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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33)화 (33/141)

33화

테시우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일말의 관심도 없는 아드넬은 바스토르를 살피기 바빴다.

그러다 황태자가 제일 피하고 싶은 사람인 길리엄 공작과 케르페온 공작이 그에게 다가가는 걸 발견한 순간, 반짝하고 눈을 빛냈다.

바스토르의 주위를 감싸고 있던 사람들은 두 공작을 발견하자마자 우르르 자리를 피했다.

그렇게 주위가 한산해지니 길리엄 공작과 케르페온 공작은 담소를 나누는 듯하면서도 저마다 제 딸을 향해 손짓했다.

얼마 뒤 황태자는 가장 부담스러운 네 사람 사이에 끼게 되었다.

물론 지금 당장 찾아갈 생각은 없었다.

테시우스 핑계를 대며 구해 줄 수 있는 기회는 기껏해야 한두 번 정도니까.

하지만 바스토르의 얼굴이 시시각각 굳어가며 억지 미소가 흔들린 순간.

‘지금이야!’

아드넬은 주먹을 불끈 쥐며 테시우스에게 보고했다.

“저 잠시만 다녀오겠습니다!”

“어딜?”

“그야 당연히 황태자 전하께 다녀오지요.”

“아…….”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아드넬은 어깨에 단단히 힘을 준 채 연회홀 중앙을 빙 둘러 걸어갔다.

몇몇 어린 영애들과 본궁의 시종, 시녀들이 저를 힐끔댔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바스토르와 가까워질수록 길리엄 공작과 케르페온 공작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원체 성정이 온화하신 분이니 자연히 햇살처럼 따듯한 제 딸에게 끌리시는 게지요. 그러니 먼저 춤을 청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럴 리가요, 두 사람과 동시에 춤을 출 수는 없는 법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때마침 체스터 영애와 가까우니 고르신 겁니다.”

“허, 하르트 공작께서 그런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는 분이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반대로 전하께서 우리 율리시아와 첫 춤을 추셨다면 체스터 공작이야말로 저와 같은 소리를 하셨을 것 같습니다만?”

아드넬이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유치하면서 고상한 말다툼이었다.

바스토르는 시작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질린 얼굴이었으며, 제 아버지 옆에 붙어 있는 두 영애는 얌전히 눈을 내리깐 채 그저 듣고만 있었다.

‘음. 영웅이 등장하기 딱 좋은 타이밍이야.’

아드넬은 속으로 웃어 보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마침 작은 한숨을 내쉬던 바스토르는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순간 화색을 띠었다.

아드넬을 굳이 연회에 부른 건 가까이서 지켜보기 위함이었는데, 막상 부르고 보니 그러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드넬이 등장했다.

“말을 끊어 송구합니다만 두 분 각하, 황태자 전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아렌의 말에 길리엄 공작이 눈살을 찌푸리며 끝이 올라간 콧수염을 만지작거렸다.

“넌 누구냐? 보아하니 시종 같은데…….”

“2황자 전하의 전속 시종입니다. 전하께서 황태자 전하를 급히 찾으십니다.”

그 말을 끝으로 아드넬은 바스토르에게 다가가 입가를 한쪽 손으로 가리고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원하시던 때가 맞으신지요?”

“정확하다마다.”

바스토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길리엄과 케르페온에게 말했다.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할 듯하니 두 분 공작은 편히 말씀 나누시게.”

“……예, 전하.”

두 사람은 마지못해 대답하며 탐탁잖은 눈으로 아드넬을 응시했다.

이내 황태자는 테시우스가 있는 곳으로, 길리엄과 케르페온은 바스토르가 없으면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다는 듯 양방향으로 갈라졌다.

아드넬도 당연히 원래 저가 있던 자리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 낭랑하고 청초한 목소리가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혹시 2황자 전하의 병을 치료하신다는 분이신가요?”

아드넬이 가려다 말고 몸을 돌리자 디아나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듣자 하니 빈민가의 아이들도 치료하셨다지요?”

“그걸 어떻게…….”

“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셨답니다.”

벌써 그렇게 소문이 났다고?

하지만 오늘 막 도착했을 때의 반응을 보면 사람들은 딱히 테시우스에게 관심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그냥 자기들끼리 안줏거리로 속닥대는 정도라고나 할까.

‘자세한 별궁 사정을 캐물을 정도의 관심은 아니었단 말이지.’

그럼 뒷조사를 한 건가?

시종으로 둔갑한 제 얼굴을 대번에 알아볼 정도면 그게 제일 유력했다.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었지만 아드넬은 최대한 표정을 관리하며 침착하게 대꾸했다.

“예, 제가 2황자 전하의 치료를 돕고 있습니다.”

“그런데 화장품을 만든다던데 정말 그걸로 치료가 가능한가요?”

아드넬에게 묻는 디아나의 얼굴은 순수하게 ‘궁금해서 그래요.’라 적혀 있는 듯했다.

말은 하지 않지만 율리시아도 이쪽을 힐끔대고 있었다.

그러나 자고로 사람이란 같은 관심사에 끌리는 법이다.

디아나가 제 주 분야를 콕 집어 얘기한 순간 아드넬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공녀님께서 궁금하시다니 조금 말씀드리자면 먼저 여러 가지 생활 규칙을 필수적으로 지켜야 합니다. 먹는 음식도, 평소 입는 옷도, 몸에 닿는 침구도 하나하나 다 신경을 써야 하지요. 화장품은 이후의 것으로, 가려움증을 가라앉혀 주는 화장수를 사용하고 흉터에 좋은 연고를 바르며 상처를 차츰 아물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

물꼬라도 터진 듯 줄줄이 말이 이어지자 디아나는 잠시 멍하니 아드넬을 쳐다보더니 이내 종달새처럼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에 아드넬이 조금 당황하자 디아나가 말했다.

“미안해요. 열렬히 설명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그만.”

“아, 아닙니다. 저야말로……. 순간 들떠서 말을 너무 많이 한 것 같습니다.”

“아니에요. 사실 저는 아드넬 님께 관심이 무척 많거든요.”

디아나가 눈을 반달 모양으로 휘며 가까이 다가왔다.

아드넬은 그 와중에 ‘내 이름도 알아? 심지어 존칭을 써?’ 하는 생각이었다.

“개인적으로 드리고 싶은 부탁도 있고요.”

“그게 무슨…….”

그녀가 고개를 살짝 낮추자 디아나가 작게 말했다.

“제게 화장품을 만들어 주세요. 나를 더욱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는, 그런 화장품을요.”

“어…….”

예상치 못한 부탁에 아드넬은 순간 벙찌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게 디아나 정도의 위치에 있는 영애라면 화장품은 이미 많이 가지고 있을 테니까.

그때 궁금증을 풀어 주듯 디아나가 덧붙였다.

“황후 폐하께서 쓰시는 화장품을 공급하는 분이 더는 거래하지 않는다 들었어요. 대신 살롱을 준비한다는 이야기도요.”

“아……. 예, 맞습니다.”

“하지만 언제 완공될지도 모르고, 그때까지 기다렸다간 경합이 완전히 끝날 것 같더군요.”

에둘러 말하긴 하지만 아드넬은 디아나가 무엇을 말하는지 금세 파악했다.

대충 네 주인인 ‘아실라’는 지금 화장품을 만들지 않고 있으니 대신 만들어 줄 수 있겠냐는 내용이었다.

‘문제는 2황자인데.’

만들어 주는 거야 충분한 대가만 있다면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지만 지금 아드넬은 본의 아니게 2황자에게 속해 있는 상태였다.

그러니까 다른 누군가를 위한 화장품을 만드는 시간을 할애하는 일조차 그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이건 기회야.’

아드넬은 그동안 여러 가지 화장품을 만들긴 했으나 메이크업, 그러니까 색조 화장품은 만들지 않았다.

훗날 살롱을 열면 내보일 생각으로 아껴두던 것인데, 여기서 시제품을 만들어 사교계의 정점에 서 있는 공작 영애를 모델로 삼는다면 처음엔 꺼리던 사람들도 너 나 할 것 없이 갖고 싶어 할 터였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2황자에게 허락을 받아 내야만 했다.

“제게 화장품을 만들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때 아드넬이 생각에 잠겨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디아나가 다시금 물어 왔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아드넬이 냉큼 고개를 숙여 보였다.

“송구합니다, 조금 놀란 나머지……. 다만 이 사안은 제 독단으로 결정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2황자 전하의 치료가 시급한지라…….”

“물론이에요. 대답은 언제까지 기다리면 될까요?”

“이른 시일 내에 여쭙고 허락을 받은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효과가 좋다면 보답은 톡톡히 하겠어요.”

“보답이라면 제가 해 드리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우신 레이디께서 흔쾌히 써 주신다니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수고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르는 법인걸요. 혹 원하는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말해도 좋아요.”

맙소사, 완전 착하잖아!

착한 얼굴로 나쁜 짓을 하는 사람, 차가운 듯하나 속은 따듯한 사람은 소설에서 숱하게 봤지만 디아나는 착한 얼굴에 착한 사람인 게 분명했다.

역시 사람은 겪어 봐야 안다며 생각하던 바로 그때.

‘잠깐만……. 한쪽만 만들어 줬다가는 여러모로 피곤해질 텐데?’

지금 두 공작 영애는 경쟁하는 상황에 놓여 있고, 한쪽에게만 만들어 줬다가는 본의 아니게 편 가르기를 하는 상황까지 찾아올지도 몰랐다.

그런 피곤한 일은 절대 사양이었다.

아드넬이 냉큼 덧붙였다.

“정 보답해 주시겠다면……. 너그러우신 공녀님께 한 가지 청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편히 말하세요.”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 끝에, 아드넬이 지금껏 한마디도 하지 않은 율리시아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은회색으로 빛나는 눈동자와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율리시아 반 하르트 공녀님께도 마찬가지로 화장품을 만들어드려도 될는지요?”

“아…….”

생각지도 못한 부탁에 디아나가 율리시아를 쳐다보았다.

놀라기로는 당사자도 마찬가지인지 율리시아가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아드넬에게 다가왔다.

“어째서 내게도 만들어 주겠다 하는 건지 이유를 말해 주겠나요.”

“자고로 경합이란 동등한 조건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체스터 공녀님께서 제 화장품을 쓰시게 되면, 물론 지금도 충분히 아름다우시지만 그 배로 아름다워지실 겁니다. 다른 때라면 신경 쓰지 않았겠으나 지금은 경합을 위해 황궁에 들어오신 만큼, 공평성을 위해서라도 두 분 공녀님께 모두 만들어드리는 것이 옳다 생각됩니다.”

“…….”

아드넬의 말에 율리시아는 잠시 생각에 잠겨 아버지의 서늘한 눈빛과 황태자 바스토르를 떠올렸다.

‘딱히 마음을 얻고 싶진 않지만…….’

금세 생각을 마친 율리시아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합당한 이유라고 생각되는군요. 그러나 그건 내가 결정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하니…….”

그녀의 시선이 디아나를 향했다.

“디아나 반 체스터 영애, 전 영애의 선택을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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