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내가 정말 왜 이러는 거지.’
테시우스는 멍하니 선 채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았다.
끝없는 굴레에 갇힌 것처럼 머릿속이 한없이 복잡했다. 펠릭스의 말을 듣고 분노한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처음엔 그저, 너도 말뿐이었노라고.
허락한 적 없노라는 비이성적인 생각에 기사를 보냈다.
하지만 막상 기사들을 보내 아드넬을 찾아오라 명하고 나니 기분이 싸하게 가라앉았다.
왜 아드넬에게 이렇게까지 하느냐는, 본질적인 질문이 그를 번민하게 했다.
‘그는 치료가 끝나면 별궁을 나가야 하는, 떠날 사람이야. 그게 맞는 건데…….’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감정은 제멋대로 날뛰었다.
스스로 주체할 수 없고 조절할 수 없는 비이성적인 감정이란 이다지도 괴로운 것이었던가.
아드넬은 술을 마시지 말라 했지만 굳이 꺼내 마신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저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면 파도처럼 몰려오는 부끄러움을 견딜 수가 없어서.
그에게 한없이 강요만 하는 이기심을 자제하지 못했다는 창피함과 자꾸만 그렇게 행동하는 자신이 무서워서.
하지만 결국 그 끝은, 후회였다.
그리고…….
‘……아직도 나는, 아드넬이 여기 있다는 것에 만족하고 있어. 그러니까 정말로 나는 그를…….’
아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아드넬은 남자고 그건 저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렌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면, 하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그날 이후로 지금껏 단 한 번도 동성을 보고 그런 마음을 품은 적은 없었다.
‘아드넬은 아렌이랑 비슷하니까,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러는 것뿐이야.’
거리낌 없이 연고를 발라주던 아렌처럼, 아드넬도 아무렇지 않게 내 상처에 손을 올리고 치료해주었으니까.
소중한 아렌과 비슷한 사람이니까 괜스레 더 신경 쓰이는 것이지, 그건 어떤 이름으로 정의할 수 있는 감정은 아니야.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되겠지.’
소용돌이치는 마음과 복잡한 생각들이 괴로웠다. 제 뜻대로 되지 않는 충동적인 행동들도 부끄러웠다.
그러니까, 더는 안 돼.
더는 지금처럼 행동하고 바라면 안 돼.
그를, 놓아주어야 해.
테시우스는 끝없이 머릿속으로 되뇌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만……. 아드넬을 보내자. 눈에 보이지 않으면 언젠가 나도 제자리로 돌아올 거야.’
그가 내릴 수 있는 최고의 결심은 그것뿐이었다.
테시우스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고 새 가운을 꺼내 입으면서도 끝없이 되뇌다 문 앞에서 잠시 심호흡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나온 순간.
“……전하.”
소파에 앉아 기다리던 아드넬이 테시우스를 향해 고개를 들며 말했다.
하지만, 빛바랜 흑발과 햇살에 부서지는 물결처럼 찬란하게 반짝이는 바닷빛 눈동자도.
새하얀 얼굴 위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고 있는 선홍빛 입술도.
가지런히 모은 두 손과 얇고 여린 체구도.
아드넬을 만들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을 보는 순간, 테시우스는 끝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너를 보내지 못하겠다, 아드넬.’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더 이상 그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면서 미칠 듯한 소유욕이 들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결심과 이성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어떻게든 붙잡아두고 싶다.
계속 내 곁에 두고 싶어.
그러려면 먼저…….
“…….”
테시우스는 잠시 멈춰 서 아드넬을 응시하다 곧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는 대신, 바로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전하……?”
“……몸이 뜨겁군.”
“아, 그럼 가운은 제가…….”
“아냐. 내가 하지.”
테시우스는 허리를 둘러맨 끈을 살짝 풀어 어깨 위의 가운을 끌어 내렸다.
언제 보아도 놀라운 상체에 아드넬이 몸을 움찔 떤 그때, 테시우스가 그녀의 손을 잡아 가슴께로 올렸다.
“여기부터 발라 줬으면 하는데.”
“아……. 아, 예. 알겠습니다.”
일순 잔뜩 경직되어 굳어 있던 아드넬이 황급히 손을 떼고 고개를 수그렸다.
잠깐 닿았던 것뿐인데, 미친 듯이 뛰는 2황자의 심장의 박동이 손바닥으로 고스란히 느껴져 당혹스러웠다.
‘술을 마셨으니까, 원체 많이 마셔서. 그래서 그런 거야. 놀라지 마.’
그런데 술 한 잔도 마시지 않은 저는 왜 심장이 쿵쾅거리나.
아드넬은 서둘러 새 화장품 용기를 돌려 열었다.
이번에 새로 만든 화장품은 다름 아닌 미네랄 바디 스프레이였다.
“전에 드린 것과 마찬가지로 늘 차갑게 보관하시고 병증이 도지실 때마다 바르시면 피부가 촉촉해지고 무척 시원해지실 겁니다.”
등이나 배 같은 넓은 부위에 수시로 로션을 덧바르기엔 불편하고, 봄여름엔 찐득거려 불편하다. 때문에 새로 만든 화장품으로, 본래는 아토피가 심한 곳에 뿌려 주는 것이나 스프레이 용기가 따로 없어 바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드넬이 화장품을 손에 덜어 테시우스의 가슴 위로 올린 그때였다.
“……아드넬.”
나지막한 목소리가 아드넬의 귓가를 울렸다.
수그린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본 순간, 테시우스가 정확히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미안……하다.”
생각지도 못한 사과에 아드넬은 잠시 멍해져 입을 살짝 벌리고 있다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아, 아닙니다. 전하께서 미안하실 건 아무것도…….”
“아니. 여태까지 한 것들 모두, 미안해.”
“…….”
“잘 지내던 너를 강제로 데려온 것도, 별궁에서 나가지 못하게 한 것도, 사지를 찢는다는……. 험악한 말을 한 것도 모두,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어.”
처음 봤을 적만 해도 무척 아름답긴 하나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마주한 금안은 진심을 담고 있었다.
축하 연회 날, 거의 다다른 별궁 앞에서 봤을 때처럼.
“앞으로 오늘처럼 강제로 데려오는 일은 없을 거야. 아까는 가지 말라 말했지만 원한다면 다녀와도 좋아. 네가 바라면 언제든지 별궁 밖에 나갔다 와도 좋고.”
“전하…….”
“갑자기 이런 말을 해서 당혹스럽겠지만. 내가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 하나만은 알아줬으면 해.”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 소리가 새어 나가 그에게 들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들 만큼.
그래서 아드넬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나야말로, 사과를 받아 주어 고맙군.”
“예…….”
얼떨떨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고.
뭐라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아드넬은 결국 입을 꾹 다물고 하던 일을 계속해야만 했다.
* * *
며칠 뒤, 본성 황태자 집무실.
양손을 모은 채 서 있는 두 공작 영애에게 붉은 인장이 찍힌 서신이 건네졌다.
보통 황실에 있는 큰 행사는 황제와 황후가 분담해 준비하지만, 현 황제는 병상에 누워 있고 황제 대리로 있는 바스토르 혼자서 준비하긴 무리였다.
또한 훗날 그의 옆에서 도울 황태자비를 뽑는 경합이니만큼 이러한 큰 행사를 얼마나 안정적으로, 또한 잘 준비하는지가 관건이었기에 디아나와 율리시아는 각각 2황자 탄신연과 무투회를 맡게 되었다.
“처음 맡아 보는 큰 행사이니만큼 모르는 것이 있다면 황태자의 업무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여기, 파비오 후작에게 묻도록 해요.”
“예, 황후 폐하.”
“두 사람은 이만 나가 보고, 아. 후작도 잠깐 자리를 비워 줬으면 하는데.”
“예, 그럼 저는 앞에 있겠습니다.”
그때, 다정한 눈으로 두 공녀를 바라보며 말하던 황후 알리나아가 보좌관인 파비오에게도 축객령을 내렸다.
일순 바스토르의 입에서 “하아…….” 하는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다분히 앞일이 예상된다는 듯한 소리였다.
이내 달칵하고 문이 닫히자 언제 그렇게 웃었냐는 듯 알리나아의 얼굴이 서늘하게 식었다.
“황태자.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일을 분담한 거지요?”
“황후 폐하…….”
“내 누누이 말했거늘! 황실에 보탬이 되려면 오래도록 황제파였던 체스터 가문과 혼사를 맺어야 한다고!”
다소 큰 목소리로 호통을 치며 알라니아가 미간을 좁혔다.
“한데 제국의 대표 행사인 무투회는 하르트 영애에게 주고, 2황자의 탄신연을 디아나에게 맡겨요? 도대체가 황태자는 지금 생각이 있는……!”
“어머니!”
그때 잠자코 듣던 바스토르가 끝내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덜컹하며 의자가 뒤로 거세게 밀려났다.
“테시우스의 탄신연 또한 무투회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공식 행사입니다. 두 영애 중 누구에게 맡기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요! 어머니께선 대체 언제까지 그 아이를 미워하실 겁니까?”
“내가? 미워한다고?”
하!
알라니아가 높은 목소리로 고개를 돌리며 웃더니 곧 바스토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입가엔 여전히 미소가 남아 있었으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은 채였다.
“이제 그만하실 때도 되지 않으셨습니까? 테시우스가 후계자 수업을 포기한 지 벌써 십여 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어머니께선 계속……!”
“누가 그 아이를 걱정하는 줄 아느냐!”
알라니아가 손바닥으로 책상을 쾅 내리치며 외쳤다.
“테시우스가 황위에 관심이 없다는 건 나도 안다, 목 위에 제대로 머리가 달린 인간이라면 모를 수가 없지! 하나 그 인간은 달라!”
“……또 라이칸 후작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하아…….
바스토르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놈의 후작, 후작!
이젠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누구보다도 어머니께서 잘 아시지 않습니까. 리아누 황비 전하께서 승하하셨을 때, 독살범을 잡은 것이 라이칸 후작입니다. 제 여동생을 시해한 이를 잡아 온 사람이 후작이란 말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야, 그치는 다르단 말이다……! 눈을 보면 알 수 있어, 그 음험한 속내를! 호시탐탐 황좌를 탐내고 넘보고, 테시우스가 후계자 수업을 포기할 때도 가장 거세게 반대한 것이 라이칸 후작이었다!”
“한때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닙니다, 별궁에 드나들긴커녕 테시우스의 안부를 묻는 서신조차 보내지 않고 있습니다! 이게 다 어머니께서 시선을 거두질 않으시니까……!”
바스토르는 말을 하다 말고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주먹을 세게 쥐었다.
이런 의미 없는 말다툼이 계속된들, 바뀌는 게 없다는 건 그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어머니께서도 이만 나가 보십시오.”
“지금 내게 축객령을 내리는 것이냐?”
“제가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아실 텐데요. 더는 이런 것에 시간을 할애할 수 없습니다.”
바스토르는 지끈거리는 두통을 외면하며 뒤로 밀려난 의자를 다시 앞으로 끌고 와 앉았다.
그리고 이젠 할 말이 없다는 듯, 옆에 치워 둔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그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던 알라니아는 곧 팩하고 몸을 돌려 나갔다.
하지만 탁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힌 순간, 바스토르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대체 언제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