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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36)화 (36/141)

36화

‘대체……. 뭐지?’

늦은 시각, 제 침실로 돌아온 아드넬은 2황자의 침실과 연결된 문을 멍하니 쳐다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명확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오늘 저녁, 연회홀 테라스에서 그 사건이 벌어진 뒤.

어린 영애가 문을 닫아 줬을 때 2황자는 태연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뭐 하나, 다시 바르지 않고.” 하며 제 가슴팍을 톡톡 두드렸었다.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런데 막상 연회가 끝나고 돌아왔을 때는…….

‘내 시종이 되어라. 그리고 내 곁에 머물러.’

일개 시종에게 곁에 머물라 말하는 것도 이상했지만 갑자기 그런 제안을 한 것도 이상했다.

게다가 그는 저가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는지 거만한 얼굴로 긍정적인 답을 기대하마 덧붙였다.

‘……하지만 안 돼. 그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어.’

아드넬의 고운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작위를 준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나, 시종이 된다는 건 앞으로 테시우스에게 종속된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물론 황궁에 출퇴근하는 이들도 더러 있으니 지금 같은 감금 생활은 아닐 테지만 아드넬에겐 꿈이 있었다.

수도에 번듯한 살롱을 짓고, 이유는 듣지 못했지만 원치 않게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아버지를 찾고, 훗날 엄마가 받은 것만큼 큰 사랑을 주는 사람을 만나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꿈이.

그러려면 언젠가는 이 남자 행세를 끝내야 하는 때가 올 텐데 시종이 되면 끝내기는커녕 그녀의 모든 꿈을 이루기가 어려웠다.

‘역시 거절해야겠어.’

제안을 듣고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곧바로 결정을 내려서인지 마음 한쪽이 조금 찝찝했지만, 애당초 이 별궁엔 아드넬이 원해서 오게 된 것도 아니었다.

테시우스는 강제로 그녀를 끌고 왔고, 강제로 치료하게 만들었다.

2황자의 고통은 백번 이해하나 그렇다고 해서 제 인생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일이나 모레……. 아니다, 그냥 만나면 얘기해야지. 시종이 될 생각은 없노라고.’

아드넬은 잠잠한 테시우스의 침실 문을 바라보다 곧 이불 속에 파고 들어갔다.

머리가 복잡해 쉬이 잠들 수 있을진 모르겠으나 부디 잠잘 때만큼은 아무런 상념이 없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 * *

‘내가 왜 그랬지.’

한편 테시우스는 복잡한 얼굴로 미간을 구기며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니까, 테라스에서.

아드넬이 넘어지려던 그때 테시우스는 저도 모르게 팔을 뻗어 그를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자칫 잘못 넘어졌다간 크게 다칠 테니까.

그러한 이유에서 나온 행동일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가 제 가슴팍 위로 엎어졌을 때 테시우스는 문득 생각했다.

‘예쁘다…….’

그래, 예쁘다고.

남자치곤 지나치게 예쁘기도 하지만 가까이서 본 얼굴은 더욱 예뻤다.

당혹감에 하얗게 질린 얼굴조차 귀여웠고, 아드넬의 두 손바닥이 가슴에 닿았을 땐 어쩐지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내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더없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걸 자각하고서야 뒤늦게 손을 놓아주었고, 아무렇지 않게 마저 바르라 말했지만 마음은 폭풍우 치는 바다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8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

어리디어린 아렌을 보고 문득 떠올린 생각.

만약 그가 남자가 아닌 여자였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했던 그때.

테시우스는 부끄러움에 제대로 아렌을 마주할 수도 없었다.

그 어린아이를 보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냐며 자책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아드넬을 퍽 귀엽다고 생각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눈에 들 만큼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두근거리는 가슴의 박동을 선명하게 느꼈다.

‘어쩌면 내가……. 그런 취향인 걸까?’

테시우스는 심란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충격스러웠다.

아마도 그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드넬에게 적당한 작위를 주어 시종으로 두겠다는 생각은 일찍이 했던 것이지만, 오늘 별궁에 돌아와 갑작스레 말한 것은 정말 충동적으로 나온 것이었다.

이대로 손을 놓으면 갑자기 훌훌 날아가 버릴 것 같아서.

아렌이 그러했듯, 제게서 떠날 것 같아서.

그러니 내 곁에 계속 머무르라고.

연인에게나 할 법한 말을 하고 말았다.

‘분명 당황했을 거야. 말을 꺼낸 장본인인 나도 그런데 아드넬은 오죽할까.’

그래서 익숙한 가면을 꺼내 썼다. 감정의 동요를 들키지 않기 위해 사뭇 거만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아드넬이 보였던 난감한 표정을 떠올릴수록 마음은 심란해졌다.

그동안 연무장에서 훈련하며 부대낀 남자만 수십인데 그들에겐 이런 생각을 한 번도 품은 적이 없던지라 그저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웠다. 그동안 옆에 우락부락한 놈들만 있어서 몰랐던 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아드넬처럼 예쁜 남자가 취향이었던 건지…….

테시우스는 복잡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다가올 아침과 마주할 아드넬이 왠지 모르게 두려웠다.

하지만 시간은 언제나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아침이 밝았다.

* * *

아드넬이 어젯밤 잠들었을 적만 하더라도 2황자와 마주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했다.

가려움증이 막 일기 시작할 때나 샤워 후 손이 닿지 않는 부위에 로션을 발라 달라고 찾아오곤 했으니까.

하지만 아드넬의 예상은 정확히 빗나갔다.

정확히는 테시우스가 아닌 하녀들 때문이었다.

“아드넬 님, 그게 사실인가요?”

“어제 연회에서 엄청난 일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정말로, 2황자 전하와 테라스에서…….”

이른 아침, 어제 그 소동이 있고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어디서 듣고 온 건지 하녀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러잖아도 어젯밤 제이든은 어딘가 어두워 보이는 아드넬의 얼굴에 아침이 되면 얘기를 좀 나눠 볼까 했는데, 떼거리로 달려와 아드넬이 나오길 기다리는 그녀들 때문에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

그리고 아드넬은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제 이야기를 기대하는 하녀들의 모습에 막 침실을 나서자마자 진땀을 흘리는 중이었다.

어딘가 다른 걸 기대하는 듯한 눈빛에 난감했지만 여기서 제대로 해명하지 않으면 더 이상한 방향으로 소문이 퍼질 가능성이 컸다.

아드넬은 하녀들의 열렬한 모습에 잠시 땀을 훔치곤 침착하게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일단, 어제 그 일은 사고였습니다.”

“사고라면…….”

“2황자 전하께서 연회 도중 병증이 도지셔 제가 미리 챙겨간 화장품을 발라 드리던 것뿐이었습니다.”

아드넬은 차근차근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급하게 발라 드리느라 휘장을 내리는 걸 깜박했을 뿐이고, 덕분에 사람들이 모두 보게 되었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고.

그제야 하녀들은 “아아…….” 하며 납득했지만 옆에서 듣는 제이든의 얼굴은 시시각각 어두워졌다.

‘또, 그 2황자와…….’

성정이 난폭하다는 소문 그대로 아드넬을 강제로 끌고 온 사람.

자유로운 그녀를 이 별궁에 가두고 제 몸을 치료하라 명한 사람.

그것만으로도 싫은데 이젠 그 2황자와 이상한 소문까지 나게 되었다니.

아드넬이 그와 엮일수록 제이든은 저 혼자 땅속 어딘가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제아무리 박대받는 비운의 황자라 한들 그가 제국에서 네 번째로 고귀한 핏줄이자 황족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

그가 원하면 아드넬을 언제든지, 언제까지고 붙잡아 둘 수 있었다.

제이든은 그게 못내 끔찍하고 두려웠다.

하지만 하녀들이 돌아가고 난 뒤 그는 자신이 정말 두려워하던 이야기를 아드넬에게 직접 듣고 말았다.

“시종을……. 하라 했다고……?”

“응…….”

아드넬은 테시우스가 했던 “내 곁에 계속 머물러.”라는 낯간지러운 말은 빼고, 그가 작위를 줄 테니 시종을 하라 제안했던 내용만을 얘기했다.

물론 제이든은 그것만으로도 큰 충격이었다.

‘아드넬이 시종이 되면…….’

2황자가 놔주기 전까지 남자로 사는 것은 물론이요, 황성을 벗어날 수도 없을뿐더러 그에게 완전히 종속될 것이다.

제이든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자 아드넬이 서둘러 덧붙였다.

“물론 거절할 거야. 물론 작위를 준다는 건 파격적인 제안이지만 여태 평민으로 살아왔는걸. 귀족이라는 신분 때문에 내 꿈을 버리고 싶진 않아.”

“아…….”

그제야 제이든은 한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벌어진 잇새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온 찰나, 아드넬이 말했다.

“그래서 일단 마주치면 곧바로 얘기하려고. 겸사겸사 허락도 받고.”

“허락이라니?”

“아, 깜박하고 말을 안 해 줬네. 어제 체스터 공작 영애가 나한테 부탁을 하나 했거든.”

아드넬이 자초지종을 설명하던 그때, 제이든의 머릿속에 번뜩하고 한 가지가 떠올랐다.

그의 눈이 동그랗게 벌어지자 아드넬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나지? 우리가 한창 여행할 때.”

“하지만 그건 나중에 아드넬이 살롱을 열었을 때…….”

“그러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앞당기는 게 좋겠어. 솔직히 지금 수도의 최대 관심사는 황태자비 경합이잖아. 더구나 두 공작 영애는 사교계의 정점에 서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내 화장품을 써 주면 살롱을 열었을 때 긍정적인 반응이 훨씬 크게 따라올 거야.”

아드넬은 아직까진 살롱을 열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컸다.

생화로 만드는 플로럴 워터는 평민들이 사서 쓰거나 직접 만들어 쓰기에도 전혀 부담이 없지만, 여기서 약간의 첨가물만 들어가도 부담스러운 가격이 되고 만다.

지난번 하녀들의 반응을 보며 평민들도 얼마든지 사서 쓸 수 있는 화장품을 만든다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봤으나 아무리 고민해 봐도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에 공급할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그런 방법이 아예 없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아드넬은 되도록 원래 계획대로 귀족들을 상대로 한 살롱을 열 생각이었다.

“일단 2황자부터 만나서 얘기해야 할 것 같아. 금방 다녀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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