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43)화 (43/141)

43화

어릴 때는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했다.

황비 소생인 테시우스에게 황위를 빼앗기는 것만큼은 절대 안 되노라고 늘 못 박으시던 분이었으니까.

바스토르 또한 더 나은 제국을 만드는 황제가 되고 싶단 욕심이 있었다.

하지만 그 바람 때문에 동생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기회조차 빼앗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정녕 원한다면 제 능력만으로 그 자리를 얻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누군가 자신을 뛰어넘는 능력을 갖췄다면 그가 황제가 되는 것이 제국을 위해 더 좋은 일 아니겠냐고, 그리 생각했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어머니가 원망스러워.’

동생을 동생으로 대해 주었을 뿐인데.

황후의 차가운 시선 아래, 함께 어울릴 수 없는 억압에, 불쌍한 제 동생은 구석으로 몰려 끝내 자신의 의지로 후계자 수업을 관두고 말았다.

그러니까 이 자리는, 거저 얻은 자리였다.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아 얻어 낸 자리가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도 미안하건만 황후는 아직까지도 테시우스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이젠 두 공작가까지 엮였으니…….’

체스터 가문은 친황제파였고, 황제파의 실권이었다.

반대로 하르트 가문은 오래도록 귀족파의 수장으로 있었다.

바스토르가 오웬 백작가를 사들인 목적이 귀족파의 동태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지만 이 또한 황후의 영향이 컸다.

그렇다고 귀족파가 어떤 움직임을 보였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오히려 율리시아를 황태자비 후보로 올리기 위해 노력을 했으면 했지, 이상한 동태를 보인 건 단 한 번도 없는 것이다.

‘제아무리 라이칸 후작이 하르트 공작의 오른팔로 있다지만, 망상이 과하셔.’

대체 언제쯤, 그 의심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벌어진 잇새로 “후우…….” 하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바스토르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황제로 즉위하기 전까지는, 혹은 그 이후로도, 알라니아의 견제는 사라지지 않을 거란 걸.

속에 무언가 꽉 막힌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이 순간, 저가 모든 속사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테시우스가 유독 보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그 아이를 깜박 잊고 있었군.’

일에 치여 한동안 생각을 못 하고 있었는데.

제 동생의 치료를 맡고 있는 평민, 아드넬.

그는 델리움에서 테시우스를 도와줬던 아렌이었다.

‘지금까진 얌전한 것 같다만.’

지켜볼 눈은 진작 붙여 두었다.

그도 그럴 게 델리움에서 우연히 만난 그 아이는 시간이 흘러 또 한 번 우연히, 별궁에서 재회하게 되었으니까.

물론 데려온 건 테시우스고 정작 끌려온 당사자는 그의 정체를 모르지만 바스토르는 아드넬이 굳이 ‘아렌’이라는 걸 숨기는 이유가 납득되지 않았다.

한때 저가 대뜸 끌고 가라 명했으니 두려웠을 법도 하지만 시간도 많이 흘렀고, 따로 수배령을 내린 적도 없다.

그러니 지금까지 숨길 이유는 더 이상 없을 터인데.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야.’

바스토르는 줄곧 아드넬의 동태를 지켜보았는데, 여기서 한 가지 수상한 사실을 알아냈다.

‘아실라’라는 주인에게 화장품 레시피가 적힌 서신을 받아 만든다는 아드넬의 말과 달리, 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그 ‘아실라’와 서신을 주고받은 적이 없다.

따로 키우는 전령조도 없었다.

그럼 어떻게 서신을 주고받으며 화장품을 만든단 말인가?

‘당장은 테시우스의 치료가 급하니 놔두는 거지만.’

사람을 짐승으로 바꾸는 저주를 푸는 게 우선이긴 하나 이에 대한 해결책은 아직까지도 찾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8년 전 그날 이후로 생긴 라크란 병이 그대로 진행되게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해서 아드넬을 예의 주시하며 가만히 둘 뿐이지만, 그가 감추고 있는 것들은 언젠가 밝혀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선 테시우스 또한 그 아드넬이 ‘아렌’이라는 것을 계속 모르게 할 필요가 있었다.

‘사사로운 정에 사로잡혀 황족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중죄를 넘어갈 수는 없지.’

일단은 계속 지켜볼 테지만.

허공을 응시하는 바스토르의 보랏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 * *

본래 아드넬은 필요한 재료를 구하러 직접 라그랑에 갈 생각이었지만, 2황자 테시우스를 만난 뒤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정말 이대로 있어도 괜찮을까?’

그가 병으로 고통받는 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가려움증에 이를 악물고 그저 참아야만 하며, 몸에 생긴 흉터 때문에 남들 앞에선 맨몸도 잘 보이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아드넬은 그런 그를 치료할 방법을 알고 있었다.

‘마녀의 핏줄…….’

엄마가 처음으로 목걸이에 대한 것을 알려 주었을 때, 아드넬은 자신에게 오래전 사라졌다는 마녀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엄마의 가문은 대대로 마녀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귀족이라는 신분 뒤에 철저히 숨어 있었는데 그 때문에 마녀 숙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목걸이는 오래도록 간직해 온 가문의 가보로, 마녀의 능력을 봉인할 뿐만 아니라 반대로 개방할 수도 있다고 했다.

‘마녀의 힘’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건지는 몰라도 원하는 때에 자연히 알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확실한 건 하나야. 치료와 관련된 것에 반응한다는 것.’

본래 마녀는 까마득한 과거에서부터 사람들과 밀접하게 지내며 그들을 치료해 주었다고 들었는데 지금 세상의 인식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마녀들이란 사악한 존재이며, 흑마법이라는 이상한 주술을 사용해 세상에 전염병을 뿌리고 저주를 거는 둥 악한 짓을 일삼아 세 번에 걸친 전쟁 끝에 모두 숙청당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사악하다는 인식과 달리 목걸이는 라그랑의 흙에 반응했고, 실제로 연금술 공방에 추출을 맡긴 결과, 효능을 가지고 있음이 밝혀졌다.

능력을 개방하지 않는다면 치료에 효과가 있는 재료에 반응을 할 것이고, 능력을 개방한다면 그 재료들을 가지고 완벽한 치료제를 만들 수 있을 터였다.

그럼 2황자도 더는 고통받지 않을 테고.

‘……그를 위해 목숨까지 걸 이유는 없지만.’

식단과 생활 습관을 바꾸고 천연 화장품을 쓰는 걸로 완치가 된다면 전생에서도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아토피로 고통받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드넬은 테시우스가 완치되지 않으면 별궁을 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날 위한 거야.

온전히 그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나의 미래와 꿈을 위해서 바라는 거야.

이날 밤, 아드넬은 마침내 결심하고 방 안의 모든 문을 걸어 잠갔다.

창문도 테라스도, 2황자의 침실과 이어지는 문까지 굳게 걸어 잠그고 내부가 보이지 않도록 커튼도 내렸다.

다만 목걸이가 반응하면서 빛이 새어 나가면 의심을 받을까 봐 방 안의 조명은 일부러 환하게 밝혔다.

마지막으로 할 일은 하나였다.

가방 깊은 곳에 넣어 둔, 낡고 오래된 나무 상자에 고이 간직하던 목걸이를 꺼내는 일이었다.

별궁에 들어온 후 혹여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일절 차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보네.’

한때 엄마가 매일 차고 다니던 목걸이.

돌아가신 후엔 자신이 매일같이 차고 다니던 엄마의 유일한 유품.

매듭은 싸구려에 조악할지 몰라도, 물방울 모양의 사파이어만큼은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드넬은 목걸이를 꺼내 실로 오랜만에 목에 찼다.

그리고 사파이어를 손에 쥔 채,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마음으로 간절히 바라면 된다고 했어.’

진정으로 그 힘을 원한다면.

마음이 바라는 대로, 소원하는 대로, 목걸이가 반응할 것이라고.

‘내게 그 힘을 줘. 2황자 전하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을 줘.’

다소 괴팍하기도 하고, 제멋대로인 사람이지만.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이 그렇게 변하기까지 몰아간 병을 쫓아낼 수 있는 힘을 진심으로 바라.

그리고 나에게도 새로운 미래를 가져다줄 그 힘을 주길 바라.

아드넬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소망했다.

바로 그 순간, 목걸이를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온몸에 힘이 휘몰아치는 감각에 다리가 휘청이고,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듯한 이상한 기분은 그저 낯설기만 했다.

정신은 자꾸만 아득해지고 한없이 어지러웠다, 하지만…….

‘버텨야 해……!’

그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날 위해서.

아드넬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입술을 짓이기며 가까스로 버텨 냈다.

목걸이를 움켜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새하얀 이마 위로 진땀이 배어 나왔다.

저도 모르게 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정말 혼절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마지막으로 든 그때, 놀랍게도 모든 것이 끝나며 참고 있던 숨이 턱 하고 튀어나왔다.

“……헉!”

그 짧은 새에 심장은 미친 듯이 박동하고 있었다.

아드넬은 가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렸다.

움켜쥔 주먹을 풀어 보니 밝게 뿜어져 나오던 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지금껏 봐 왔던 목걸이의 형상만이 남은 채였다.

그러나 변화는, 분명 있었다.

‘이건…….’

머릿속에 누군가 넣어주는 것처럼 그간 마녀들이 오랜 시간 축적해 온 치료에 관한 수많은 지식들이 흘러들어왔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묘한 식물들의 이미지와 다채로운 치료법은 물론이고, 제조한 약에 어떤 식으로 힘을 주입하는지, 복용법과 치료 기간은 얼마나 되는지 등.

마치 그 모든 것을 원래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또 원래 하던 것처럼, 피에 새겨지듯 아드넬의 머리를 지배했다.

‘마법사가 이런 기분일까?’

마법 술식에 관한 서적은 있어도 마력 운용에 대한 서적이 없는 것과 같은 원리였다.

타고나야지만 마력을 다룰 수 있는 마법사처럼, 배운 적이 없는데도 배운 것처럼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지식들이 그녀의 것으로 자리 잡았다.

실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것 같아.’

머릿속에 선명히 떠오르는 재료와 아드넬이 본래 알고 있던 레시피가 융합되며 지금껏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새로운 치료 약이 완성되었다.

그래서일까, 몸속 깊은 곳에 내재된 힘을 하루빨리 사용해 보고 싶다는 강한 욕망이 들었다.

‘……곧 무투회가 시작될 거야. 그전까지 확실히, 완성해야겠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