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생각보다 빨리 결정을 내렸군.”
아직까진 무덤덤한 목소리였다.
아드넬은 이어질 반응을 예상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제게 그런……. 큰 포상을 내려 주신다는 건 백번 감사하나 시종이 되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
테시우스는 침묵했다.
그래서인지 아드넬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살피고 싶었으나, 혹시 버럭 화를 낼까 싶어 쉬이 눈을 들 수 없었다.
“……왜 시종이 될 수 없는지 이유를 말해 줄 수 있나.”
그때 테시우스가 예상 밖의 질문을 던졌다.
네까짓 게 뭐라고 거절을 하느냐 하며 화내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알겠노라 받아들이는 것도 아닌, 이유를 물었다.
아드넬은 조금 놀라 저도 모르게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마주한 테시우스는 그 목소리만큼이나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제겐 꿈이 있습니다. 정확히는 제 주인님의 꿈이시지만, 수도에 살롱을 열어 그곳의 지배인으로 일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단순히 그것 하나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물론 다른 이유는 많지만 정체를 숨기고 있는 입장에선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테시우스는 아드넬을 빤히 쳐다보는가 싶더니 곧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래, 그렇다면야.”
“……송구합니다, 전하.”
“그 살롱은 언제 여는 거지?”
“아마도 전하의 치료가 끝나고 나면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갈 것 같습니다.”
“……그렇군.”
그리 답하는 2황자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생각을 방해하고 싶진 않은데, 아직 하나 더 물어볼 것이 남았다.
아드넬은 조금 주저하며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저…….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말해 봐.”
“어제 연회에서, 디아나 반 체스터 공작 영애께서 제게 부탁을 하셨습니다.”
테시우스는 아드넬이 바스토르를 두 공작 사이에서 구해 주고 난 뒤 영애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싶었는데, 갑작스런 간지럼증에 깜박 잊은 것이다.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아드넬이 설명을 덧붙였다.
“자신을 보다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는 화장품을 만들어 달라 하시더군요.”
“영애들이라면 화장품은 이미 차고 넘치게 많을 텐데?”
“아무래도 기존에 가지고 계신 것은 거의 다 쓰신 듯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있는 것보다 더 특별한 걸 바라시는 것 같기도 했고요.”
시중에 나온 화장품은 대부분 피부를 곱게 가꿔 주는 기능성 화장품이었다.
파운데이션이나 섀도우처럼 피부 트러블을 커버해 주거나 화려하게 외모를 바꿀 수 있는 색조 화장품은 아예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굳이 ‘자신을 보다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는’이란 서술을 붙였다는 건 시중에 나온 것보다 좀 더 특별하고 남다른 화장품을 만들어 달란 뜻이 내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적어도 아드넬이 생각하기엔 그랬다.
“하지만 전 2황자 전하의 치료를 위해 온 사람이니만큼 두 영애께 확답을 드리기 전 먼저 허락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허락이라.”
그 말에 테시우스가 한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입꼬리에 머무르길 잠시, 테시우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대신 조건이 있어.”
“……예?”
그러나 ‘조건’이라는 단어에 아드넬의 미간이 일순 좁아졌다.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도 아니고 공녀의 부탁을 받아서 하는 일인데 설마하니 그걸 가지고 조건을 걸 줄은 몰랐던 탓이다.
하지만 2황자는 언제나, 그녀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네 주인이 한다는 살롱, 그곳에 투자를 하고 싶군.”
* * *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투자라니?’
테시우스의 침실에서 나와 복도를 걸어가는 내내, 아드넬은 수수께끼 같은 2황자의 조건을 곱씹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는 제국의 귀부인들이 ‘아실라’가 만든 화장품에 환장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 화장품이 수도의 유행을 주도한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
그럼 당연히 누군가의 투자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했다는 것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그것도 그의 관심사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화장품 사업에 투자를 한다는 건지 아드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물어봐도 대답도 안 해 주고.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어.’
처음엔 듣고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되물어 봤지만 테시우스는 “그런 줄 알고 나가 보도록.” 하며 축객령을 내렸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아드넬은 2황자와 이 이상으로 엮이고 싶지 않았다.
갑작스레 끌려와 치료를 하게 된 건 그렇다 쳐도 어제의 사고로 헛소문까지 난 마당에, 훗날 살롱의 주주 중 한 명이 2황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또다시 이상한 방향으로 사람들이 몰아갈 게 뻔했다.
일부러 작위도 마다하고 시종 일까지 거절했는데 왜 항상 제 뜻대로 흘러가는 법이 없는지, 이쯤 되니 전생에 무슨 큰 죄를 지었나 하고 지난날을 돌이켜 볼 지경이었다.
‘……나도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아드넬은 “후우…….” 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 머리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질 않으니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할 참이었다.
일단 살롱에 투자를 한다는 조건으로 공녀의 화장품을 만들어도 좋다는 확답을 들었으니 본격적인 경합이 시작되기 전 빠르게 재료를 준비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보내야 할 서신도 아주 많았다.
‘우선 별궁부터 나가야 해.’
두 공녀를 위한 화장품, 그것도 ‘보다 아름답게’ 얼굴을 가꿀 수 있는 화장품으로 아드넬은 여러 가지 후보를 꼽았다.
그중에서도 필수로 선정한 것이 두 가지 있었으니, 바로 메이크업 베이스와 블레미시 밤이라고도 하는 비비크림이었다.
‘두 영애 모두 피부는 좋지만 그래도 갑자기 트러블이 생기면 가려 줄 것이 필요해. 피부 톤도 균일하게 맞춰 주고.’
색조 화장품은 그다음의 것이었다.
어차피 섀도우에 들어가는 원재료도 두 화장품에 들어가는 재료와 흡사해서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다만 아드넬이 만들려는 것엔 필수적인 재료가 몇 가지 있었는데 그걸 위해선 별궁을 나가야 했다.
‘……정확히는 핑계지만, 그래도 내 눈으로 보는 게 정확하니까.’
여러 가지 복잡한 일들이 겹치다 보니 가뜩이나 답답한 감금 생활이 좀 힘든 게 아니었다.
게다가 아드넬은 원래 환영 연회가 열리던 날 몰래 별궁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2황자가 자리를 비우니 처음으로 와 본 수도 구경이라도 하려던 것이다.
결론적으론 바스토르의 부탁으로 그럴 수도 없게 됐거니와 안 좋은 일만 더 생겼지만…….
여러 가지 일이 겹친 만큼 핑계를 대서라도 바깥 공기를 쐴 참이었다.
이에 아드넬은 디아나와 율리시아에게 ‘화장품을 만들어 드리겠다.’는 확답을 적은 서신을 보내고 클리프에게도 ‘조만간 수도 본점에서 만났으면 한다.’는 서신 또한 보냈다.
그리곤 제이든과 필립 두 사람과 함께 간단한 짐을 꾸렸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그때그때 사서 쓸 생각이었다.
며칠 뒤, 이른 아침.
2황자도 채 깨지 않은 시각, 아드넬은 시종 펠릭스를 찾아갔다.
“펠릭스 님. 저는 며칠간 별궁을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펠릭스가 눈을 크게 뜨며 놀랐으나 아드넬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이미 2황자 전하께 허락을 받은 일입니다. 두 공녀님을 위한 화장품을 만들어도 좋다 하셨는데, 거기에 필요한 재료를 구하려면 제가 직접 가야 해서요.”
“아…….”
“경합이 시작되기 전까진 돌아올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전하께 필요한 화장품은 모두 모나 님께 전달드렸으니 필요할 때 받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일단 알겠습니다. 그럼 몸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예. 감사합니다.”
이미 2황자가 허락을 한 일이라니 펠릭스는 순순히 대답했다.
아드넬은 그를 향해 살짝 웃어 보이곤 빠르게 몸을 돌렸다.
‘정말 혹시나, 못 가게 할까 봐 당일에 말한 건데 그러길 잘한 것 같아.’
2황자가 저를 별궁 밖으로 내보내지 않을 이유는 없지만 그래도 ‘혹시나’라는 게 있으니 내린 결정이었다.
아드넬은 구름 위를 걷는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마차 보관소로 향했다.
“……아드넬!”
근처에 거의 다다르자 한창 짐을 싣던 필립이 아드넬을 발견하고 밝게 외쳤다.
떠돌이 용병 생활만 십여 년을 한 사람이 졸지에 감금 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오랜만의 외출에 기분이 좋을 법도 했다.
아드넬도 그런 필립을 향해 화답하듯 웃어 보이며 가까이 다가갔다.
“짐은 다 실었어?”
“응. 더 챙길 건 없어. 아드넬 가방은 제이든이 메고 있고.”
“그래, 그럼 가자.”
필립은 냉큼 마차 문을 열어 아드넬이 먼저 타길 기다렸다.
그다음엔 필립이, 다음으론 마부에게 목적지를 설명하던 제이든이 올라탔다.
짐마차라 승차감은 그리 좋지 않았지만 안에 탄 세 사람 모두 밝은 낯이었다.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네! 아드넬이 해 준 음식을 먹는 건 좋지만 바깥에 못 나가니까 숨 막혀서 살 수가 있어야지.”
“나도 간만에 나가니까 좋아. 나온 김에 수도 구경도 조금 하고 가자.”
“그거 좋지! 내가 예전에 들은 건데, 3번가에 있는 노점 거리가 명물이래. 먹을 것 천지라고! 특히 ‘세실의 특제 꼬치구이’는 수도에 들르면 꼭 가야 하는 곳이라고 옛날 동료가 엄청나게 추천하지 뭐야.”
“거기도 가 봐야겠네. 맛있을 것 같아.”
아드넬과 필립이 조잘조잘 대화를 나누는 동안 제이든은 그런 두 사람을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아드넬만 보는 것이었지만.
‘역시 아드넬은 생기 넘칠 때가 제일 귀여워.’
그녀가 심란한 얼굴을 할 때면 제이든은 덩달아 마음이 무겁고 기분이 축 처졌다.
무언가 작은 도움이라도 되고 싶은데 저가 할 수 있는 일이 근래에 전혀 없었다 보니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이렇게 별궁 밖을 나가게 되었으니 지금까지 늘 그랬듯, 안전하게 지켜 주는 것만이라도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세 사람을 태운 마차는 빠르게 별궁을 벗어나 대로에 진입했다.
“……우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