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2황자와 그의 어린 시종이 있던 테라스의 휘장이 내려간 뒤, 장내는 호기심 어린 웅성거림으로 다소 소란스러워졌다.
그도 그럴 게 그동안 2황자가 다른 귀족가 영애와 별다른 소문이 없던 건 그가 앓고 있는 병 때문이라고만 생각한 탓이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단순히 병 때문만이 아니라 취향 문제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비단 저들만은 아니라는 듯 엘튼이 조금 경악한 얼굴로 켈리언에게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전부터 말했잖아, 2황자 전하는 여자한테 통 관심이 없으시다니까? 말할 때마다 아니라고 하더니 역시 내 말이…….”
“난 전하를 믿는다.”
“아니, 이 답답한 형님아! 지금 이 상황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조용히 해. 어디 가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기 퍼트리지 말고.”
“나 아니어도 어차피 조만간 수도에 소문 쫙 퍼질…….”
“네 형 말이 맞다. 2황자 전하에 대해 함부로 입 놀리지 말거라.”
그때 황태자 근처에 머무르던 호르세가 두 아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묵직한 음성에 켈리언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오셨습니까.”
“우리는 대대로 황실을 지켜 온 친위대 가문이다. 가장 가까이서 전하의 신변을 보호해야 할 이들이 그런 소문을 내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어차피 제가 안 해도 다 퍼질 텐데…….”
“아무리 견습 기사라지만 훗날 친위대에 정식 입단할 예비기사라면 오히려 직접 나서 소문을 가라앉힐 생각을 해야지.”
날카로운 지적에 엘튼이 조금 시무룩해진 얼굴로 “예에…….” 하며 작게 대답했다.
그런 제 동생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켈리언이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일단 기사단 내에서 소문이 돌면 내가 알아서 잠재울 테니 너도 입조심하고.”
“알았어.”
“난 잠깐 아버지랑 할 얘기가 있으니 여기서 얌전히 기다려.”
“어? 아니야, 안 그래도 배가 좀 출출하던 참이라! 얘기 다 끝나면 말해.”
그때 엘튼이 눈치 빠르게 총총 자리를 떴다.
그가 어느 정도 멀어지고 나자 켈리언이 호르세 옆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따로 할 얘기는 없는 걸로 아는데, 무슨 일인가 싶어 호르세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 아버지.”
“무슨 일이냐.”
켈리언이 이런 식으로 무게를 잡는 일도 흔치 않아서 호르세 또한 진중하게 바뀐 얼굴로 집중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켈리언은 연신 머뭇거리며 쉬이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어딘가 조금 불편해 보이기도, 또 근심 어린 것 같기도 한 표정에 호르세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할 말이 있으면 빨리하도록 해라.”
“……실은, 아까 그 시종 말입니다…….”
“…….”
그러나 시종이라는 단어에 거짓말처럼, 호르세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 버렸다. 그 시종은 몇 달 전, 자신이 직접 체포해 2황자에게 인도했던 평민이었다.
‘당연히 별궁에서만 지낼 거라 생각했는데.’
2황자의 치료를 맡으러 온 평민이 설마하니, 시종의 유니폼을 입고 시종 행세를 하며 연회까지 따라올 줄은 몰랐던지라 마음이 좀 불편한 게 아니었다.
어째서 저 평민 아이를 볼 때마다 아드리아나가 생각나는 건지 자신도 알 수 없어 더욱 그러했다.
그런 와중에 켈리언이 시종 이야기를 꺼내니 호르세는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그 시종은 왜.”
“저, 그게……. 이건 그냥 제 느낌입니다만.”
여기에 켈리언은 어떤 엄청난 이야기를 할 것처럼 뜸을 들이며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호르세 또한 묘한 긴장감에 움켜쥔 주먹에 살짝 힘을 준 그때였다.
“어쩐지, 엘튼과 닮은 것 같습니다.”
“……뭐?”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호르세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제 눈을 그대로 빼닮은 켈리언의 푸른 호수빛 눈동자가 왠지 모르게 가라앉은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눈에 비친 자신은, 누가 봐도 무척 놀란 듯한 모습이었다.
“물론 머리 색이나 눈동자는 전혀 다르지만……. 가까이서 보니 어딘가 엘튼과 닮은 구석이 있더군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혹시 아버지가 찾던 그분의…… 아니, 선을 넘었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그랬습니다.”
“…….”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그리고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이야기에 호르세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그 자신이 놀란 이유는 다른 누구보다도 그가 제일 잘 알았다.
‘내가……. 저 아이를 보며 아드리아나를 떠올렸으니까.’
처음엔 그저, 그녀의 찬란한 바닷빛 눈동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보기 드문 만큼 오랜만에 마주한 그 눈 때문에 생각이 난 것이라 그리 짐작했다.
그리고 어차피 별궁에서만 지낼 그를 마주할 일은 없으니 더는 그런 생각도 들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오늘, 평민은 올 수 없는 이 연회에 그 평민 아이가 시종의 모습으로 등장했다.
순간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그러나 엘튼을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도저히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깊게 짓누르는 것이 느껴지는데도 움켜쥔 손에 힘을 풀 수 없었다.
‘……3개월. 그래, 3개월이었다.’
아드리아나가 도망치듯 떠난 뒤, 그는 켈리언의 모친인 벨라와 혼인할 수밖에 없었다.
후계를 봐야 한다는 아버지의 강요에 두 아들을 낳았고, 그때 호르세는 벨라가 임신한 지 3개월이 되었을 즈음부터 심하게 입덧을 하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아드리아나를 찾았다.
다시는 당신을 놓치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든 지켜 주겠노라고, 그리 약속했고 또 그럴 생각이었는데.
그녀와 재회한 지 3개월이 된 어느 날, 그녀도 벨라가 임신했을 때처럼 속이 좋지 않다고 했었다.
하지만 뭘 알아채기도 전에 아드리아나는 봄날 아지랑이처럼 사라졌다.
마치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설마.’
호르세의 푸른 눈동자가 휘장이 내려간 테라스로 향했다.
* * *
다소 크게 소문이 날 만한 소란이 지나고 연회가 완전히 끝난 시점에서야 두 사람은 테라스에서 나와 별궁으로 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앞장서 걷는 테시우스의 뒤를 따르는 아드넬의 얼굴은 심란함 그 자체였다.
‘이제 어떡하지…….’
사실 아드넬은 눈에 띄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렸을 땐 위험해서, 다 커서는 무언가를 바라고 접근하는 사람들이 싫어서, 늘 ‘아실라’의 뒤에 숨어 있었다.
하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설마하니 2황자의 은밀한 취향 쪽으로 소문이 날 거라곤 상상도 못 한지라 여간 마음이 불편한 게 아니었다.
안 그래도 오늘 연회 참석으로 얼굴도 다 팔린 마당에 어딜 가나 테시우스의 밀회 상대라며 사람들이 수군대고 힐끔댈 걸 생각하니 정신이 아찔해졌다.
‘내 혼삿길은 완전히 끊겼구나.’
수도에 번듯한 살롱을 세워 떼돈을 번 뒤엔 따듯한 남쪽 지방으로 이사가 그간의 고생을 보상받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래서는 화장품으로 소문이 자자해지는 게 아니라 그쪽 취향으로 소문이 거품처럼 불어날 텐데, 상상만으로도 울적해 아드넬이 울상지었다.
생각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어느새 별궁에 다다랐다는 것조차도 자각하지 못한 채였다.
“……억!”
제 발등만 보고 멍하니 걷던 아드넬은 대뜸 멈춰선 테시우스의 등에 그대로 코를 박고 말았다.
정신줄을 놓고 있던 탓에 또 한 번 비틀거리는 그녀의 팔목을 그가 빠르게 낚아챘다.
“가, 감사합니다.”
“…….”
그런데 테시우스는 어째서인지, 넘어지지 않게 바로 잡아 주고서도 놓아주지 않았다.
아까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전하……?”
의문을 담은 눈동자가 위로 올라갔다.
밤은 깊었고 주변은 고요했으나 청명한 달빛에 얼굴만은 선명하게 보였다.
테시우스는 그런 아드넬을 빤히 응시했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은 건가 하고 생각하던 그때, 오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작위를 주마.”
“예?”
다소 뜬금없는 소리에 아드넬이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작위라니?
아직 치료는 끝나지도 않았고, 여태껏 그런 말은 한 번도 못 들었는데?
이러한 머릿속의 의문이 짙어지기도 전에 테시우스가 덧붙였다.
“적당한 작위를 주고, 수도에 지낼 집도 마련해 주마. 주인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면 자유를 줄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그 부분은 간섭하지 않겠다. 그러니…….”
“…….”
왠지 모를 긴장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드넬은 콩닥거리는 심장 박동을 고스란히 느끼며 테시우스를 멍하니 응시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가 말했다.
“내 시종이 되어라. 그리고 내 곁에 머물러.”
짙은 속눈썹이 달빛과 상반되는 금안을 살짝 덮었지만 눈동자는 정확히 아드넬을 직시하고 있었다.
제 손목을 움켜쥔 손에 이전보다 더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게 무슨 소리야……?’
시종이 되라니?
아니, 그런 뜬금없는 소리는 차치하고서라도…….
‘내 곁에 머무르라니.’
떠나가는 연인을 붙잡듯 간절한 목소리는 아니었으나 문장 자체도 일개 시종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2황자의 본래 성격대로라면 옆에서 보필이나 잘하라 말하고도 남았을 터라 더욱 낯설었다.
아드넬은 저도 모르게 주춤, 뒷걸음질 치며 몸을 뒤로 뺐다.
하지만 테시우스는 붙잡은 팔을 놓아주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도망칠 수도 없게끔, 그는 아드넬을 강하게 붙들고 있었다.
“전하, 저는……. 그러니까, 너무 갑자기라서 뭐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오늘 일 때문은 아니야.”
그때, 아드넬이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하자 테시우스가 잠시간 침묵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그녀가 다시금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을 때 테시우스는 사뭇 거만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치료라는 게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또 완치될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계속 상을 미룰 수도 없으니 하는 말이다. 설마 평민의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게끔 해 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거절하진 않을 테지?”
“아…….”
그 말에 아드넬의 얼굴이 싸하게 식었다.
그럼 그렇지, 웬일로 착하게 말하나 했다.
그제야 조금은 이 뜬금없는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갑작스러운 제안에 곧바로 대답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아드넬이 난감한 얼굴로 쉬이 말문을 열지 못하자 테시우스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며 말했다.
“당장 대답하라고는 하지 않겠어. 그래도 생각은 해 봐. 그럼 긍정적인 답, 기대하지.”
“예, 예……. 그러겠습니다.”
“이만 들어가 보도록.”
그제야 손목을 움켜쥔 큰 손이 스르륵 풀렸다.
테시우스는 그대로 몸을 돌려 별궁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멀어지는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후에도, 아드넬은 어딘가 멍한 얼굴로 아직 온기가 남은 제 손목을 감싼 채 서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