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홀을 울리는 외침에 아드넬은 자연스레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아버지와 팔짱을 끼고 들어오는 두 공작 영애를 보는 순간, 그녀는 하녀들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강아지 같은 순한 눈매는 체스터 가문, 고양이처럼 뾰족한 눈매는 하르트 가문입니다.’
과연 그 말대로였다.
체스터 공작 영애는 물론이고 아버지인 길리암 반 체스터 또한 강아지같이 처진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그 순한 인상에 어울리는 다정하고 따듯한 미소가 디아나의 입가에 걸려 있었다.
화사한 봄꽃처럼 사랑스러운 연노랑빛 드레스가 조신한 걸음걸이에 맞추어 흔들렸다.
머리는 흔한 갈색이었지만 보기 좋게 윤기가 흘렀고, 틀어 올린 머리에서 삐져나온 잔머리가 여린 목덜미를 살짝 덮었다.
반면 하르트 공작 영애와 케르페온 반 하르트 공작은 고양이 같은 눈매를 가지고 있었는데 보는 순간 ‘사납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테시우스의 치켜 올라간 눈매와 비슷했지만 느낌은 달랐다.
어딘가 조금 더 서늘하고, 차가운 느낌이랄까.
케르페온 공작이 유독 서슬 퍼런 분위기를 풍겼다.
하지만 율리시아는 눈매는 날카로워도 다소 정적이고 차분한 호수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얼굴 위에 떠오른 미소는 없어도 표정은 고요하고 잔잔했으며, 비단처럼 흘러내린 남빛 머리칼이 물결처럼 출렁였다.
몸에 딱 맞게 재단된 은빛 드레스는 다이아몬드를 갈아서 뿌린 것처럼 찬란하게 반짝였는데 그녀가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고귀한 성녀, 혹은 여신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렇게 두 영애가 앞으로 나아가 연회홀 안쪽 단상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몸을 낮추자 시종장이 기다렸다는 듯 외쳤다.
“바스토르 폰 아이테라 황태자 전하께서 드십니다!”
그 외침에 두 공작은 물론이고 다른 귀족들도 모두 머리를 낮추었다.
테시우스는 고개만 살짝 숙인 채로, 멍하니 바라만보는 아드넬의 뒤통수를 잡아 눌렀다.
그때 본성과 연회홀을 연결하는 문이 열리며 예복을 차려입은 바스토르가 나타났다.
테시우스의 것처럼 단추나 자수는 모두 금색이었으나 다른 점이라면 그의 예복은 눈처럼 새하얀 흰색이었고, 어깨 위엔 황실 문양이 새겨진 붉은색 털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황제만이 입을 수 있는 것으로 황제 대리임을 말해 주는 복식이기도 했다.
바스토르는 무표정한 얼굴로 계단을 내려와 단상 위의 빈 황좌에 앉았다.
그가 팔걸이에 양팔을 올리며 검지를 위로 한 번 까딱이자 단상 옆에 서 있던 시종장이 다시 한번 외쳤다.
“모두 고개를 드십시오!”
그제야 뒤통수를 짓누르던 힘이 사라졌다.
아드넬은 자동으로 고개를 들며 조금 멀긴 하지만 똑똑히 보이는, 저가 일전에 보았던 표정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바스토르를 응시했다.
장난기도, 웃음기도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은 무표정 그 자체였으나 그렇다고 아주 진지하지도, 마냥 가볍지도 않았다.
굳이 표현하자면 한 마리의 사자처럼 다분히 여유롭고 권태롭다고나 할까.
그러면서도 동시에 위압감이 느껴졌다.
맨 처음 별궁에 끌려왔을 때 테시우스가 했던 말 한마디에 느꼈던 그 위압감과 같았으나 그보다 더 무거웠다.
‘역시 황제는 타고나는 건가 봐…….’
저더러 연기라 생각하고 해 보라 하더라도 절대 못 할 것 같은데.
그냥 태생이 다르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내 두 공녀가 일어나며 동시에 말했다.
“제국의 하늘을 수호하는 고귀한 검이자 방패이시며, 제국의 땅을 비추는 지고한 별이신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디아나 반 체스터입니다.”
“율리시아 반 하르트입니다.”
미리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인사말이 끝나자 디아나가 먼저 이름을 말하고 그 뒤를 따라 율리시아가 말했다.
그 둘을 빤히 쳐다보던 바스토르는 시종이 내민 왕홀을 짚고 일어섰다.
정중앙에 박힌 주먹만 한 루비를 작은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가 둘러싸듯 감싼 왕홀은 황제의 상징이자 제국의 보물이었다.
“두 영애의 입성을 진심으로 축하하는바, 이리 연회를 열게 되었네. 앞으로 시작될 경합이 녹록지는 않겠지만 모쪼록 현명히 헤쳐 나가길 바라네.”
“황송합니다, 전하.”
“그럼 모두들 두 공녀의 입성 축하 연회를 편히 즐기도록.”
바스토르의 말이 끝나며 그가 자리에 앉자 악단이 잠시 멈췄던 연주를 다시 시작했다.
두 영애 또한 양쪽으로 갈라져 자연스레 귀족들 무리에 속하기 시작했다.
그때 테시우스가 지나치던 시종을 세워 무심코 샴페인 잔 두 개를 들었다가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시 하나를 내려놓았다.
“경합이라니, 그런 게 있습니까?”
시종이 다시금 제 할 일을 하러 떠나자 아드넬이 테시우스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냥 축하 연회인 줄로만 알았지, 경합이 있었는지는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그 질문에 테시우스가 무심한 얼굴로 샴페인을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있다마다. 두 공녀의 자질을 시험하는 일종의 대결이다. 승자는 황태자비로, 훗날 황태자 전하께서 황좌에 오르는 순간 황후로 들어오게 된다.”
“경쟁이 치열하겠군요.”
“그러니 너까지 불렀겠지.”
바스토르는 정쟁을 싫어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다소 온화하고 다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렇다고 마냥 착하기만 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어떨 때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목을 치라 명하기도 하니까.
때론 냉철하고, 때론 일말의 자비도 베풀지 않는, 언뜻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는 사람 같지만 바스토르는 오직 제국과 제국민을 위해 필요할 때만 그런 결정을 내렸다.
모두가 그를 성군의 재목이라 칭송했고, 그리 생각하는 건 테시우스도 마찬가지였다.
일찍이 바스토르를 위해 후계자 수업을 포기했지만 몇 번을 생각해도 그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뒤 연주가 바뀌면 황태자 전하께서 두 공녀 중 한 명과 먼저 춤을 시작할 텐데 귀족들은 그 춤을 누구와 먼저 시작하는지까지 따진다. 그러니 너는 춤이 끝나고 황태자 전하께서 귀족들 사이에 파묻혀 있으면 내가 긴히 할 말이 있다 말하고 구해 주면 된다.”
“흠…….”
아드넬은 잠시간 바스토르가 있는 단상과 귀족 무리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이내 “알겠습니다.” 하고 말을 덧붙였다.
아무튼 둘 다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이 아드넬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머지않아 테시우스의 말대로 연주가 바뀌었다. 따스한 봄날에 어울리는 경쾌하고 발랄한 연주였다.
두 사람은 연회홀에서도 구석진 자리에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여기서 황태자가 디아나와 율리시아 둘 중 누구를 먼저 고를까 하며 한껏 집중을 받는 가운데.
바스토르가 마침내 결정을 내리고 손을 내밀었다.
“디아나 반 체스터 영애. 그대와의 첫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허락해 주겠나.”
황태자가 선택한 사람은 바로 디아나였다.
갓 자란 새싹처럼 맑은 연두색 눈동자가 기쁨으로 차오르며 동시에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디아나는 활짝 웃는 낯으로 바스토르가 내민 손끝을 사뿐히 잡았다.
“물론입니다, 전하.”
두 사람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홀 중앙으로 걸어가 몸을 가깝게 붙였다.
하지만 그들이 노래에 맞추어 수려한 춤 실력을 선보일수록 웅성거림은 더욱 거세졌다.
역시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는 쪽을 밀어주지 않겠느냐, 원체 성정이 따듯하신 분이니 봄꽃 같은 체스터 영애를 고르지 않았겠나, 경합이 끝나기 전에 저쪽에 먼저 붙어야 하는 것 아니냐 등등…….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릴 정도였다.
디아나와의 춤이 끝나고서는 율리시아와의 춤이 이어졌다.
사실 아드넬은 사교댄스에 관해선 아는 바가 없어 왈츠 공연을 감상하듯 무심한 눈으로 보기만 했다.
주인공들의 춤이 끝나고 연주가 다시 한번 바뀌었을 땐 기다렸다는 듯 파트너의 손을 맞잡고 나온 여러 커플들이 홀 중앙을 차지했다.
그러나 황태자가 춤을 마치자마자 거짓말처럼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그의 주위를 감쌌다.
이래서 구해 달라고 했구나.
다만 급히 할 말이 있다며 구해 주는 건 몇 번 쓸 수 없는 기회였기에 아드넬은 최대한 기회를 엿보았다.
“……조금 출출하진 않나.”
그런데 그때, 대뜸 테시우스가 말을 걸어왔다.
아드넬이 고개를 돌리니 그가 뜬금없이 테이블 위에 수북하게 쌓인 디저트를 가리켰다.
“아……. 괜찮습니다. 그리고 저는 어차피 못 먹는 것들이잖습니까.”
“…….”
그녀의 대답에 테시우스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디저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래, 그게 맞는데.
‘내가 왜 이러지.’
아까도 샴페인을 두 잔 집어 들지 않았나.
당연히 아드넬에게 줘야겠다는 생각이었는데, 문득 돌이켜 보니 그는 샴페인 잔을 올린 쟁반을 들고 돌아다니는 시종과 동등한 위치였다.
그래서 그냥 내려놓고 제 것만 한 잔 챙겨 마셨는데 연신 바스토르의 상황을 살피는 아드넬을 보자니 또다시 뭔가 먹여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번에 같이 술을 마셔서 그런가?’
어째서인지 아드넬은 그가 부리는 별궁 사용인 같지가 않았다.
뭐랄까, 굳이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놀이 친구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아드넬을 쳐다보았다.
저도 모르는 새에 그와 많이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지만 제 침실이 아니면 절대 자지 않던 자신이 아드넬의 침대에서 잠든 것만 봐도 그랬다.
그래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아.’
바스토르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저를 아무렇지 않게 대해 주는 사람이니까.
정말로,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가 한창 생각에 빠진 그때.
“저 잠시만 다녀오겠습니다!”
마침내 아드넬이 활약할 시간이 도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