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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34)화 (34/141)

34화

일순 디아나의 동공이 조금 커졌지만 순한 눈매는 금세 부드럽게 휘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오히려 이 시종조차 헤아린 점을 제가 미처 생각지 못했으니 하르트 영애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려야겠네요.”

“죄송하다니요. 저야말로 너그러우신 처사에 감사드립니다.”

어느새 율리시아의 얼굴에도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드넬은 이 훈훈한 광경에 놀람과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황태자여도 못 고르겠어.’

어쩜 둘 다 하나같이 이렇게 착하고 예의 바른지, 태어나자마자 떠받듦을 받고 산 귀한 공작가 영애들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저는 이만 2황자 전하께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되도록 바라던 소식을 들려줬으면 좋겠네요.”

“예, 그럼.”

마지막까지 완벽한 예의를 갖추며 인사한 아드넬은 두 공작 영애를 뒤로하고 총총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이보다 더 가벼울 수 없을 만큼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그러나 이는 오래 가지 않았다.

아드넬이 테시우스가 있는 연회홀 구석진 자리에 도착한 그때, 바닷빛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전하?”

“아, 왔나.”

걱정스러운 눈동자가 아드넬을 향하며 테시우스 대신 답했다.

다름 아닌 바스토르였다.

무슨 일이지?

좀 더 가까이 다가가니, 테시우스가 이를 악문 채 팔을 부여잡고 있었다.

“설마……. 간지럼증이 또 도지신 겁니까?”

“그래,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아드넬이 두 공작 영애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테시우스는 바스토르와 함께 있었다.

별 건 없지만 최대한 시간을 끌어볼 생각으로 의미 없는 잡담을 나누던 중이었는데 대뜸 가려움증이 일었다.

한동안 잠잠하다 했건만, 이렇게 참기 힘든 가려움증은 아드넬이 처음 스킨을 발라 준 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이만 별궁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듯한데…….”

“……돌아가면, 또 얼마나 수군거리겠어. 괜찮아.”

말은 괜찮다는데 표정은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자리를 뜨는 건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초대를 받아 연회에 참석한 이상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끝까지 자리를 지켜야 한다.

이제 막 예절 교육을 시작한 귀족가 자제들도 알 만큼 기본 중의 기본인 예법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법도를 다른 사람도 아닌 2황자가 어긴다니 그건 아니 될 말이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헤아려 주지 않으니까.’

바스토르나 아드넬이야 그의 사정을 백번 이해할 테지만 다른 귀족들은 아니었다.

테시우스도 일부러 모른척하긴 하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두고 수군거릴 또 하나의 빌미를 더 주고 싶진 않았다.

그러던 그때.

“진작 말씀하시지 그러셨습니까.”

“……뭐?”

“여기, 제가 미리 챙겨 온 게 있어서요.”

아드넬이 주머니에서 작은 연고 통 하나를 불쑥 꺼냈다.

예전에 만든 천연 상처 연고와 똑같은 통이었지만 외관만 다를 뿐, 안에 들어 있는 건 전혀 다른 화장품이었다.

바로 아토 밤이었다.

“스킨은 늘 프리지 안에 넣어 둬야 해서 상온에서도 보관할 수 있는 화장품을 하나 더 만들었습니다. 바르시면 발진과 가려움증이 가라앉을 겁니다.”

아토 밤은 아토피 피부에 좋은 재료들을 딱딱한 연고 타입으로 만든 것으로, 카멜리아 스킨과는 달리 휴대하기가 편한 화장품이었다.

진작 만들어 놓고도 시종 교육 때문에 잊고 있다가 오늘 정말, 혹시나 해서 챙긴 건데 이걸 이렇게 써먹게 될 줄은 그녀도 몰랐다.

아드넬의 손에 들린 연고 통에 테시우스는 거의 구세주를 보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요?”

“테라스로 가면 된다. 휘장을 내리면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뜻이니 아무도 들어오지 않을 거야.”

“그럼 그리로 가시죠. 일단 발라 봐야 효과가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대로 자리를 옮기면 바스토르는 어김없이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일 테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두 사람을 보내 주는 수밖에 없었다.

테시우스는 가려움증을 참느라 조금 달아오른 얼굴을 한 채, 아드넬과 함께 테라스로 향했다.

다행히 분위기가 조금 무르익어서인지 두 사람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이윽고 도착한 테라스는 외부로 돌출된 모양새로, 양옆이 벽으로 가로막힌 대신 앞쪽은 뻥 뚫린 난간만이 있어 황궁 후원이 한 눈에 들여다보였다.

난간 앞엔 널찍한 소파와 작은 테이블이, 그 위엔 재떨이가 하나 놓여 있었다.

하지만 아드넬이 유리로 된 문을 닫자마자 테시우스가 참기 힘들다는 듯 신음을 흘렸다.

“일단 옷부터 벗으십시오.”

아드넬은 서둘러 아토 밤을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잖아도 몸을 꽉 조이는 예복을 당장 북북 찢어 벗어던지고 싶은 심정이었기에 테시우스는 대답 대신 단추부터 풀고 보았다.

그런데 겹겹이 고정된 단추가 뭐 이리 많은지 빨리 풀고 싶어도 잘 풀리지가 않았다.

“……젠장!”

“너무 성급하셔서 그런 겁니다. 제가 해 드리겠습니다.”

아드넬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테시우스에게 다가갔다.

작은 연고 통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느다란 손가락이 가슴께에 닿았다.

단추를 푸는 손길은 아주 느리지도 않았지만 아주 빠르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아드넬이 덧붙였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단 마음을 가라앉히시면 가려움증도 조금 가라앉을 겁니다.”

“…….”

그거야 말이 쉽지, 저가 나처럼 간지러우면 어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아나?

그래도 여태껏 아드넬의 말을 들어서 손해 본 게 없는지라 테시우스는 속으로만 생각하고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대신 제 단추를 푸는 아드넬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나저나 무슨 남자애 손이 이렇게 가늘고 하얗담.’

자신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다른 시종이나 하인들과 비교해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남자들과 다르게 훨씬 가늘었다.

머리만 길면 여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예쁘장하게 생긴 걸로도 모자라서 손가락까지 이렇게 가늘다니, 이쯤 되니 진짜 남자가 맞긴 한가 싶었다.

‘그러고 보니 수염도 안 나는 것 같아.’

그는 지금껏 아드넬의 턱에 상처가 난 모습은 한 번도 못 봤다.

상처는커녕 거뭇하지도 않고 솜털만 보송보송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영락없는 소년의 것인 데다 가슴은 납작하다.

그걸 생각하면 여자는 또 아닌 것 같아 헷갈렸다.

‘……그런데 내가 왜 그딴 걸 고민하고 있지? 이놈이 나한테 뭐라고?’

테시우스는 대뜸 눈썹을 찌푸리며 어느새 예복 안의 셔츠 단추를 풀어 내려가는 아드넬의 머리통을 응시했다.

한편 아드넬은 셔츠의 단추를 다 푼 뒤 벗겼는데, 완벽한 상의 탈의는 아무래도 조금 신경이 쓰여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그의 어깨 위로 외투를 걸쳐 주었다.

그리곤 테시우스가 내민 팔의 접힌 부위 위로 아토 밤을 부드럽게 발라 주었다.

‘그나저나 정말 언제봐도 질리지가 않네.’

2황자의 벗은 몸을 본 게 한두 번도 아닌데 볼 때마다 은근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떡 벌어진 어깨 아래 숨 쉴 때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팍이며 복근이며 어디 하나 못난 곳이 없었다.

이러다간 이 몸에 너무 익숙해져 다른 남자들이 쭉정이로 보일까 걱정된다고, 그리 생각하던 그때였다.

“어……!”

등 뒤로 철컥하는, 누가 들어도 명백한 문손잡이가 아래로 내려가며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드넬은 깜짝 놀란 나머지 황급히 몸을 돌렸다.

휘장을 내렸어야 했는데, 2황자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깜박 잊고 내리질 않은 것이다.

하지만 급한 마음에 생각만 앞서서인지 몸을 돌려 일어나는 순간 발이 꼬였다.

일순 아드넬이 휘청이자 테시우스는 저도 모르게 팔을 뻗어 손목을 낚아채 그녀를 제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테라스의 문이 활짝 열렸다.

* * *

“…….”

잔잔한 노랫소리 위로 무거운 정적이 깔렸다.

기다란 소파 위로 상의를 완전히 탈의한 채 누워 있는 2황자와, 그런 그의 가슴께에 두 손을 올리고 엎어져 있는 예쁘장한 시종.

그 두 사람을 지켜보는 한 영애의 뒤로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몰렸다.

걱정이 되어 일부러 테라스 근처에 와 있던 바스토르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고, 그 주변에 몰려 있던 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입을 가린 채 쳐다보고 있었다.

“어……. 이건, 그러니까…….”

너무 당황해서인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드넬은 황급히 일어나려 했으나 어째서인지 2황자가 손에 힘을 풀지 않아서 그마저도 어려웠다.

그녀가 지진이라도 난 듯 떨리는 눈으로 쳐다보고서야 테시우스는 “아.” 하며 힘을 풀고 놓아주었다.

그제야 뒤늦게 변명하려 했으나, 바스토르가 먼저 선수를 쳤다.

“……이만 문을 닫아 주겠나, 영애.”

“예, 예……! 황태자 전하.”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멍하니 서 있던 어린 영애가 그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문을 닫았다.

그리고 아드넬이 미처 내리지 못한, 휘장도 내렸다.

‘제기랄…….’

아드넬은 속으로 욕지기를 중얼거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하필이면, 딱 이런 타이밍에!

이번 일로 어떻게 소문이 날지 꼭 눈으로 보는 것처럼 머릿속에 선명히 그려졌다.

지금껏 다른 귀족 영애와 일절 소문이 없던 그 2황자가 벌거벗은 채 어린 시종과 테라스에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어차피 남장한 상태긴 하지만, 그래도 테시우스와 은밀한 소문이 나는 건 싫었다.

하지만 심란한 건 그녀뿐이었다.

절망에 빠진 아드넬을 향해 테시우스가 말했다.

“……뭐 하나, 다시 바르지 않고.”

“예……?”

“아직 가려움증이 가라앉지 않았어. 그러니까.”

테시우스는 태연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제 가슴팍을 톡톡 두드렸다.

어떻게, 이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지.

‘진짜 남색을 즐기나?’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럴 수가.

아드넬은 놀란 나머지 입을 살짝 벌렸으나 테시우스는 오히려 그녀를 채근했다.

결국 아드넬은 하는 수 없이 다시금 아토 밤을 발라 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저를 빤히 응시하는 테시우스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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