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작은 창문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아드넬이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별궁에 올 땐 깜박 잠이 들어 보지 못했는데 제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크고, 높았다.
그동안 살았던 델리움이나 카르카스는 3층을 넘기는 건물이 없었는데 수도 거리의 건물들은 5층짜리 건물이 즐비했다.
길은 깨끗했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하나같이 화려한 복식을 한 채였다.
아무래도 여기가 수도의 일번가, 비에뉴 거리인 모양이었다.
역시나 예상대로 마차는 비에뉴 거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금세 멈췄다.
그리고 마차에서 내린 아드넬은 또 한 번 “와아……!” 하는 탄성을 내뱉었다.
‘클리프가 진짜 떼돈을 벌긴 했나 봐.’
아드넬이 그에게 조만간 수도 본점에서 만났으면 한다는 서신을 보내자 클리프는 비에뉴 거리에 있으니 그곳으로 오면 된다는 답신을 보냈다.
수도에 와 본 적이 없으니 위치도 몰랐는데, 막상 도착해서 보니 그녀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으리으리한 건물이었다.
높이만 무려 7층에 달했고 건물 벽면을 새하얗게 칠해서인지 수수한 듯하지만 깔끔한 이미지가 클리프의 성격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듯했다.
이내 아드넬과 필립, 제이든 세 사람이 문 앞에 다다르자 도어맨이 정중하게 허리를 살짝 굽혀 보이며 물었다.
“카리아 상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무슨 용무로 방문하셨는지요?”
“클리……. 아니, 상단주님을 뵈러 왔습니다.”
아드넬이 미리 꺼내 둔 클리프의 서신을 꺼내 보이자 도어맨은 봉투의 인장을 확인하고 빠르게 문을 열어 주었다.
반면 비에뉴 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에 비하면 무척 초라한 행색임에도 불구하고 도어맨이 정중한 태도로 인사를 하는 모습에 아드넬은 조금 놀랐다.
‘클리프가 직원 교육도 철저하게 했구나. 대단하네.’
역시 상단주도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고 아드넬은 생각하며 성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상회의 1층엔 잠깐 앉아 쉴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가 양옆에, 가운데엔 카운터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번에도 역시나 봉투를 보여 주자 직원이 직접 세 사람을 안내했다.
클리프의 사무실은 독특하게도 7층 꼭대기가 아닌 3층, 건물 중간층에 있었다.
아무래도 계단으로 올라야 하는 만큼 손님을 배려한 듯싶었다.
덕분에 수월하게 올라온 아드넬은 제이든과 필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난 얘기하고 올게.”
“알았어.”
“얘기 잘하고 와, 아드넬!”
이내 아드넬이 문을 가볍게 두드리자 곧 닫힌 문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퍽 오랜만에 만나는 얼굴인지라 아드넬은 반가움을 담아 문손잡이를 돌렸다.
그녀가 사무실에 한 발 들어선 순간, 진한 원목 책상 앞에 앉아 있던 클리프가 고개를 들었다.
“……아드넬!”
“오랜만이에요, 클리프.”
클리프는 아드넬을 발견하자마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다가왔다.
“잘 지낸 거야? 갑자기 별궁에 있다기에 얼마나 놀랐는지, 그리곤 오지도 않고 계속 서신만 보내길래 무슨 일인가 했어.”
“음……. 할 얘기가 많겠네요. 다 설명해 줄게요.”
클리프는 냉큼 고개를 끄덕이곤 아드넬을 사무실 한쪽에 자리한 소파에 앉힌 뒤 직접 다과를 준비해 내왔다.
그가 맞은편에 앉고 나서야 아드넬은 그간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사실 2황자는 라크란 병을 앓고 있으며, 치료가 끝나기 전까진 별궁 밖으로 나갈 수 없단 명을 내려 부득이하게 서신만 보낼 수밖에 없었다고, 그러다 이번에 공작 영애들을 위한 화장품을 만들게 되어 도움을 받으려 찾아왔다는 것 등등.
상대가 클리프이니만큼 아드넬은 모두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그래서 그랬구나……. 나도 처음엔 조금 놀랐거든. 계약도 마무리 지었는데 갑자기 연금술 공방에서 재료를 조달해 달라기에 무슨 일인가 싶었어.”
“앞으로도 계속해 줬으면 해요. 물론 재료비와 수수료는 조만간 별궁에서 처리해 줄 거예요.”
“뭐, 일개 장사꾼도 아니고 황실인데 어련히 알아서 해 줄까. 그보다 이번엔 무슨 도움이 필요하기에 직접 찾아온 거야?”
긴 상황 설명 뒤에야 비로소 본론이 나왔다.
아드넬은 잠깐의 고민 끝에 답했다.
“라그랑 지방에 개발 사업을 진행했으면 해요.”
“개발 사업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예전에 한창 여행을 할 때 들렀던 곳이에요. 다소 척박한 땅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아요.”
아드넬이 ‘아렌’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두 용병과 함께 여행할 때 들렀던 라그랑은 땅 크기에 비해 사는 사람이 별로 없는 영지였다.
델리움과 마찬가지로 따로 영주도 없는 지역이라 작은 마을 하나밖에 없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드넬은 그곳에서 황금보다 귀한 것을 발견했다.
바로 ‘흙’이었다.
“라그랑의 흙은 다른 곳과 달라요. 제가 만들려는 화장품의 필수 재료이기도 하고요.”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봐.”
“쉽게 설명하자면, 유독 영양분이 많은 흙이 있어요.”
아드넬이 말하는 흙이란 다름 아닌 그린 클레이, 핑크 클레이 등의 미용 흙을 말하는 것이었다.
일부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천연의 흙으로 어떠한 화학 처리도 하지 않고 색소나 방부제도 포함하고 있지 않아 천연 화장품을 만들 때 곧잘 쓰이는 재료였다.
이 미용 흙은 미네랄 함유량에 따라 색상이 다른데 피부 톤이 붉은 편이라면 그린 클레이를, 어두운 편이라면 핑크 클레이를 사용하는 등 자신에게 맞는 천연 화장품을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냥 태양에 건조하기만 하면 된다는 거야?”
“네. 물론 불순물은 걸러내야겠지만, 공정은 그리 복잡하지 않아요.”
“그런데 굳이 그것 때문에 개발 사업까지 진행할 필요가 있을까?”
영주가 없는 땅은 황실 소유라 어떤 사업을 진행하려면 반드시 허가가 필요했다.
하지만 허가를 받기까지 걸리는 시간과 절차를 생각하면 여러모로 손해여서, 클리프는 그 흙 하나 때문에 그렇게까지 한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나 아드넬이 그 정도도 생각하지 않고 말할 리가 없었다.
찬란한 바닷빛 눈동자가 이채로 반짝이는 그때였다.
“방법은 있어요.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되는 방법.”
“그게 뭔데?”
“제가 그 땅을 사면 돼요.”
“……아!”
그제야 클리프도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영지 하나를 통째로 사들이는 건 불가능해도 일부 면적을 구매하거나 일정 기간 동안 대여하는 건 서류 몇 장으로도 충분히 가능했다.
허가를 받기까지 걸리는 시간에 비해서도 월등히 짧았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어요. 라그랑에 있는 광산에서 나오는 광물에서도 천연 화장품 재료를 추출할 수 있거든요.”
“허……. 그래,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대체 그걸 어떻게 안 거야?”
클리프는 새삼 놀랍다는 듯 아드넬을 쳐다보며 입을 살짝 벌렸다.
흙과 광물에서 인체에 해가 되지 않는 재료를 얻을 수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가 솔직히 더 궁금했다.
그러나 아드넬의 대답은 언제나 그렇듯, 한결같았다.
“제가 그런 걸 알 방도가 있나요. 다 주인님께서 알려 주신 거죠.”
“아니, 아무리 그래도…….”
“본래 연금술에 지식이 해박하세요. 그저 그걸 화장품과 접목하신 것뿐이죠.”
사실 다 거짓말이지만.
아드넬이 라그랑에서 나오는 흙을 미용 흙으로 쓸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우연의 결실일 뿐이었다.
‘처음으로 목걸이가 빛났어.’
당시만 하더라도 아드넬은 엄마가 남겨 준 목걸이를 매일같이 차고 다녔다.
그러다 여행 중 우연히 들른 라그랑의 광산 근처에 도착하자 일순 목걸이가 반짝 하고 빛났다.
사실 엄마에게 목걸이에 관한 이야기는 얼마 듣지 못했다.
‘마녀의 능력’과 연관이 있는 것에 반응한다는 것, 그 힘을 사용하길 바라는 때에 능력이 발현될 거라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목걸이가 처음으로 반응하며 반짝 빛난 순간, 아드넬은 본능적으로 라그랑에 무언가 있음을 알고 바닥의 흙부터 시작해서 작은 돌멩이, 길거리의 흔한 들꽃 등, 목걸이가 반응한 것이 무엇인지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곧 라그랑의 흙이 전생에서도 사용했던 미용 흙이 나오는, 보석보다 귀한 땅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역시 치료와 관련된 것에 반응하는 거였어.’
어쩌다 마녀에 대한 인식이 그렇게 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간 라그랑에 미용 흙뿐만 아니라 금홍석이 나오는 광산까지 있다는 걸 알게 된 아드넬은 확신했다.
제 꿈을 이루려면 이곳을 반드시 사야 한다는 것을.
아드넬은 문득 허전한 목덜미로 손을 올리려다가 아차 하며 내리곤 태연하게 말했다.
“주인님께서 살롱을 여시려면 그곳에서 나오는 천연 재료들이 반드시 필요해요. 주기적으로, 그리고 꾸준히 공급될 수 있게끔 공정하는 인력과 공방도 필요하고요. 그래서 개발 사업이라고 말씀드린 거예요.”
“……그렇군.”
그런데 클리프의 반응이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원래 같았으면 “당장 그렇게 하자!”하고 호들갑을 떨 법도 한데, 뭔가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그래서일까, 아드넬은 조금 불안해져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물었다.
“제가 생각하지 못한 다른 문제라도 있나요?”
“아니, 그런 건 아니야. 특별히 문제가 될 만한 건 없어. 다만…….”
클리프는 손가락으로 무릎 위를 톡톡 두드리는가 싶더니 곧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의 서류를 가지고 돌아왔다.
아드넬이 ‘갑자기 뭘 보여 주려는 거지?’하고 생각하던 그때였다.
“아직 미완성이긴 하지만, 나중에 보여 주려던 사업 제안서야.”
“사업 제안서라니…….”
예상치도 못한 얘기에 아드넬은 놀라 눈을 크게 뜨면서도 냉큼 클리프가 내민 서류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왔을 즈음엔 더욱 크게 벌어져 있었다.
“정말로, 이게 가능하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