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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29)화 (29/141)

29화

‘미쳤다, 미쳤어……!’

아드넬은 고래고래 소리치고 싶은 걸 꾹 참으며 연신 이불을 퍽퍽 쳐 댔다.

침대 위에서 발로 빵빵 차기도 하고 주먹질도 하고 뒤집어썼다가 벗었다가 하면서 정말이지 난리도 아니었다.

술에 취해서일지도 모르지만 오늘 황태자가 보여 준 모습은 설레기 그지없었다.

잘생긴 얼굴로 말하니 오그라드는 말조차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이지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도 그럴 게 아드넬의 진짜 속은 연애 한 번 못해 본 순진하고 앳된 소녀에 불과했다.

남장을 하고 있다 해서 진짜 남자가 되는 건 아닌 것이다.

여기에 바스토르를 연인 대상으로 보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런 상대로 보기에 그는 너무나 높은 신분의 사람이고, 또 머지않아 들어올 두 공녀 중 한 사람의 남자가 될 터였다.

하지만 바스토르는 잘생겼다.

미치도록 잘생긴 영화배우와 1:1 팬 미팅을 하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을만큼 즐거운 시간이었다.

‘물론 두 영애 모두 아름답다만, 난 아직 관심이 없어서 말이야.’

‘관심이 있다면 다른 쪽인 것 같군.’

‘아름다운 것엔 늘 시선이 가기 마련이지.’

아아악!

아드넬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여 꺅 소리를 내질렀다가 합하고 입을 다물었다.

잠시간 정적이 흘렀으나 다시금 머릿속에 퐁퐁하고 떠오르는 기억들에 또 한 번 베개를 퍽퍽 쳐 댔다.

그러나 바로 그때.

벌컥 하며 예고 없이 불청객이 들이닥쳤다.

아드넬이 깜짝 놀라 어깨를 들썩이며 휙 고개를 돌리자, 활짝 열린 문 너머로 어딘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전하?”

“…….”

또 화장품을 발라 달라 하려는 건가 했는데 정작 문을 열어 놓고 하는 말은 없었다.

잠시간 침묵을 지켜봤으나 그는 여전히 조용했다.

“제게 따로……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너.”

“말씀하십시오.”

아드넬이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와 자세를 바로 하자 테시우스는 그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이내 머뭇거리며 팔을 내렸다.

그리곤 갑자기 등을 돌리더니 아까 자기가 집어 던진 로션 통을 들고 돌아왔다.

“발라라.”

“…….”

그럼 그렇지.

얼굴은 싸하게 식었지만 그래도 오늘은 기분이 꽤 좋았다.

아드넬은 금세 표정을 풀곤 제 침대 가를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앉으십시오.”

“…….”

테시우스는 뭔가 할 말이 굉장히 많은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여기에 태도는 꽤 부루퉁해서 침대 가에 거의 털썩 주저앉듯 앉았다.

만일 아드넬이 앉아 있었더라면 그녀의 몸이 휘청일 정도로 세게.

그가 앉고서야 그녀도 테시우스의 등 뒤에 앉았다.

“안 벗으십니까?”

“아.”

뒤늦게 테시우스가 어깨 위 가운을 아래로 끌어 내렸다.

그러자 넓적한 등 위로 그가 움직일 때마다 꿈틀거리는 선명한 근육의 움직임이 드러났다.

‘진짜 성격이 유일한 흠이다, 흠.’

아드넬은 볼 때마다 여심을 저격하는 뒤태에 테시우스가 황태자 성격의 반만 닮았더라면 그를 좋아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로션을 손바닥에 덜었다.

기분 좋게 취기가 돌아서인지 오늘따라 유독 몸이 좋아 보였다.

이윽고 뜨거운 등 위로 시원한 손바닥이 닿자 테시우스가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래도 오늘은 기분이 꽤 좋으니까 특별히 해 준다.’

아드넬은 헤실 웃으며 로션을 펴 바르더니 이내 마사지하듯 테시우스의 날갯죽지 부근을 엄지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가, 갑자기 뭐 하는……!”

“뭉친 근육을 풀어드리려고요. 아, 그냥 이참에 누우십시오.”

아드넬은 다짜고짜 테시우스의 등을 밀며 그를 침대 위에 엎어트렸다.

얼결에 미는 대로 엎드리긴 했는데, 진짜 놀란 건 그다음이었다.

“……감히 황족의 몸 위에 올라가다니 이 건방진……!”

“글쎄 있어 보시라니까요.”

아드넬은 테시우스의 허벅지 위에 앉아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외치는 그의 말을 대번에 끊으며 잔뜩 굳은 어깨를 꽉꽉 주물렀다.

“제가 이래 봬도 악력은 꽤 되는 편입니다. 어머니께서 손발이 차셔서, 어렸을 때 자주 주물러드렸거든요.”

“…….”

테시우스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런 민망한 자세라니, 더구나 허벅지 바로 위에 앉다니!

뭔가 당한 것 같기도 하고 이래저래 심경이 복잡했다.

그러나 주물러 주는 손길은 퍽 시원해서, 시간이 갈수록 나른해지며 저도 모르게 자꾸만 눈이 감겼다.

단단하게 뭉친 승모근과 날갯죽지, 두꺼운 팔뚝과 목 뒷덜미를 아드넬이 꽉꽉 눌러 줄 때마다 몸이 편하게 풀리는 기분이었다.

여기에 취기까지 더해지니 천천히 졸음도 몰려오며 저를 괴롭혔던 원인 모를 불쾌함 또한 눈 녹듯 사라졌다.

오히려 이 시간이 더 오래 지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이래서 그런 건가.’

그래, 생각해 보니 그랬다.

바스토르는 치료가 끝나면 아드넬을 자기의 술친구로 두어도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테시우스는 뭔가 빼앗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었다.

더구나 아드넬은 이래저래 잘하는 게 많았다. 지금 이렇게 어깨를 주무르는 것도 그렇고, 평민 주제에 꽤 박식할뿐더러 그가 만드는 화장품들은 하나같이 효과가 좋아 이젠 그것들이 없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 얼굴도 꽤 반반한 축에 속하고.

‘나한테 보이는 태도가 좀 건방지긴 하지만…….’

그 정도야 귀엽게 넘어가 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아드넬을 바스토르가 데려간다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아쉽다 느낀 모양이었다.

자신은 별궁 밖으로 잘 나오지도 않는 데다 사교 활동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도 거의 없으니까.

‘……역시 계속 곁에 두어야겠어.’

잘하는 게 많으니 치료가 끝나도 대충 아무 작위나 주어 시종으로 두면 편할 것 같았다.

물론 그 전에 바스토르가 술친구로 본성에 데려가는 건 안 된다 못 박아야겠지만.

별궁에 마냥 가둬두는 건 퍽 답답할 테니 수도의 좋은 집도 하나 주고 아예 출퇴근을 하게 만드는 거야…….

테시우스는 아드넬이 주물러 주는 내내 혼자 온갖 생각을 하며 천천히 수마에 빠져들었다.

아드넬이 그가 잠든 걸 눈치챘을 땐 그로부터 십 분은 더 지난 후였다.

“……전하?”

얼마나 깊게 잠들었는지 몸을 잡고 흔들어 보아도 미동이 없었다.

순간 죽었나 싶었으나 쌕쌕대는 숨소리는 꽤 컸다.

‘또 남 좋은 일만 해 줬구만.’

아드넬은 작게 한숨을 폭 쉬며 그의 몸 위에서 내려왔다.

2황자가 여기서 자면 난 어디서 자야 하나 생각하던 그때, 아드넬은 문득 그의 맞은편에 몸을 웅크린 채로 고개를 기울였다.

맨정신이었더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으나 왜인지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마주한 테시우스는 역시나 아름다웠다.

한쪽으로 쏠린 흑발 아래 날렵한 콧날이 새삼스레 높아 보였다.

그 밑에 자리한 적당한 두께의 선홍빛 입술도, 젖살 하나 없이 움푹 들어간 볼도, 사과가 목에 걸린 것처럼 툭 튀어나온 목젖도.

세상에서 가장 남자답게 아름다운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이 사람이겠지.

‘……그래도 역시 애나 어른이나 잠들면 다 천사 같네.’

이젠 나도 조금 정들었나.

아드넬은 피식 웃으며 낮게 읊조렸다.

“잘 자요, 황자 전하. 부디 좋은 꿈 꾸시길.”

* * *

다음 날 이른 아침.

아드넬이 소파에서 눈을 떴을 때 테시우스는 언제 일어난 건지 이미 사라진 이후였다.

다만 어제 황태자를 만난 일 때문에 원래 만들려던 화장품을 못 만들어서, 아드넬은 일찍 일어난 김에 빠르게 씻고 작업실로 향했다.

제이든과 필립이 그녀의 침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갔을 땐 이미 방을 비운 상태였다.

‘벌써 작업실에 간 건가.’

하여튼 부지런하긴.

선명하게 그려지는 얼굴에 제이든은 필립에게 들키지 않을 만큼 작게 미소 지었다.

“우리도 이만 가자.”

“주방 먼저 들렀다 가면 안 돼? 보아하니 또 아침 거를 것 같은데 뭐라도 챙겨서 가게.”

“……웬일로 네가 그런 좋은 생각을……?”

“나도 아드넬 많이 챙기거든!”

하여튼 자기만 챙기는 줄 알아요, 필립이 작게 투덜거리던 그때였다.

“아드넬 님! 안에 계세요?”

“잠시만 시간 좀 내주세요! 정말 잠깐이면 돼요!”

닫힌 문 너머로 여러 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딘가 조금 흥분한 듯도 한, 그런 목소리들.

다름 아닌 별궁 하녀들의 것이었다.

“하! 보나 마나 또 뭐 달라고 부탁하러 온 모양이지, 아예 방에 없는 척해!”

필립이 잔뜩 구겨진 얼굴로 말했으나 제이든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하녀들이 아드넬의 침실에 직접 찾아올 정도면 그녀가 만나기 전에 저가 먼저 만나 상황을 파악하고 제 선에서 거르는 게 나을 듯싶었다.

결국 제이든이 총대를 메기로 하고 침실 문을 연 순간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용건을 묻는 목소리가 더없이 딱딱하고 낮았다.

아드넬을 만만하게 보고 저들에게도 싼값에 화장품을 만들어 주지 않을까 싶어 필립에게 대놓고 말한 하녀들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제이든을 올려다보는 눈동자들은 이전처럼 겁에 질려있긴커녕 하나같이 초롱초롱하게 반짝였다.

리헬이 하녀들 앞에 나선 건 바로 그때였다.

“이거, 저희가 만든 간식인데 아드넬 님께 꼭 좀 전해 주세요!”

“예?”

“이건 아드넬 님께 잘 어울릴 것 같아 사 온 건데 이것도 함께 전해 주세요!”

“이것도요!”

하녀들은 저마다 들고 온 것들을 다짜고짜 제이든의 품에 안겨 주었다.

먹거리가 담긴 바구니부터 시작해서 눈대중으로 고른 새 옷이며, 시장에서 산 저렴한 장신구며, 그의 팔에 하녀들이 가져온 물건이 한 아름 올라가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곤 그가 거절할 새도 없이 도망치듯 빠르게 자리를 뜨면서도 연신 재잘거리며 꺄르륵 웃어 댔다.

“……이게 대체…….”

이날 시작된 작은 소란은 하루에서 그치지 않았다.

꼭 자기들끼리 모종의 약속이라도 한 듯 돌아가면서 매일 한 번은 꼭 찾아와 온갖 선물을 안겨 주고 갔다.

안에 아무도 없나 싶으면 문 앞에 놓고 가기까지 했다.

이러하니 이젠 아드넬도 모를 수가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왜 자꾸 내 방에 선물이 쌓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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