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굳이 몸의 흉터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언제나 퀭하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던 동생의 얼굴엔 혈색이 돌고 있었다.
오히려 안 좋아 보이기로는 테시우스가 아닌 아드넬이 더했다.
안 그래도 마른 사람인데 눈 아래는 시커멓게 물들어 있고 뺨은 홀쭉하게 들어가 있으니 어디가 많이 아픈가 싶을 정도였다.
바스토르는 사뭇 걱정된단 얼굴로 아드넬에게 말했다.
“다만 그대가 너무 힘들진 않을까 그게 걱정이군. 테시우스의 치료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대는 내 동생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만큼 몸을 아끼도록 해.”
“가, 감사합니다, 전하……!”
“…….”
제 힘듦을 알아주다니!
옆에 있는 누구 씨는 맨날 새벽마다 들이닥쳐 피곤하게 하는데!
마치 그간의 고생을 보상받는 듯한 기분에 아드넬은 반쯤 감격한 얼굴로 외쳤다.
반면 테시우스는 뭐가 그리 기분이 나쁜지 여전히 입은 꾹 다문 채였지만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럼 한잔하지. 오랜만에 이런 시간을 가지니 무척 기쁘군.”
“아, 그러고 보니……. 전하께선 무척 바쁘시겠군요. 곧 두 공녀님의 환영 연회가 열리니…….”
아드넬이 냉큼 답하자 바스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는 이상하게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대답했다.
“물론 두 영애 모두 아름답다만, 난 딱히 관심이 없어서 말이야.”
순간 자수정처럼 반짝이는 바스토르의 보랏빛 눈동자가 가늘게 좁아지며 아드넬을 향했다.
“관심이 있다면 다른 쪽인 것 같군.”
“예……?”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아름다운 것엔 늘 시선이 가기 마련이지.”
그런 말을 하면서 저를 쳐다보니, 아드넬은 어버버 하며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놀리는 게 분명한데 왜 가슴은 이다지도 콩닥거리나.
그래도 기분이 마냥 나쁘지만은 않았다.
‘눈 호강 최고다, 미남 최고야!’
진짜 속마음은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테시우스는 바스토르가 장난치는 거란 걸 알면서도 계속 불쾌해졌다.
‘……나도 딱히 좋아하지는 않는데.’
자꾸만 아렌을 떠올리게 하는 아드넬은 굳이 따지자면 싫은 편에 속했다.
제 흉터 위로 아무렇지 않게 손을 올리는 모습은 조금 신선했지만, 그래도 그를 볼 때면 가슴 한편에 묵혀 둔 죄책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처음보단 덜하지만 그렇다고 아렌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아니야. 저 징그러운 수작질을 보는 게 짜증 나서 그런 거야.’
테시우스는 아미를 찌푸리며 잔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곤 애써 태연한 척,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남이사 여자를 안든 남자를 안든 내 알 바는 아니지만 작업질은 되도록 내가 없는 곳에서 해 줬으면 하는데.”
자기 딴에는 태연하게 말한다고 했는데 뾰족한 말투는 어쩔 수 없었다.
그때 바스토르가 “흐음.” 하고 낮은 신음성을 흘리며 매끈한 턱을 매만졌다.
“지금 질투하는 거야?”
“내가 미쳤어? 그러는 형이야말로 열다섯 살짜리 꼬맹이한테 무슨 짓이야?”
자기랑 아홉 살이나 차이 나는데 염치가 있어야지, 테시우스가 작게 중얼거리던 그때.
바스토르와 아드넬의 놀란 눈이 동시에 그를 향했다.
“열다섯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아드넬은 놀라다 못해 황당하다는 얼굴로 테시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테시우스는 잠시 주춤하는가 싶더니 곧 미심쩍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대충 그 정도 나이 아니던가?”
“맙소사, 동생아! 네가 아무리 이……. 남들보다 우월한 체격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네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 되지! 그는 무려 스무 살이라고!”
바스토르의 대답에 테시우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성인이 된 지 벌써 2년이나 지났다고?
혼란으로 일렁이는 금안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아드넬을 빠르게 훑었다.
“……아무리 봐도 내가 열다섯 살 때 체격도 안 되는데. 열다섯 살도 많이 쳐 준 건데.”
“세상엔 너처럼 큰 사람이 오히려 드물단다, 동생아.”
“전혀 스무 살로 안 보여.”
“전 스무 살입니다, 전하.”
아드넬이 못을 박자 테시우스가 더욱 인상을 썼다.
저보다 고작 세 살밖에 어리지 않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무슨 남자애가 이렇게 비리비리하고 예쁘장하게 생겼담?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 테시우스의 시선이 바스토르에게로 옮겨가며 곧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왜 나를 보는지 알 것 같지만, 왜 나를 보는지 한 번 물어봐 볼까?”
“제국에서 제일 예쁜 남자로 소문난 사람이 바로 형이니까.”
“이럴 때만 형이라고 부르지 마라.”
“아무튼 ‘형’을 보니까 좀 이해가 되네.”
제 할 말만 하곤 태연히 잔을 기울이는 모습에 바스토르의 이마 위로 핏줄이 돋았다.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러는데?
물론 그는 대놓고 말하는 테시우스와 전혀 다른 성격이었으므로 금세 평정심을 되찾고 아드넬에게 말했다.
“내 동생의 오해를 이해해 주게. 워낙 자기중심적인 아이라서 말이야.”
“괜……찮습니다, 전하.”
한편 아드넬은 말은 괜찮다고 답했으나 정말이지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기가 막혔다.
‘아니, 그보다 열다섯으로 알고 있었으면서 그 밤중에 수시로 들이닥친 거야?’
한창 커야 하는 나이인데!
무려 성장기인데!
이해되지 않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난 여자치고도 큰 키라고……!’
아드넬은 전생의 단위로 바꾸면 170cm를 조금 넘는 키를 가지고 있었다.
‘아렌’으로 살 땐 제 나이로 보이지 않을 만큼 작고 성장이 느렸다.
자급자족하는 달걀과 이따금 사 오는 육류로 단백질을 보충한다곤 해도 혼자 살면서 하던 일이 원체 많았던 터라 아무리 많이 먹어도 키가 자라긴커녕 살도 안 찐 게 아니라 못 쪘다.
하지만 델리움을 떠나 여행을 하는 동안 제이든과 필립이 거의 수발들듯 음식을 잔뜩 먹이고 운동을 가르쳐 주어 이후부턴 나무처럼 쑥쑥 자라 지금의 키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아무리 어리게 봐도 열다섯보단 더 쳐 주고도 남을 키인데.
도대체 2황자의 머리가 어떻게 된 건지 직접 열어서 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참, 그보다 술은 입에 잘 맞나? 우리 형제는 다소 독한 것을 좋아하는지라.”
“무척 잘 맞습니다. 저 또한 독한 술을 즐기는 편입니다.”
“이런, 술 취향까지 맞다니 더 마음에 드는군. 테시우스의 치료가 끝나도 내 술친구로 둬도 좋겠어.”
아, 그렇지.
바스토르가 대뜸 손가락을 가볍게 튕겨 보이며 덧붙였다.
“이참에 그대도 이번 연회에 참석하면 어떻겠어?”
연회라니?
당장 잡혀 있는 연회라면 두 공녀의 입성 환영 연회가 아니던가?
그걸 왜 나한테?
그리 생각하기 무섭게 바스토르가 말했다.
“볼 것도 많고 먹을 것도 많고, 여러모로 재미있는 경험일 거야.”
“하, 하지만 저는 평민이고, 아무것도 아닌데…….”
“대신 테시우스가 있질 않나.”
반달 모양으로 휘어진 눈매가 아직도 “스무 살로 안 보이는데. 열다섯 같은데.” 하고 중얼거리는 테시우스를 향하자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뭐?”
“전속 시종으로 둔갑해서 따라오면 될 것 같군. 마침 얼굴도 예쁘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거야.”
“미쳤어? 벌써 소문 다 났…….”
“황태자비 자리를 두고 두 집안이 싸우는데 그 사이에 껴 있기가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거든. 테시우스가 날 급히 찾는다며 종종 구해 줬으면 하는데 어떤가? 내 시종들은 이미 얼굴이 다 팔려서 말이지. 어지간해선 속질 않는단 말이야.”
바스토르는 생글 웃으며 잔을 쥔 아드넬의 손등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 갑작스러운 손길에 화들짝 놀람과 동시에 테시우스도 일순 입매를 굳혔으나, 뒤이어 나온 목소리에 아드넬은 홀린 듯이 대답하고 말았다.
“부탁하네. 테시우스를 돕듯 나도 한 번만 도와줬으면 해.”
“……예, 전하. 그리하겠습니다.”
* * *
‘둘 다 미친 게 틀림없어……!’
테시우스는 셔츠의 단추를 풀자마자 냅다 벗어 바닥에 내팽개쳤다.
술에 취해서인지 평소라면 별것도 아니라 넘길 일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기분 나빴다.
뭐?
시종으로 따라와?
‘그리고 뭐? 그리하겠습니다?’
하!
테시우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팩하니 돌렸다.
이미 벌어진 일인데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바스토르는 아름다운 사람이지만, 남자를 애인으로 둔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그는 무슨 생각인지 누가 봐도 남색을 즐기는 사람이나 할 법한 얘기를 잔뜩 늘어놓고 갔다.
물론 장난이라는 건 안다, 아는데…….
‘그놈은 그걸 진짜라고 믿는 거야?’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은근히 두 뺨을 복숭아처럼 물들이며 수줍어하던 모습.
그 모습이 너무 선명해서 기가 막혔다.
그와 동시에, 그런 아드넬을 떠올릴 때마다 화가 나는 자신이 더없이 이상하면서도 화가 났다.
테시우스는 저도 모르게 이를 부득 갈았다.
‘심지어 나이도 속였어. 나만 모르고 있었다고!’
바보같이, 열다섯이라 착각한 저를 얼마나 멍청하게 보았겠는가.
모든 것이 불쾌하고 짜증이 솟구쳤다.
왜 이런 마음이 드는지도 알 수 없었다.
둘이서 뭘 하든 내 알 바는 아닌데 그냥 뭔가, 자꾸만 심기에 거슬렸다.
‘아무래도 머리를 식혀야겠어.’
테시우스는 가운 하나만 챙겨 성큼 욕실로 향했다.
수도꼭지를 돌리자마자 쏟아지는 차가운 냉수가 열 오르는 정수리를 매섭게 때렸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술기운 때문인지 전신의 열기가 쉬이 가라앉질 않았다.
테시우스는 아렌이 만들어 준 비누로 몸을 벅벅 문지르고, 물기를 대충 닦자마자 로션을 마구잡이로 발랐지만 여전히 어딘가가 뜨거웠다.
“……망할!”
아무래도 평소보다 더 취한 모양이었다.
테시우스는 낮게 외치며 들고 있던 로션 통을 침대 위로 집어 던졌다.
바로 그 순간.
어디선가 꺅 하는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굉장히 낯설고, 또 어린 축에 속하는 여자의 목소리.
뭐지?
그러자 이번에는 퍽퍽 하며 뭔가 푹신한 것을 내려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소리가 날 곳은 하나뿐이었다.
‘……아드넬.’
좁아진 눈동자가 침실 안쪽에 붙은 문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