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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40)화 (40/141)

40화

“전문 인력을 모집하는 게 아니라 해당 지역의 주민들을 고용해 교육하고 공정에 투입한다면 마냥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야.”

클리프는 그동안 자신이 생각하고 구상한 것들을 찬찬히 설명했다.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아드넬은 묘한 짜릿함과 설렘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게 정말 가능하다면, 제가 지금껏 생각하던 것 그 이상이 되리라.

마침내 이야기가 끝났을 때 아드넬의 볼은 발갛게 상기가 된 채였다.

그건 클리프도 마찬가지였다.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고 주인님께 말씀드릴게요. 고마워요, 클리프.”

“나야말로.”

마침내 아드넬이 이야기를 마치고 사무실에서 나왔을 땐 이미 해가 기울어가는 시각이었다.

그동안 1층 로비에 앉아 따분한 시간을 보내던 두 사람은 아드넬이 계단에서 내려오자마자 벌떡 일어나 그녀를 반겼다.

“얘기는 잘 끝났어?”

“응, 당연하지. 그런데 생각보다 조금 길어져서 시간이…….”

“괜찮아. 아직 저녁때까지 좀 남았고, 오늘 하루는 수도에서 머물고 내일 출발해도 늦지 않아.”

“그럼 3번가! 3번가 노점 거리로 가자! 매일 야시장이 열린다니 오히려 지금 가는 게 딱 좋아!”

차분한 제이든과는 달리, 필립은 무척 허기가 지는 듯 일전에 제육볶음을 먹기 전과 비슷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래도 마차에서 말했던 ‘세실의 특제 꼬치구이’를 꼭 먹고 싶은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지금까지 기다려 준 두 사람에게 퍽 미안했던지라, 아드넬이 낮게 웃으며 답했다.

“그래, 그러자. 나도 궁금했으니까.”

“마차는 돌려보내서 새로 잡아야 할 것 같아. 오늘만 조금 걷고, 내가 내일 아침에 미리 준비해 둘게.”

“고마워, 제이든.”

“어……. 그럼 나는, 어, 무거운 걸 다 들게! 아드넬은 그냥 먹기만 해!”

“필립도 고마워.”

한결같은 두 사람의 반응이 고마우면서도 카르카스에서 살던 때로 돌아간 것 같아 마음이 편안했다.

이런 느낌을 얼마 만에 받아 보는지.

아드넬은 활짝 웃으며 제이든과 필립 사이에 들어가 한쪽씩 팔짱을 꼈다.

일순 제이든은 딱딱하게 경직되었고 필립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헤실 웃었지만, 그들보다 키가 작은 아드넬은 보지 못한 채 씩씩하게 외쳤다.

“그럼 오늘은 내가 다 사는 걸로 하고, 가자! 3번가 노점 거리!”

* * *

한편, 그 시각 별궁 집무실.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서 있는 펠릭스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질 흘러내렸다.

붉은 석양을 뒤로하고 앉은 2황자의 미간이 사정없이 찌푸려진 탓이었다.

“나갔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게, 아드넬 님의 말씀으로는 이미 허락을 받으셨다고…….”

“허락을 하긴 대체 누가!”

저가 얼마나 화났는지를 보여 주기라도 하듯 테시우스가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쾅 하는 요란한 소리에 펠릭스가 움찔 몸을 떨었으나 이미 그에게 펠릭스는 안중에도 없었다.

‘감히 나한테 나간다 직접 고하지도 않고 제멋대로 나가? 누구 마음대로?’

당연하지만 펠릭스는 아드넬이 말한 대로, 그가 공녀를 위한 화장품을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를 구하러 나갔노라 전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테시우스의 기분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황제가 몸져누워 있는 탓에 바스토르는 황태자 책봉을 받은 이후 줄곧 황제 대리로서 일해 왔는데, 황태자비 경합이란 큰 행사가 있는 만큼 업무량도 많아졌다.

혼자 그 모든 일을 처리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그저 도와줄 생각으로 조금 분담해서 하던 오늘, 하필이면.

아드넬이 별궁을 나갔다.

‘난 화장품을 만들어도 좋다 허락했지, 그걸 위해 나가도 된다 허락한 게 아니야.’

기분이 나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드넬은 펠릭스에게 목적지도 말하지 않고 그저 경합 전까지 돌아오겠다고만 했다고 했다.

가뜩이나 비쩍 말라서 얼굴만 예쁘장한 게,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할 줄 알고 겁도 없이 나간 건지.

함께 데려간 두 조수가 있다고는 하나 테시우스의 눈엔 턱도 없는 호위였다.

‘허락? 웃기는 소리……! 다 입에 발린 소리였을 뿐이야.’

맨 처음, 아드넬에게 시종이 되어 곁에 머무르라 말했을 땐 오히려 미안했다.

저조차도 모르겠는 마음을 강요하는 이기심이 부끄러웠다.

그다음 날엔 거절을 들을까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고, 막상 들었을 땐 실망하면서도 동시에 화가 났다.

어떻게든 붙잡아 놓고 싶다는 생각이 일순 이성을 지배할 만큼.

하지만 그때, 아드넬은 말했다.

‘전 2황자 전하의 치료를 위해 온 사람이니만큼 두 영애께 확답을 드리기 전 먼저 허락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화난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되레 기분이 좋아졌다.

올라간 입꼬리가 들킬까 엄지손가락으로 부러 가릴 만큼.

살롱에 투자를 하겠다는 터무니없는 말로 훗날 아드넬이 별궁을 나가도 계속 연을 이어 나갈 수 있게끔.

그러나 모두 말뿐이었다.

저를 위해 온 사람이라 무슨 일을 하든 허락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서. 그럼 별궁을 나가기 전에도 나가도 되느냐 물어봤어야지.

아무 말도 없이, 그것도 자신이 아닌 펠릭스에게만 하고 갔다는 사실이 기가 차서 절로 “허.” 하는 허탈한 소리가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펠릭스.”

“예, 전하.”

가라앉은 목소리가 더없이 무거웠다.

펠릭스는 제발 뭐든 던지지만 말아 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고개를 수그렸다.

그런 그의 머리 위로, 예상치 못한 명령이 내려왔다.

“기사들을 풀어 아드넬을 찾아라. 찾아내기 전까진 절대 돌아오지 말라, 그리 전하도록.”

* * *

수도의 일번가, 비에뉴 거리가 귀족들의 거리라면 3번가는 평민들의 거리였다.

길을 따라 내려갈수록 일번가에선 찾아볼 수조차 없던 쓰레기들이 간간이 눈에 띄었고, 도로의 포장 상태도 점점 열악해졌다.

그러나 아드넬은 단연코, 수도의 명물을 한 가지 꼽아 보라면 이곳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와아……!”

비에뉴 거리를 벗어나 평민 지구로 가는 동안 해는 거의 다 저물었다.

하지만 그 덕에 노점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형형색색 다양한 빛의 조명들이 제 색을 한껏 뽐냈다.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가게 사이로 난 길은 꽤 넓었으나 시장 북새통처럼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들이 자아내는 와글와글한 소음이 되레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복잡하게 섞인 여러 가지 음식 냄새도 불쾌하긴커녕 먹음직스럽게만 느껴져 아드넬은 물론이고 필립 또한 사방을 둘러보며 코를 킁킁댔다.

“어디부터 갈까?”

“세실! 세실의 특제 꼬치 구이집 먼저! 거긴 항상 사람이 많아서 오래 기다려야 한대.”

“그럼 아드넬이 힘들잖아. 구경할 수 있는 날은 오늘뿐인데 그거 하나 먹자고 줄 서서…….”

“어……. 그런가?”

필립이 신난 목소리로 외치자마자 제이든이 기다렸다는 듯 반박했다.

아드넬과 기껏 야시장까지 왔는데 구경은커녕 오래도록 줄만 서 있게 둘 수는 없었다.

필립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곧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내가 가서 기다렸다가 사 올게! 아드넬은 제이든이랑 같이 구경하고 있어!”

“아니야, 같이 가서 기다리면 되지. 그게 뭐 어려운 거라고…….”

“진짜 괜찮아! 그럼 재밌게 구경하고 있어!”

“필립!”

아드넬이 한 번 더 붙잡기도 전에 필립은 쌩하니 야시장 인파 속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저 산만 한 덩치의 사람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경이로운 광경에 아드넬이 살짝 입을 벌린 찰나, 제이든이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우린 천천히 구경하다가 가자. 필립은 신경 쓰지 말고.”

“그래도 혼자서 심심할 텐데…….”

“필립은 음식 냄새만 맡아도 즐거워하는 사람이야. 걱정 안 해도 돼, 자.”

제이든이 아드넬을 향해 손을 내밀자 아드넬도 당연하다는 듯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는 예전에도 종종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이면 아드넬의 손을 잡고 다니곤 했다.

남자 둘이서 손을 잡는다니 얼핏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체격 차이가 원체 커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우애 좋은 형제쯤으로 보였다.

“그런데 너무 많아서 어디부터 가야 할지 모르겠네. 음……. 아, 저기 가판대는 어때?”

“응, 어디든 좋아.”

아드넬이 야시장 안에 있는 가게 하나를 가리키자 제이든은 맞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준 채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곧 가판대 앞에 멈춰 섰는데, 여러 가지 모양과 색으로 만들어진 비누가 한가득 올라가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주인은 아드넬이 가판대 앞에 멈춰 서 비누를 빤히 쳐다보자 냉큼 일어나 씩씩하게 외쳤다.

“어서 오세요, 손님! 나르티의 비누 가게입니다!”

“모양이 다 예쁘네요. 직접 만드신 건가요?”

“그럼요! 이 비누들로 말하자면, 제가 하나하나 직접 틀을 만들어서 붓고 굳힌 것이랍니다! 어디서도 이런 모양은 찾아보실 수 없을 거예요!”

이름이 나르티라고 추정되는 주인은 아드넬과 비슷한 또래의 여자였는데, 과연 그 말마따나 비누의 모양들이 무척 다채로웠다.

새와 다람쥐 같은 귀여운 동물 모양이며 먹음직스러운 케이크 모양이며, 여기에 색도 두세 가지 섞여 있어 알록달록한 느낌이 물씬 들었다.

‘나도 나중엔 이런 모양으로 만들어 볼까.’

2황자를 위한 순한 비누를 만들 땐 원체 할 일이 많으니 가장 기본적인 사각형 모양으로 만들어 굳혔지만, 막상 이렇게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들어진 비누를 보자니 귀엽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다.

“이 몰드, 아니, 틀은 어떻게 만드신 건가요?”

“나무를 파낸 뒤에 조각을 새겨서 만들었답니다. 그래서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나르티의 수제 비누라는 것이죠!”

나르티는 그런 자신이 대견하다는 듯 양 옆구리에 손을 올리며 웃어 보였다.

나이는 저와 비슷해 보이는데 무척 싹싹하고 활기찬 것이 보기 좋아 아드넬은 딱히 필요하진 않지만 비누 하나를 집어 들었다.

얌전히 앉아 있는 고양이 모양의 비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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