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그게 실은…….”
제이든은 그간 하녀들이 찾아와 강제로 안겨 주고 간 것들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막상 이야기를 들은 아드넬은 미안함에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닌데…….”
맨 처음 카르카스에 편지를 보낼 당시, 아드넬은 2황자에게 필요한 화장품 재료만을 적었었다.
때문에 필립에게 별궁 하녀들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당장 있는 재료로 만들 수 있는 화장수를 만들었는데, 사실 알고 보면 간단하다 못해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쉬운 것이었다.
정확한 용량만 알면 누구든지 직접 만들어 쓸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이곳에서 화장수는 아주 비싼 화장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어지간한 분가루보다 비싼 만큼 보통 평민들은 애초에 사서 쓸 수 있는 가격이 아닌 것이다.
그러하니 이렇게 작은 선물들로나마 감사한 마음을 표하는 것이겠지만 아드넬은 그게 못내 양심에 찔렸다.
‘내 밥벌이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고마워하니 미안한걸…….’
평민이 쓰는 화장품이라고 한다면 몸을 씻을 때 쓰는 비누 하나, 그게 전부였다.
머리를 감고 세안을 하는 것도 전부 비누로만 해결했다.
자연히 무더운 여름에도 피부는 건조한 사막 그 자체였다.
이에 아드넬은 큰 고민에 빠졌고, 밤새 갈등하다가 결국 마음을 정했다.
‘레시피, 알려 주자.’
다만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는데 제이든도 마찬가지겠지만 필립이 유독 난리 칠 게 뻔해서, 아드넬은 은밀히 주방장 리들리에게 부탁했다.
“오늘 밤에 주방을 잠시 빌려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화장품에 관심이 있는 사용인이 있다면, 꼭 와 달라고 조용하게 말을 전해 주세요.”
“물론이지요! 말씀하신 대로 조용히, 소문내겠습니다.”
이젠 리들리도 아드넬의 말이라면 껌벅 죽어 뭐든지 들어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늦은 밤, 일찌감치 잠든 척한 아드넬은 제이든과 필립 모르게 조용히 침실을 빠져나왔다.
작업실에 들러 일전에 하녀 한 명이 주고 갔다는, 간식이 담겨 있었던 바구니에 필요한 재료를 챙긴 뒤엔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늦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주방과 가까워질수록 웅성거리지만 그리 크지 않은 소음이 귀를 간지럽혔다.
마침내 도착한 아드넬이 문을 살짝 열고 들어간 그때였다.
“……아드넬 님!”
부담스러우리만큼 많은 눈동자가 일순 몰리며,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합창하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드넬은 생각보다 많은 인원수에 조금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연히 하녀들만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제국에서 화장품은 귀족과 여성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이 보편적이었다.
그래서 아드넬은 아렌으로 살 때부터 일찌감치 남성용 로션을 만들어 인식을 개선하고자 무던히 노력했는데, 아무래도 가격대가 있다 보니 보통 평민은 사고 싶어도 살 수가 없었다.
여기에 ‘아실라’라는 사람의 네임 밸류가 붙어 가격이 더 뛰기도 했고.
그러니까 당연히, 남자는 별궁 하녀들보다 훨씬 더 화장품과 거리가 멀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전혀 아니었다.
주방 안에는 하녀들뿐만 아니라 일면식도 없는 하인들이며 주방장 리들리까지 있었다.
아드넬은 그나마 친분이 있는 리들리에게 슬그머니 다가가 작게 물었다.
“저어, 정말로 이 사람들이 다 화장품에 관심이 있어서 온…….”
“아, 예. 그렇습니다.”
“그럼 리들리 님도……?”
“그, 실은 처음엔 크게 관심이 없었습니다만. 하녀들이 말을 아주 잘하지 뭡니까, 순간 혹해서 저도 왔습니다.”
그리 대답하는 리들리의 눈동자가 주방 한편으로 향했다.
아드넬이 그 시선을 따라가 보니 제이든과 필립에겐 퍽 익숙한 얼굴, 리헬을 포함한 하녀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글쎄, 자기들도 처음에는 그냥 꽃향기 나는 물인 줄로만 알았는데 쓰다 보니 무척 좋았다더군요. 제가 쓰면 십 년은 더 젊어질 거라나, 하핫!”
결국 자기 칭찬에 혹했다는 소리였다.
정말, 필립이랑 닮았다니까.
아드넬은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곧 하녀들에게 다가갔다.
“화장수는 쓸 만하셨나요?”
“어마……! 아드넬 님!”
하녀들은 아드넬을 발견하자 깜짝 놀라며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쓸 만한 정도가 아니었는걸요, 너무 좋았어요!”
“아……. 그 정도셨습니까?”
“그럼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피부가 훨씬 덜 건조하던걸요.”
“매일 세안하고 나면 누가 피부를 막 잡아당기는 것 같았는데 그런 느낌도 많이 사라졌고요!”
“저는 얼굴에 나던 것들이 싹 가라앉았지 뭐예요?”
리헬이 한마디를 꺼내자 옆에 있던 하녀들이 덩달아 거들며 연신 호들갑을 떨었다.
처음 며칠간은 뭐 그냥 그렇네, 나쁘지는 않네 하는 수준이었다.
귀부인들이 쓰는 로션에 비하면 미미한 꽃향기만 났던데다가 육안으로 보기엔 그냥 물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있는 게 이것뿐이라 나름 꾸준히 쓰던 것인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없으면 못 살 지경이 되었다.
매번 건조하기만 하던 피부가 한번 촉촉해지고 나니 도저히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가 없었다.
여기에 아드넬이 준 건 작은 약병 정도의 크기로 양도 그리 넉넉지 않아서, 아침저녁으로 쓰니 금세 다 사라졌다.
‘오늘 왜 부르셨는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저번처럼 또 만들어 주실지……!’
사실 하녀들의 진짜 속마음은 이러했다.
정말 진심으로 고맙긴 하나, 저들 봉급으로는 시중에 나온 화장수 하나 사기도 어려웠다.
여기에 필립이 말했던 ‘물건의 가치는 만든 사람이 정하는 거야.’가 뇌리에 박혔다 보니 대놓고 싸게 달라고는 못 하겠고 그냥 속으로만 바라는 것이었다.
“제가 드린 화장수가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왜 불러 모으신 건가요? 혹시 다른 시키실 일이라도…….”
“아, 그게 실은…….”
아드넬은 하녀들을 향해 팔에 걸쳐놓은 바구니를 들어 보이며 작게 웃었다.
“레시피를 알려드리려 왔습니다.”
“네? 레시피요?”
“레시피라니 그게 무슨…….”
“여러분이 직접 만들어 쓸 수 있는, 화장수 레시피입니다.”
그 한 마디에 아드넬이 등장했을 때보다 더 심하게 이목이 쏠리며,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가 입을 쩍 벌렸다.
그도 그럴 게 화장수 레시피를 공유한다는 것 자체가 화장품으로 벌어 먹고사는 아드넬에겐 어마어마한 손해였으니까.
제아무리 장사를 하지 않는 사람이래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걸 알려 준다는 건지, 듣고도 믿기지 않아 절로 입이 벌어졌다.
“아시다시피 화장수는 아주 비싼 화장품으로 알려져 있죠. 보통 사람들이 사서 쓰기엔 가격도 매우 부담스럽고요.”
“네, 네, 맞아요……!”
“하지만 제가 알려드릴 건 조금 다릅니다. 일단 보여 드리죠. 참, 리들리 님. 오늘 낮에 말씀드린 건…….”
“다 준비해 놨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드넬은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주방 한편에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여럿이 앉을 수 있는 원목 테이블 위엔 깨끗하게 씻은 잼 통 하나와 희뿌연 김이 피어오르는 뜨거운 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내려놓은, 아드넬이 가져온 바구니 속엔 샛노란 마리골드 꽃잎이 수북하게 담겨 있었다.
‘원래는 직접 만들어서 줄 생각이었지만…….’
생화로 만드는 화장수는 그때그때 쓸 만큼만 만드는 것이 좋기 때문에, 하녀들에게 만들어 주고 며칠 뒤에 새로 주문한 건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물론 아드넬에겐 그리 대단한 건 아니었다.
그건 만드는 방법도 마찬가지였다.
“자, 이제부터 잘 보세요.”
아드넬은 빈 잼 통에 마리골드 꽃잎을 적당량, 다음으론 끓인 물을 넣은 뒤 뚜껑을 닫았다.
투명한 유리 용기가 금세 하얀 김으로 가득 찬 그때, 아드넬이 말했다.
“이러면 화장수 만드는 법은 끝입니다.”
“……네?”
“이건 그냥 꽃잎에 뜨거운 물을 부은 건데요……?”
그 말에 주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혼란스러운 눈으로 저마다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냥 꽃잎에 물을 부은 것뿐인데 이게 화장수라니 저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시중에 나온 가장 저렴한 화장수 하나 가격이 한 달 봉급에 맞먹는 수준이다 보니 더더욱 그러했다.
“이건 마리골드라는 꽃잎인데 여기에 뜨거운 물을 붓고 2, 3시간 두었다가 거르기만 하면 화장수가 된답니다. 특히 화상이나 각종 피부 질환에 효과가 좋지요.”
정확하게 말하면 화장수 대용으로 쓸 수 있는 플로럴 워터였지만 화장품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겐 화장수를 대체할 단어가 딱히 없었다.
아드넬은 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조금 더 풀어서 설명했다.
“물론 시중에 나오는 것들은 조금 더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집니다. 깨끗하게 정제한 물이라던가, 증류해서 추출한 오일을 첨가한다든가 하는 식으로요. 하지만 그만큼 비싸기 때문에 직접 만들어 쓰기엔 이만한 게 없습니다.”
“맙소사…….”
“그럼 저희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거네요?”
“예, 그렇습니다. 다만 사용 후에 얼굴에 무언가 올라온다면 즉시 사용을 중지하셔야 합니다.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다 보니 간혹 안 맞으시는 분도 계시거든요.”
“네, 그럴게요……!”
“정말 감사해요, 아드넬 님!”
방법은 쉬워도 너무 쉽다.
하지만 그 방법을 여태껏 모르고 살았다.
귀부인들이 아침저녁마다 얼굴에 바른다는 그 값비싼 화장수를 그리도 부러워했건만, 이미 한 차례 효과를 본 화장수 레시피를 알게 되다니 이젠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추가로, 이 방법으로 만드는 화장수는 대략 일주일 분량만 만들어 쓰는 게 좋으니 되도록 한 번에 만들어 다 같이 나누어 쓰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죠, 아드넬 님?”
“저희는 딱히 드릴만 한 게 없는데…….”
그동안 열심히 자잘한 선물을 가져다 바치긴 했지만, 오늘 상상 이상으로 큰 걸 받았다 보니 하녀들이 미안함에 울상을 지었다.
아까 전 ‘또 뭘 만들어 주지 않을까.’하고 기대를 품었던 자신이 또 한 번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전 충분히 받았습니다. 제 방에 아직도 많이 쌓여 있는걸요.”
“그래도 알려 주신 것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저도 받은 것이 감사해 알려드렸을 뿐이니 너무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 말하며 싱긋 웃는 얼굴이 어찌나 예쁜지, 하녀들은 거의 반쯤 녹아내린 표정으로 작게 탄성을 흘렸다.
‘아드넬 님은 어쩜 얼굴도 그렇고 마음씨까지 이렇게 고우시담……!’
‘누군진 몰라도 미래에 아내 될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앞으로 더 잘해 드려야지……! 아드넬 님은 천사야! 2황자 전하의 구세주이자 우리의 천사!’
저마다 그런 생각을 하던 하녀들은 곧 아드넬이 정확한 용량을 알려 주자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귀를 쫑긋 세웠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어느덧 두 공녀의 환영 연회가 코앞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