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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41)화 (41/141)

41화

“이걸로 하나 주세요.”

“네! 2페논 되겠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어, 오늘은 내가 다 산다니까 왜 제이든이 내.”

“비싼 것도 아닌데 뭐 어때. 그럼 많이 파세요.”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찾아 주세요!”

아드넬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기도 전에 제이든이 잽싸게 선수를 쳤다.

그래도 2페논은 정말로 그리 큰 금액이 아니어서 아드넬은 가볍게 넘겼다.

하지만…….

“이 초콜릿 맛있겠다, 하나 포장해 주세요.”

“원래는 6페논인데 2개 사시면 1크라운에 드립죠!”

“여기 1크라운입니다. 많이 파세요.”

초콜릿 하나를 살 때도,

“이거 목걸이 필립한테 걸어 주면 웃길 것 같지 않아? 엄청 아기자기해.”

“얼마죠?”

“2크라운입니다, 손님.”

“나도 놀리고 싶으니까 내가 낼게. 여기요.”

놀려 줄 생각으로 목걸이를 살 때도,

“구두 닦아드려요! 단돈 2페논! 야시장에서도 반짝반짝 광이 나게 닦아드릴게요!”

“남자애가 엄청 어려 보이는데…….”

“그럼 닦지 뭐. 가자. 여기 5페논, 거스름돈은 안 줘도 돼.”

“와아! 감사합니다!”

하다못해 아드넬이 어린 구두닦이 소년을 보고 안쓰럽다는 듯 눈살만 살짝 찌푸려도, 제이든은 어떻게 할지 안다는 듯 데리고 가 아드넬이 주머니에 손을 넣기도 전에 냉큼 계산했다.

이쯤 되니 아드넬도 마음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오늘 돈 너무 많이 쓰는 거 아니야? 나도 돈 있어, 왜 자꾸 제이든이 내는 거야.”

“아드넬이 그동안 우리한테 해 준 게 얼만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고, 나도 돈 있어.”

구두를 닦는 동안 아드넬이 묻자 제이든은 그녀가 한 말을 똑같이 따라 하며 싱긋 웃어 보였다.

그 미소에 더 미안해져 “그래도…….” 하고 말끝을 흐렸지만 제이든은 이후로도 계속 아드넬 대신 계산했다.

그렇게 야시장을 구경한 지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 즈음, 두 사람은 사람들에게 물어 필립이 기다리고 있을 세실의 특제 꼬치구이 집으로 향했다.

원체 덩치가 큰 사람이라 멀리서도 금방 눈에 띄었다.

“필립!”

“……어, 아드넬!”

한 시간이나 지났는데도 필립은 여전히 줄을 선 채였다.

제이든은 새삼 그 혼자 보내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바로 그때, 두 사람의 앞을 막는 이들이 있었다.

길게 늘어진 줄 뒤에 가려져 미처 보지 못했는데 필립에게 가까이 간 순간 돌아서 나온 기사 두 명이 아드넬의 앞을 막고 섰다.

조명 빛을 받아 더욱 서슬 퍼렇게 빛나는 철 갑옷을 입은, 가슴엔 익숙한 문양이 그려진.

황실 기사단이었다.

“아드넬 님. 2황자 전하의 명으로 모시러 왔습니다.”

“……예? 2황자 전하의 명이라니…….”

“사안이 급하니 한시바삐 모셔 오시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저희와 함께 가시죠.”

난데없이 나타나 2황자의 명이 있으니 가자는 말에 아드넬은 당황하고 말았다.

그건 필립도 마찬가지였다.

무려 한 시간이나 기다리던 줄을 포기한 필립이 황급히 아드넬에게 달려왔다.

“아드넬……! 아니, 당신들 뭡니까?”

“필립, 그만해. 황실 기사단이야.”

“아니, 기사면 다야?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다짜고짜 찾아와서 무작정 잡아가는 겁니까? 아무리 황실 기사단이라지만 이래도 되는 겁니까?”

“잡아가는 게 아니라 모셔가는 거다. 그리고 한 번 더 선을 넘는다면 황실 모독죄로 즉시 체포하겠다.”

그들이 입은 갑옷만큼 서슬 퍼런 눈동자가 필립을 향했다.

하지만 체포라니, 그것만은 막아야 해.

아드넬이 서둘러 필립의 손목을 붙잡았다.

“필립, 괜찮아. 아무래도 병증이 심하게 도지신 모양이야, 내가 가서 금방 확인하고 돌아올게.”

“그럼 우리도 같이 가!”

“2황자 전하께선 아드넬 님만 말씀하셨다. 나머지에 대해선 따로 말이 없으셨으니 잠자코 기다리기나 하도록. 가시죠, 아드넬 님.”

“미안해, 두 사람. 다녀올게.”

2황자가 기사까지 보내 찾을 정도라면 상태가 심각한 듯했다.

애초에 다른 선택지도 없긴 하지만, 아드넬은 미안함을 담아 제이든과 필립을 한 번씩 번갈아 쳐다보곤 기사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필립이 허망하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제이든의 눈동자는, 한겨울 빙하보다 차갑게 식어 있었다.

* * *

기사들과 함께 서둘러 별궁으로 돌아온 아드넬은 곧장 테시우스의 침실로 향했다.

대체 얼마나 심각하기에, 거의 뜀박질을 하듯 다급한 발걸음이었다.

그리고 침실 근처에 다다른 순간.

와장창하고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펠릭스 님!”

문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펠릭스가 아드넬을 발견하고 한껏 울상을 지었다.

애초에 이 사달이 난 원인이 아드넬이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만큼은 구세주로 보였다.

“아드넬 님……!”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가려움증을 가라앉히는 화장품은 모두 모나 님께 드렸는데…….”

“그래도 통 가라앉질 않으시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방금 들으신 것처럼…….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잔뜩 겁먹은 얼굴에 아드넬도 순간 두려워졌지만, 2황자의 고통을 잠재워 줄 수 있는 건 저뿐이었다.

아드넬은 얕게 심호흡하며 숨을 가다듬은 뒤 문을 두드렸다.

“2황자 전하, 아드넬입니다.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

노크 뒤엔 다행히도 별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드넬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늘도 그의 침실은 이전에 보았던 것처럼 어두웠다. 시린 달빛만이 열린 테라스를 비출 뿐이었다.

그 미약한 빛에 의지해 둘러본 주변은 암흑 그 자체였으나, 부서진 파편만은 선명히 보였다.

그리고…….

“……설마 술을 드셨습니까?”

부서진 파편에서 나는 술 냄새가 은은하게 코끝에 어렸다.

아드넬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미간을 좁혔다.

‘술은 절대 마시지 말라고 했는데 대체…….’

2황자가 술을 즐겨 마신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병증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부터 자주 찾던 것인데, 술을 마시면 오히려 증상이 악화되어 아드넬은 일찍이 침구를 바꾸고 식단을 바꿀 때 술도 마시지 말라 얘기했었다.

그래서 연회에서도 가벼운 샴페인 한두 잔으로 끝났었고.

그런데 갑자기 냄새만 맡아도 독한 술을 병째로 마시다니, 아드넬은 숨소리가 들리는 침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주한 테시우스는 무척이나 괴롭다는 듯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싼 채 앉아 있었다.

“술을 마시면 되레 더 악화된다고 이미 한 차례 말씀을 드렸는……. 읏!”

그러나 아드넬이 말을 막 꺼낸 그때, 테시우스가 갑자기 손을 뻗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아드넬…….”

나지막한 목소리가 담긴 뜨거운 숨결이 귀를 간지럽혔다.

아드넬은 테시우스에게 온전히 안겨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눈만 끔벅끔벅 감았다 떴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놀라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이 관자놀이에서도 느껴질 정도였다.

“저, 전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어서 놓아주십…….”

“……가지 마라.”

“예? 가긴 제가 어딜 간다는…….”

“제발, 가지 마.”

그리 말하는 음성이 애달프고, 또 간절했다.

테시우스는 아드넬을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어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네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내가 겪고 있는 모든 것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막막해져…….”

“…….”

술에 취한 게 맞나 싶을 만큼 또렷한 발음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의심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놀라고, 당혹스러웠다.

‘병증을…… 말하는 거겠지……?’

그게 아니라면 다른 이유가 있을 리가.

2황자가 남색을 즐기는 것도 아니고, 남자 모습인 지금의 저를 좋아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을 리도 없고.

아드넬은 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애달픔을 억지로 외면했다.

“죄송합니다. 펠릭스 님께 말씀을 드려 괜찮으실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가지 마.”

“……예. 알겠습니다.”

후우, 아드넬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테시우스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아쉽긴 하지만 2황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오죽 힘들면 그럴까 싶었다.

라그랑은 수도에서 이틀을 꼬박 달려야 도착하는 곳이기도 하고, 그사이에 병증이 심하게 도져 저가 만든 화장품으로도 가라앉지 않으면 그저 견디고 참을 수밖에 없던 예전으로 다시 돌아갈 것만 같았을 테니까.

“괜찮습니다. 저도 왔으니 진정하십시오.”

“…….”

다행히도 등을 토닥일수록 거친 숨소리는 차츰 잦아들었다.

그제야 저를 감싼 팔에도 조금 힘이 빠져 아드넬은 테시우스의 가슴팍을 밀어 억지로 벗어났다.

“제가 드린 화장품은 바르셨습니까?”

“……발랐어. 효과는 없었지만…….”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새로 만든 것을 가져오겠습니다.”

그것도 모나에게 맡기긴 했는데 본래 알고 있던 것만 말해서 몰랐던 모양이라 생각하며 아드넬은 서둘러 침실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줄곧 문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펠릭스가 냉큼 다가와 물었다.

“전하께선 좀 괜찮으십니까?”

“예, 저는 새로 만든 화장품을 가져올 테니 펠릭스 님께선 침실의 조명부터 밝혀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아드넬은 도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거의 뜀박질을 하듯 걸음을 옮겨 모나를 찾았다. 그리고 미리 만들어 놓은 화장품을 받은 뒤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펠릭스는 그 짧은 새에 일을 다 처리했는지 조명이 켜져 있는 것은 물론이고 벽에 부딪혀 깨진 병 파편까지 깔끔하게 치워진 상태였다.

“전하……?”

그런데 인기척은 물론이고 돌아오는 대답 또한 없었다.

아드넬이 잠시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욕실에서 솨 하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잖아도 새 화장품을 발라 주기 전에 몸의 열기를 가라앉혀야 하니 씻고 오라 말할 참이었는데 알아서 씻는 모양이었다.

아드넬은 얌전히 응접용 소파에 앉아 테시우스가 나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막상 혼자 남게 되니, 아까 애써 외면했던 목소리와 상황이 다시금 떠오르며 머릿속을 복잡하게 헤집었다.

‘대체 왜 그런 말을 한 거지……. 정말로 병증 때문만일까?’

2황자는 이미 이전에도 오늘 했던 말과 비슷한 말을 했었다.

가지 말고, 곁에 머무르라는.

작위를 줄 테니 시종이 되라는 제안까지 할 만큼.

여태 누구도 치료하지 못한 병을, 그것도 황자를 치료했으니 어찌 보면 마냥 파격적인 제안이라고만은 생각할 수 없지만 치료가 끝나면 아드넬이 더 이상 별궁에 머무를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2황자는 치료가 끝나도 계속 있길 바라는 것 같았다.

문제는 그 이유를 전혀 짐작할 수 없다는 것.

아드넬은 머리를 감싸 매고 고심했지만 끝내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2황자 테시우스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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