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다만 2황자의 침실에서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는 것이 아무래도 일찌감치 자리를 비운 듯했다.
여기서 아드넬은 모나가 일전에 말했던, 2황자가 대부분의 시간을 연무장에서 보낸다는 말을 떠올리고 우선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론 개인 연무장이라 허락을 받지 않으면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어차피 공녀를 위한 화장품을 만들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기 전엔 따로 할 일도 없어서 일단 가서 기다릴 참이었다.
‘그런데 왜 화낼 것 같지.’
아드넬은 복도를 지나면서도 어젯밤 마주한 2황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는 듯하던 그 거만한 표정.
그래서인지 이렇게 빨리 답을 주는 것도 그렇지만 딱 잘라 거절하면 그가 잔뜩 화를 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어떡해. 시종이 되면 아무것도 못 하는데.’
지금 테시우스는 아드넬에게 있어 그 정도의 사람은 아니었다.
아드넬이 누군가를 위해 저가 꿈꾸던 모든 것들을 다 포기한다면 그건 오직 단 한 사람, 엄마를 위해서일 뿐이었다.
그만큼 아드넬은 아드리아나에 대한 감정이 유독 각별했다. 정확히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엄마는 나 때문에 돌아가셨으니까…….’
그리 생각하지 않으려 해 보아도 죄책감은 시간이 갈수록 더해지기만 할 뿐, 덜해지진 않았다.
매 순간 외면하면서도 물밀듯 몰려오는 후회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엄마가 살아 돌아올 수만 있다면 난 정말로 모든 걸 다 포기할 수 있는데.
그러나 죽은 자는 돌아오지 못한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슬픔의 몫은 떠난 자의 것이 아닌 남겨진 자의 것이었다.
아드넬은 한창 걷다 말고 걸음을 멈춰 섰다.
거울로 본 것도 아닌데 눈시울이 발갛게 물드는 게 느껴졌다.
‘……후, 지금은 울면 안 돼. 당장 급한 일부터 해결하자.’
이런 얼굴을 한 채 2황자를 만나 얘기할 수는 없었다.
아드넬은 손을 들어 옷소매로 대충 눈을 쓱쓱 문지른 뒤 다시 걸음을 옮겼다.
별궁을 나서 테시우스의 전용 연무장 입구에 다다르자 이젠 조금 익숙한 얼굴, 시종 펠릭스가 보였다.
입구 앞에 서 있던 펠릭스 또한 아드넬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드넬 님? 여기까진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2황자 전하를 뵈러 왔습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아드넬이 가까이 다가가자 펠릭스의 눈동자가 더욱 커졌다.
어쩐지 눈가가 발간 것이 꼭 운 것 같은 얼굴이었다.
펠릭스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으나, 곧 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와 정중히 말했다.
“그럼 방문을 고하고 올 테니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예, 물론입니다.”
아드넬은 연무장 입구 옆에 얌전히 두 손을 모으고 섰다.
그러나 그녀가 저도 모르게 코를 한 번 훌쩍인 그때.
펠릭스의 미간이 재차 찌푸려졌다.
‘혹시……. 어제 그 일 때문인가?’
그가 들은 건 ‘어제 연회에서 2황자와 예쁘장한 시종이 벌거벗은 채 테라스에 함께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처음에 들었을 땐 진심으로 기함했지만, 펠릭스는 2황자가 그런 취향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만약 정말 그랬더라면 지금쯤 누굴 만나고도 남았을 테니까.
더구나 2황자는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별궁을 벗어나지도 않았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그의 옆에 붙어 있는 펠릭스로서는 그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다.
자세한 앞뒤 사정은 모르나 아마도 어제 있었던 소동은 사고일 가능성이 제일 컸다.
‘원체 예쁘장한 청년이라 그런 소문이 날 법도 하지만……. 퍽 상처를 받았나 보군.’
이제 갓 스무 살, 성인이 된 지 벌써 2년이나 지난 사람이다.
키도 남자치곤 작고 뼈대도 가는 데다 얼굴까지 예쁜 축에 속하니 어쩌면 그게 하나의 콤플렉스였을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2황자 전하께서도 심기가 영 불편해 보이시던데.’
일단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2황자의 비위를 맞추는 일이었다.
예전보다 훨씬 유순해지긴 했지만 예민할 때의 테시우스는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하지만 방문을 고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펠릭스는 연무장 한가운데서 검을 휘두르는 테시우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2황자 전하.”
“……무슨 일이지?”
가까이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테시우스가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슥 훔쳤다.
펠릭스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드넬 님께서 만남을 청하십니다.”
“아드넬이?”
“예,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테시우스는 조금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썹 사이를 좁혔다.
‘설마 어제 한 말의 대답을…….’
그래도 이렇게 빠르게라니.
당장 대답하라고는 하지 않는다 했지만, 생각은 해 보라고 말했는데.
테시우스는 잠시간의 생각 끝에 곧 고개를 끄덕였다.
“들라 해라.”
“예.”
일단은 만나서 얘기를 나눠 봐야 할 것 같았다.
테시우스의 허락을 받아 낸 펠릭스는 냉큼 몸을 돌려 총총 연무장 입구로 향했다.
터벅터벅하는 발소리에 아드넬이 고개를 돌리자 그가 말했다.
“전하께서 들어와도 좋다 하십니다.”
“감사합니다, 펠릭스 님.”
아드넬은 그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인 뒤 처음으로 2황자의 개인 연무장에 들어갔다.
연무장은 후원과는 다르게 넓은 공터같이 생겨서 멀리서도 대번에 보였는데, 테시우스를 발견한 순간 아드넬은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무예에 통달했다더니 과연…….’
테시우스는 제 몸의 반은 되어 보이는 긴 검을 든 채 훈련 중이었다.
그가 팔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땅에 단단하게 박힌 나무 허수아비가 당장이라도 뽑힐 것처럼 거세게 흔들렸다.
여기저기 패인 허수아비는 검이 아니라 도끼로 찍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상처가 가득했다.
눈으로만 보기에도 한 번 휘두를 때의 힘이 얼마나 압도적으로 강한지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절로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고 보니 곧 무투회도 열리지?’
본디 무투회는 가을에 있는 대표 행사였으나, 2황자가 여덟 살이 되던 해부터 여름의 대표 공식 행사로 자리 잡았다.
무예를 좋아하고 또 즐기는 탓에 여름에 태어난 그의 탄신연과 겸하는 것이다.
무투회가 머지않았으니 저리 하루 종일 연무장에서 훈련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 멍하니 그를 지켜보던 아드넬이 깜짝 놀라며 흠칫 몸을 떨었다.
“……제기랄!”
갑작스런 욕지기와 함께, 테시우스는 바닥에 검을 내팽개치며 한쪽 팔을 부여잡았다.
그리곤 다소 다급한 손길로 바지춤에 손을 넣어 아드넬이 축하 연회에서 줬던 연고 통을 꺼내 팔에 발랐다.
하지만 연고를 바르고도 쉬이 가라앉지 않는지, 테시우스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 이를 악물고 팔을 부여잡고 있었다.
‘……아직도 증상이 심하구나.’
그 모습에 아드넬은 마음 한편이 무척 불편해졌다.
라크란 병에 좋은 화장품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완치는 어려웠다.
아토피를 앓던 전생의 그녀조차도 병원 치료를 동반하고서야 나았으니까.
그러니까 화장품 하나만으로는 불가능한데…….
‘……그렇다고 능력을 보일 수는 없어.’
아드넬은 허전한 목덜미로 손을 올리며 안쪽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 ‘목걸이’를 사용한다면 화장품만으로도 치료할 수 있을지 모른다.
아드넬도 몇 가지 들은 것만 있을 뿐이지만 엄마는 원하는 때에 자연히 알게 될 거라 말했다.
하지만 그랬다가 오래전 숙청된 마녀로 몰리면?
치료해 주려 능력을 쓴 것뿐인데 산 채로 화형이라도 당하면?
‘내가 왜 지금까지 목걸이의 도움 없이 화장품만 만들어 왔는데.’
지난 과거를 들은 이상, 목숨을 걸고 도박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잊고 살았고, 별궁에 온 후로는 ‘목걸이’도 차지 않았다.
그러나 저리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자니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으려는 선택에 죄책감이 들었다.
아드넬은 잠시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곧 테시우스에게로 다가갔다.
사박대는 작은 발소리에 그가 막 고개를 돌린 그때였다.
“……2황자 전하.”
“……아드넬.”
인기척에 정신을 차린 테시우스가 고개를 들어 아드넬을 응시했다.
다만 그는 상의를 완전히 탈의한 채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는 상태였는데, 한창 훈련 중이어서인지 몸의 근육이 크게 부풀어 있었다. 2황자가 벗은 모습은 이미 여러 차례 보았는데도, 흉포한 짐승을 보듯 날 것 그대로의 기운이 이토록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눈이 마주친 순간 아드넬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으나 곧 눈을 살짝 내리깔며 말했다.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
수그린 고개를 올려다보는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테시우스는 아드넬을 잠시간 응시하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내팽개친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침실로 가지.”
“예?”
“이 상태로 얘기하긴 싫군.”
아…….
그제야 아드넬이 작은 탄식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저 같아도, 저렇게 온몸이 땀으로 젖을 정도라면 일단 씻고 싶을 것 같았다.
다행히 2황자의 목소리는 평소와 똑같았다.
심기가 크게 불편하진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아드넬이 그의 뒤를 총총 따랐다.
예상대로 테시우스는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응접용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서 기다려라.”
“예, 전하.”
그가 가운 하나만 든 채 욕실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솨 하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아드넬은 멋쩍은 듯 발을 꼼지락대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주인 없는 방에서 따로 할 일은 없었다.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 또 얼마간 시간이 지나고서야, 물소리가 뚝 끊기며 새하얀 가운을 걸친 테시우스가 나타났다.
물기 어린 흑발을 수건으로 털면서 나오는 그는 역시 아름다웠다.
아드넬은 문득 그를 더는 못 보게 되면 조금 아쉬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 때문에 마음을 바꿀 일은 없겠지만.
“그래서 할 말이 뭐지.”
테시우스가 맞은편 소파에 털썩 앉아 물었다.
아드넬은 조금 긴장해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뒤 답했다.
“어제 말씀하신 것에 대한 제 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