볼에는 분홍 기가 도는 분가루를 톡톡 두드려 홍조 기를 살짝 주고, 입술엔 붉은 염료를 넣어 만든 립스틱 대용품을 붓으로 바르되 입술 안쪽은 연하면서 밖으로 갈수록 조금 더 진하게 그렸다.

“끝났습니다. 이제 거울을 보셔도 됩니다.”

아드넬은 뿌듯한 표정으로 손거울을 내밀었다.

이내 거울을 받아 든 디아나의 얼굴 위로 기쁨이 차올랐다.

“정말 마음에 들어요! 눈썹을 이렇게 그리니 인상도 그리 세 보이지 않고, 훨씬 자연스러우면서도 내게 잘 어울리네요. 볼도 과하지 않게 물들어 생기 있어 보이고, 입술 색도 은은하면서 진한 게 전체를 다 바르는 것보다 훨씬 나아요. 피부색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요.”

잔뜩 흥분해 열변을 토하던 디아나는 거울을 내려놓기 무섭게 아드넬을 쳐다보며 활짝 웃어 보였다.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의 화장품이에요. 어떤 것으로 보상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요.”

“과찬이십니다, 공녀님.”

말은 그렇게 하지만 아드넬도 실룩이는 입가는 어쩔 수 없었다.

누군들 제 칭찬을 마다할 것이며 보상까지 있다는데 싫어하겠는가.

더구나 현재 귀족 영애들의 화장법은 피부에 그리 좋지 않은 방식이었다.

스킨과 로션을 바른 얼굴에 분가루를 잔뜩 두드려 하얗게 만드는데 자칫 잘못하면 얼굴만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데다 모공이 막혀 되레 트러블이 잦게 생겼다.

하지만 그만한 트러블이 생겼을 때 가릴 수 있는 화장품이 없어 귀족 영애들은 유독 피부 트러블이 심한 날이면 아예 외출을 삼가기도 했다.

그런 결점을 완전히 덮어 줄 수 있는 화장품을 만들었는데 좋아하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다.

“다만 이 화장품은 바르고 난 뒤 세안을 꼼꼼히 하셔야 합니다. 그때 이걸 사용하시면 됩니다.”

상자 안에 담겨 있던 여섯 개의 화장품 중, 길쭉한 용기에 들어 있던 건 다름 아닌 딥 클렌징 워터였다.

화장도 물론 중요하지만 꼼꼼히 씻어 내지 않으면 되레 트러블이 날 수 있어 만든 것이었다.

“이건 딥 클렌징 워터라는 화장품입니다. 사용 전에 용기를 잠시 흔들어 섞어 준 뒤, 촘촘하고 얇은 천에 적당량을 덜어 피부의 불순물을 닦아 주고 비누로 마저 씻으시면 됩니다. 그다음엔 아침 세안 후 바르시는 스킨과 로션을 바르시면 되고요.”

“보관은 어떻게 하면 될까요?”

“딥 클렌징 워터는 상온에 두어도 괜찮지만 메이크업 베이스와 비비크림은 차갑게 보관하셔야 합니다. 해서 화장품을 보관할 수 있는 작은 프리지에 넣어 두시면 되는데, 일찍이 주문서를 넣었으니 오늘 내로 황성에 도착할 겁니다.”

“이렇게 세심하기까지, 내가 어떻게 보상하면 좋을지 정말 모르겠네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하지만 정 보상을 해 주신다면…….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아드넬은 일찍이 생각해 둔 보상이 있었다.

그리 어려운 건 아니지만 상상 이상의 효과를 불러올 바람이었다.

그리고 그건 클리프의 사업 제안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본래 제 주인님께서는 수도에 화장품 살롱을 열 생각이셨습니다만, 이번에 계획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그게 뭔가요?”

“아시다시피 화장품은 귀족의 전유물이자 사치품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평민들은 화장은커녕 비누 하나만으로 온몸을 씻고 건조함을 막아 줄 화장수 하나조차 사지 못하지요. 해서 살롱을 여는 것이 아닌, 상회를 통해 보다 저렴한 값에 화장품을 공급하려 합니다.”

클리프가 말한 사업은 다름 아닌 천연 화장품의 대량 생산이었다.

전문 인력을 모집하기엔 아드넬만큼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없어 어렵다.

하지만 천연 화장품 재료를 추출하는 연금술 공방과 화장품을 실제로 제작하는 공방을 제국 곳곳에 설립해 해당 지역의 주민을 교육시키고 공정에 투입한다면 충분히 실현 가능했다.

공정도 여러 개로 세분화해 교육시킬 생각이라 화장품에 무지한 평민들도 그리 어렵지 않게 배울 수 있고, 판매는 이미 수많은 분점이 있는 카리아 상회에서 맡으면 되었다.

물론 사업 초반에야 플러스가 아닌 마이너스가 나겠지만, 제국에 있는 모든 평민들이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으로 화장품을 구매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게 독점 공급이라면 더더욱.

“제가 바라는 건 두 분 영애께서 제 주인님께서 만드시는 화장품의 모델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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