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27)화 (27/141)

27화

말투가 조금 퉁명스럽게 느껴지긴 했지만, 리헬은 필립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마저도 없었으면 아드넬이 뭐라 하던 곧 죽어도 안 줄 생각이었는데 물으면서도 뺨이 살짝 달아오른 것이 아직 부끄러운 줄은 아는 모양이었다.

제이든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필립의 옆구리를 쿡 찌르자 그는 마지못해 가방 안의 화장수를 꺼내 불쑥 내밀었다.

“……이거.”

“네……? 이게 무슨…….”

“아, 저번에 만들어 달라며!”

필립은 괜히 화를 내며 억지로 리헬의 손에 화장수를 덥석 쥐여 주었다.

“착각하지 마요, 그쪽 부탁 전달해 준 거 아니니까. 그냥 아드넬이 너무 착해서 그래! 그러니까 고마워하려거든 아드넬한테 직접 가서 해요! 알겠어?”

“어…….”

“에이씨, 이걸 어느 세월에 나눠 줘? 이리 내! 그쪽이 알아서 나눠 주든지 말든지!”

제이든이 메고 있던 가방을 빼앗은 필립은 기어코 가방째로 리헬에게 안겨 주고 말았다.

그리곤 잔뜩 성난 걸 보여 주기라도 하듯 곰처럼 쿵쿵 소리를 내며 빠르게 자리를 떴다.

“……그럼 저도 이만.”

“네, 네에…….”

사실 제이든도 그녀들의 얼굴을 오래 보고 싶진 않아 필립이 리헬에게 제 할 일을 떠넘기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리헬은 멍한 얼굴로 그 두 사람의 뒷모습만 쳐다볼 뿐이었다.

* * *

같은 시각, 아드넬은 화장수를 나눠 주라는 임무를 준 걸 까맣게 잊은 채 혼란스러운 얼굴로 입만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러니까 2황자에게 거의 끌려오다시피 해서 도착한 곳은 그의 새로운 서재였다.

이젠 아드넬의 침실이 된 서재에서 그대로 옮겨 온 책 덕분에 새 서재임에도 오래 묵은 종이 냄새가 쿱쿱하게 풍겼다.

그리고 문 앞에 막 도착하자 황태자는 아드넬에게 윽박질렀던 남자를 향해 말했다.

“후작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게.”

“예, 전하.”

바스토르의 뒤를 따르던 파비오 후작과 기사 두 명이 문 앞을 지키듯 섰고, 그렇게 서재 안에는 아드넬과 테시우스, 그리고 황태자 세 사람만이 남았다.

“마실 거야?”

한편 테시우스는 탁 하고 문이 닫히자마자 대뜸 반말을 꺼내며 여러 종류의 술이 든 진열장을 열었다.

그 모습에 아드넬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지만 바스토르는 익숙하다는 듯 답했다.

“당연한 걸 물어. 참, 그러고 보니…….”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아드넬을 향했다.

“이름이 아드넬이라던가?”

“예, 그, 그렇습니다.”

“함께 들지. 편히 앉도록 해.”

바스토르는 소파에 털썩 걸터앉으며 가볍게 손짓했다.

아드넬은 쭈뼛대며 연신 눈치를 살폈으나 테시우스도 잠자코 있기에 하는 수 없이 황태자 맞은편에 조심스레 앉았다.

이윽고 그가 유리잔 세 개와 갈색빛으로 찰랑거리는 술병을 들고 오자 바스토르가 말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들어 볼까?”

“듣……는다니 무엇을…….”

“그대에게 궁금한 것이 아주 많아서 말이야.”

바스토르가 싱긋 웃는 사이 쪼르륵 소리를 내며 술이 잔을 채웠다.

독한 알코올 냄새가 코끝에 어른거렸다.

그리고 두 형제는 얼음도 넣지 않은 미지근한 위스키를 곁들일 안주 하나 없이 냅다 들이켰다.

“……음. 오랜만에 마시니 좋군.”

“…….”

테시우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런 대낮부터 들이키는 독주라니, 심지어 퍽 익숙해 보이기까지 했다.

반면 아드넬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잔만 쳐다볼 뿐 들지 않고 있었다.

“안 마실 건가?”

“아……. 그, 그게…….”

“편히 들어도 돼. 그저 이야기를 조금 듣고자 함이니.”

그 다정한 음성에 아드넬은 결국 두 뺨을 살짝 붉히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 잘생겨서 정신을 못 차리겠어……!’

사실 취향으로 따지자면 테시우스 쪽이 더 가까웠다.

그는 남성적인 매력이 차고 넘치는, 소설에서나 존재하는 줄 알았던 ‘떡대공’ 덩치를 실제로 가진 남자였다.

그리고 그것이 못내 마음에 들긴 했지만 솔직히 지금은 황태자에게 더 기울었다.

정확히는, 테시우스 때문에 잔뜩 긴장한 채로 피곤한 나날을 보내는 와중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더없이 다정하고 착하게 구는 미남을 마주하니 마음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것이다.

그는 2황자에 비해선 키도 체구도 작은 편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고 테시우스가 압도적으로 큰 것이었다.

황태자는 호리호리한 축에 속할지언정 어깨도 넓고 키도 컸다.

얼굴은 거장이 빚은 조각상 같은데 살아 움직이는 사람인 데다 성격도 목소리도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이러하니 자꾸만 그에게 시선이 가며 절로 얼굴이 붉어질 수밖에.

“누가 보면 벌써 한바탕 취한 사람인 줄 알겠군.”

그러던 그때, 어딘가 부루퉁한 목소리가 아드넬의 귀를 꿰뚫고 지나갔다.

이번엔 또 뭐가 불만이기에 시비람?

‘이러니 좋아할 수가 없지……!’

아드넬은 불쑥 드는 오기에 냅다 잔을 들어 벌컥 들이켰다.

단숨에 유리잔이 바닥을 보이자 바스토르가 놀라 입을 벌렸다.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닌가?”

“……괜……찮습니다.”

아드넬은 쓰읍 하며 입가를 소매로 훔쳤다.

그 모습에 바스토르의 눈매가 반달 모양으로 부드럽게 휘었다.

“많이 긴장하지 않은 듯해 다행이군. 사실 나도 그대에 대해선 듣기만 한 터라, 내 동생을 치료하고 있는 대단한 이가 퍽 궁금하지 뭐야.”

그래서 찾아왔구나, 아드넬은 생각하면서도 놀랐다.

그녀가 일전에 생각한 것이 완전히 틀린 탓이다.

‘박대받는 비운의 황자라고 생각했는데. 견제하긴커녕 끔찍이 아껴 주잖아?’

테시우스를 향한 황태자의 눈엔 진심 어린 온기가 담겨 있었다.

2황자도 마찬가지로 바스토르를 불편해하긴커녕, 막상 자기들만 남게 되자 당연하다는 듯 반말을 쓰기까지 하니 이건 도저히 사이가 나쁘다고 볼 수 없었다.

아직까지도 황후가 견제를 거두지 않아 저가 만든 화장품 하나 없이, 본성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별궁에서 지내는 거라 짐작했는데 아무래도 다른 이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머릿속으론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아드넬은 바스토르에게 시선을 집중한 채 아첨을 떨었다.

여기에 이어질 대답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과찬이십니다. 하잘것없는 재주에 불과하나 이리 불러 주신 만큼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이가 말도 아름답게 하니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동시에 즐겁군.”

순간 말한 당사자를 제외한 두 사람 모두 온몸이 굳어 경직되었다.

테시우스는 소름이 돋는다는 듯 팔을 쓸어내리며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바스토르를 쳐다보았다.

이따금 그가 작정하고 하는, 남녀를 불문하는 바스토르 특유의 능글맞은 장난이 시작된 것인데 이건 언제 봐도 통 적응이 안 되었다.

여기서 그 태연하고도 느끼한 대답에 놀란 건 아드넬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녀에게는 어느 정도 먹혀들었다.

‘너무 예쁜 사람이 말하니까 하나도 안 이상하네…….’

소설에서 볼 때는 입에 버터를 물고 말하는 것 같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는데.

막상 제 눈으로 직접 보면서 들으니까, 그것도 황홀하리만큼 예쁜 목소리와 얼굴로 자신을 보며 말하니까 이상하긴커녕 설레기까지 했다.

‘어쩜 2황자와는 달라도 이렇게 다르지?’

누구는 사지를 찢어서 성벽에 건다는데 누구는 눈과 귀가 동시에 즐겁다며 듣기 좋은 말만 하다니.

한배에서 태어난 형제는 아니지만, 그래도 형제인데.

사실 외모도 그렇고 말하는 것도 달라도 너무 다른데 그래서 더 좋았다.

아드넬은 마치 홀린 것처럼 헤헤 작게 웃어 보였다.

그 모습에 테시우스의 미간이 재차 찌푸려졌다.

‘아까부터 왜 저러는 거야?’

테시우스는 불편하다는 듯 인상을 쓰며 주인 만난 강아지처럼 헤헤거리는 아드넬을 쳐다보았다.

저한테는 웃긴커녕 언제나 무표정에 거리를 두던 태도로 굴던지라 바스토르에게 보이는 유순한 모습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기분도 은근히 나빴다.

그런 와중에 바스토르가 말을 덧붙였다.

“그래서 테시우스의 치료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지?”

얼굴에 홀려 잠시 잊고 있었지만, 황태자가 별궁을 찾아온 본래 목적은 그것이었다.

안 그래도 2황자에게 말해 줘야 했던 내용이었던지라 아드넬은 금세 진지해진 얼굴로 답했다.

“지금은 간지럼증을 가라앉혀 주는 스킨과 상처 연고, 피부의 건조를 막아 주는 바디 로션만 드렸지만 그 외에 여러 가지 화장품을 만드는 중입니다. 그리고 침방에서도 새 침구를 만드는 중입니다.”

“음? 침구는 왜?”

“라크란 병을 앓는 사람은 여러 가지 지켜야 할 생활 규칙이 많습니다. 그중 하나가 옷과 침구류는 땀을 잘 흡수하는 면으로 된 손재를 사용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동물성 재질의 섬유는 피하고 옷 또한 끼는 것 대신 헐렁한 것으로 입어야 하는데 지금 2황자 전하께선 그 안 좋은 걸 모두 사용하고 계시더군요.”

보통 황성에서 사용되는 침구와 옷은 가죽과 깃털을 주재료로 했다.

따듯함과 푹신함을 위해 바닥에 까는 러그나 겨울에 입는 망토는 털가죽으로, 베개와 이불에는 거위 깃털을 넣어 만들었는데 문제는 그게 아토피안에게 있어 최악이라는 점이었다.

아토피 피부염 환자의 80%는 연령이 증가함에 따라 호흡기 알레르기 질환이 진행될뿐더러, 설령 호흡기 알레르기가 없더라도 아토피안에게 있어 동물성 섬유는 꼭 피해야 할 최우선 항목이었다.

반면 아드넬의 대답에 바스토르는 오늘도 어김없이 터질 듯한 테시우스의 셔츠를 응시했다.

매번 옷을 맞추는데 왜 항상 저렇지.

아직도 몸이 크는 중인가.

그런 생각에 절로 한쪽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리고 주방장님께도 라크란 병을 악화시키는 식재료를 제외한 식단으로 준비해 달라 말씀드렸으니 빠른 시일 내에 차도를 보이실 겁니다.”

“차도라면야 이미 지금도 보이는걸.”

그때 바스토르가 아드넬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언제 인상을 썼냐는 듯 싱긋 웃어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