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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31)화 (31/141)

31화

축하 연회가 열리는 당일이 되기까지 딱히 별다른 일은 없었다.

틈만 나면 불쑥불쑥 찾아오는 2황자에게 스킨이나 로션을 발라 준다거나, 매일 바르는 상처 연고가 떨어지면 새것으로 내준다거나, 아토피에 좋은 화장품도 짬짬이 하나씩 만든다거나 하는 건 똑같았다.

여기서 새로이 추가된 일정이 있었으니 바로 난데없는 황태자의 부탁으로 시종 일을 배우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사실 하는 척만 하는 것이라 크게 어려울 건 없었다.

‘예전에 엄마가 알려 준 것도 있고.’

덕분에 아드넬은 꽤 수월하게 시종의 일과 귀족들의 예법을 배울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축하 연회 당일, 아드넬의 침실.

그녀의 치장을 돕던 하녀들이 손뼉을 치며 활짝 웃어 보였다.

“와아……!”

“너무, 너무 잘 어울리세요, 아드넬 님!”

사실 치장이랄 건 딱히 없었다.

기껏해야 시종들이 입는 유니폼을 가져다 입히고 머리를 다듬고 곱게 빗은 것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웬일로 편한 옷이 아닌 각 잡은 유니폼을 입으니 오늘따라 유독 똑 부러져 보였다.

장신구는 일절 못하고 신발도 무늬 하나 없는 검은색 구두가 전부였지만 아드넬은 무슨 옷을 가져다 입히던 그 나름대로 다 잘 어울렸다.

“오늘도 고마워요, 모나 양.”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요.”

모나가 생긋 웃어 보였으나 아드넬은 알고 있었다.

공녀들의 입성을 축하하는 연회에 참석하게 되었다는 얘길 듣자마자 쏜살같이 본성 침방으로 달려가 제 치수에 맞는 새 유니폼을 지어 달라 닦달한 것을.

그러잖아도 침방은 곧 다가올 여름 침구며 휘장이며 만들 게 한둘이 아니라서 일개 시종의 유니폼까지 새로 만들 시간은 없었다.

그러나 몸에도 안 맞는 유니폼을 입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다며 모나가 황태자까지 들먹이면서 치수에 딱 맞는 새 옷을 가져온 것이다.

“참, 이럴 게 아니라 어서 가 보셔야지요. 2황자 전하께서도 준비를 다 마치셨을 겁니다.”

리헬의 말에 아드넬이 고개를 돌려 높은 벽면에 붙은 시계를 잠시 쳐다보았다.

연회가 시작되기까진 시간이 좀 남았으나 그녀는 손님이 아닌 시종으로, 그것도 테시우스를 따라가기에 조금 더 일찍 나서야 했다.

“잊지 마세요. 강아지 같은 순한 눈매는 체스터 가문, 고양이처럼 뾰족한 눈매는 하르트 가문입니다.”

“일단 보시면 바로 알아보실 수 있으실 거예요.”

고작 눈매 하나로 사람을 구분할 수 있다니, 들을 때마다 이상했지만 아드넬은 순순히 대답했다.

“네, 명심할게요.”

마지막까지도 걱정을 놓지 않는 하녀들과 함께 침실을 나선 아드넬은 그녀들이 모두 돌아가자 흠흠 낮게 헛기침을 하곤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그녀의 바로 옆 방, 테시우스의 침실이었다.

“전하, 다 준비되셨습니까.”

아렌은 평소보다 더 낮고 침착한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오늘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나는 끝이다, 바짝 긴장한 채였다.

그녀가 문을 두드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달칵하고 손잡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드넬이 침을 한 번 꿀꺽 삼키는 새에 문이 열리며 육중한 체구가 시야를 완벽하게 가렸다.

“……다 했다.”

“…….”

하지만 테시우스가 나왔음에도 아드넬은 어딘가 얼이 나간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2황자를 본 순간 속으로 저도 모르게 욕지기가 나온 탓이다.

‘이런 미친…….’

맨날 하얀 셔츠에 새카만 바지 아니면 안 입던 사람이.

머리 한 번 제대로 안 빗고 허구한 날 흐트러진 꼴로 돌아다니던 사람이.

제대로 각 잡은 예복을 갖춰 입으니 그야말로 빛이 났다.

저도 퍽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테시우스를 마주하니 나는 그냥 태양 앞의 촛불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만큼, 잘생겼다.

몸을 꽉 조이는 검은색 예복에 달린 어깨의 술은 물론이고 얇은 체인과 단추, 자수까지 모두 금색으로 통일했다.

새카만 흑발에 황금처럼 빛나는 그의 눈동자와 부러 맞춘 것 같았다.

툭하면 눈을 가리던 머리는 위로 쓸어 넘겨 고정했고, 손가락엔 웬일로 두툼한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황실을 상징하는, 태양과 달을 가리키는 두 자루의 검과 그 사이에 자리한 방패 문양이 그것이었다.

물론 귀족가 영애들이 하는 것처럼 화려하고 다채로운 치장은 아니었으나 단순함 속에 스며든 절제미가 돋보였다.

한편 아드넬이 저를 멍한 얼굴로 쳐다만 보자 테시우스가 한쪽 눈썹을 미묘하게 찌푸렸다.

“왜 그렇게 보는 거지?”

“어……. 그게……. 너무 잘생기셔서…….”

저도 모르게 본심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여기서 테시우스는, 원래 같았으면 당연하다는 듯 코웃음만 한 번 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불현듯 얼마 전 바스토르 앞에서 강아지처럼 헤헤거리던 아드넬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바스토르는 나랑 정반대 스타일인데……. 취향 한번 여러 개군.’

그런데 어쩐지 그게 썩 기분 나쁘지만은 않았다.

일전에 그가 바스토르에게 보였던, 홀린 듯 쳐다보는 표정이 꽤 볼만했다.

“이만 가지. 넌 그냥 내 뒤나 따라와라.”

“예에…….”

당연히 시종이 앞장서는 게 맞지만 아드넬은 진짜 시종도 아니거니와 본성 지리엔 전무했다.

이를 배려해 준 것인데 나사 하나 빠진 얼굴의 아드넬은 테시우스의 작은 배려를 눈치채지 못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언제나 한산한 별궁을 벗어나 널따란 후원을 가로질러 본성 근처에 다다르니 시시각각 도착하는 화려한 마차들이 마침내 보였다.

연회홀과 바로 연결되는 높은 계단 아래로 마차가 멈춰 서며 저마다 한껏 아름답게 꾸민 여자들이 에스코트를 받아 내렸다.

누구 하나 예쁘지 않고 못난 사람이 없었다.

“…….”

아드넬은 한창 테시우스의 뒤를 따라가다 말고 잠깐 멈춰 그들을 바라보았으나, 이내 씁쓸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문득 엄마 생각이 난 탓이다.

‘……이미 지난 일을 어쩔 거야.’

내가 뭘 할 수 있던 것도 아니고.

그래도 기운 빠진 기색까지 완전히 숨기지는 못한 터라, 테시우스는 가다 말고 연신 힐끗힐끗하며 아드넬의 눈치를 살폈다.

‘이놈은 무슨 감정이 이렇게 시시각각 바뀌어?’

일부러 보폭까지 맞춰 줬더니만 대뜸 멍한 얼굴로 멈춰 서질 않나, 시무룩한 표정으로 더 느려지질 않나.

아무래도 전속 시종으로 삼으려면 교육을 단단히 해 놔야 할 것 같았다.

“아드넬.”

“……예, 예……!”

낮은 부름에 아드넬이 화들짝 놀라 멀어진 거리를 따라잡았다.

그래도 연회 홀 바로 근처까지 다다르니 아까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은 금세 자취를 감추고 긴장감만 남았다.

테시우스가 앞장서 높은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워낙 다리가 긴 사람이라 두 칸을 한 번에 올라가니 아드넬은 한 칸을 오르는 것도 서둘러야 했다.

이윽고 활짝 열린 거대한 문 앞에 도착하자 시종이 테시우스를 알아보고 넙죽 허리를 숙였다.

“제, 제국의 하늘을 수호하는……!”

“됐으니 이름이나 부르거라. 아, 이놈은 내 시종이다.”

묵직한 저음에 명부를 들고 있던 시종이 힐끔 고개를 들어 아드넬을 살폈다.

2황자의 등 뒤에 서 있는, 상당히 예쁘장한 얼굴의 청년은 이제 갓 성인이 됐는지 아직 얼굴에서 앳된 티가 났다.

어깨가 잔뜩 경직된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별궁에 새로 들어온 시종인 모양이었다.

그는 냉큼 허리를 펴고 흠흠 목을 가다듬더니 이내 크게 외쳤다.

“테시우스 폰 아이테라 2황자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바로 옆에서 들은 터라 테시우스가 시끄럽다는 듯 사정없이 미간을 구기며 연회홀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를 따라 들어간 연회 홀은 더없이 밝고, 찬란하고, 아름다웠다.

온갖 달콤한 디저트와 음료들로 한가득 채워진 테이블이며, 어지간한 마차 한 대 크기의 커다란 샹들리에며, 음식 냄새와 향수 냄새가 한데 섞였음에도 불쾌하지 않은 따듯한 공기 내음까지 모든 것이 다 신기하고 놀라웠다.

하지만 아드넬은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도 감탄할 수 없었다.

악단이 연주하는 음악 소리 외엔 잔을 부딪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어색한 정적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뭐지……?’

명색이 2황자인데 영 반기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귀족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그를 은근히 살펴보기만 했다.

뭔가 이상했다.

‘설마 아토피 때문인가?’

라크란 병은 닿으면 옮는 병도 아닐뿐더러 그 사실을 별궁의 사용인들은 물론 황태자까지 알고 있는데 귀족들이 보이는 반응은 정반대였다.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살짝 고개를 들어 살펴본 테시우스는 무덤덤함, 그 자체였다.

저를 두고 수군대는 게 뻔한데도 아무 말이 없었다.

‘대체 왜?’

제국에서 네 번째로 고귀한 핏줄이자, 현 황태자가 끔찍이 여기는 동생이다.

그럼 최소한 이것보단 대우가 나아야 하지 않나?

애초에, 저렇게 무엄한 눈으로 쳐다보고 말하는 걸 그대로 두다니 2황자는 왜 나서지 않는 걸까?

그녀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하지만 아드넬은 물어볼 수 없었다. 전생의 그녀도 테시우스와 마찬가지로 아토피를 겪었으니까.

현대에선 흔한 질병임에도 시선만큼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영장에 몸 한 번 담그는 것도 눈치가 보이고, 지하철을 타도 일단 아토피만 보였다 하면 옆자리는 대부분 비었다. 한여름에 팔다리를 드러내 보이는 일조차 그녀에겐 사치였다.

그랬던 아토피가 천연 화장품을 쓰는 걸 기점으로 점차 나아지면서 병원 치료와 동반한 끝에 완치되었기에, 점차 흥미를 붙여 나중엔 천연 화장품 공방을 차리기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현대보다 몇 배는 더 시선이 곱지 않아 보이는 이곳에서, 어떻게 그런 사정을 물어볼까.

물론 그런 사정을 물을 만한 위치도 안 되지만 더없이 건방진 물음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드넬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 연회홀 문 옆에 서 있던 시종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디아나 반 체스터 공작 영애와 길리암 반 체스터 공작님, 그리고 율리시아 반 하르트 공작 영애와 케르페온 반 하르트 공작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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