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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26)화 (26/141)

26화

퍽!

잠깐 눈을 비비던 찰나, 누군가와 부딪힌 아렌은 어 하고 소리 낼 틈도 없이 비틀거리다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딱딱한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자마자 꼬리뼈에서 느껴지는 찌릿한 고통에 핑 눈물이 돌며 절로 두 눈이 질끈 감겼다.

그러나 그 순간.

지금껏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곱디고운 미성이 아드넬의 귀를 관통했다.

“이런, 앞을 잘 보고 걸어야지.”

여자의 목소리는 아니었으나 남자의 것이라 하기에도 더없이 듣기 좋은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눈으로 보는 것도 아닌 귀로 들리는 목소리가 어떻게 아름답다 느껴질 수 있을까.

아드넬은 놀라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그곳엔, 태양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을 가진 미남이 웃는 낯으로 제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괜찮은가?”

“…….”

“음. 머리를 부딪치진 않은 것 같은데.”

아드넬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자신만 올려다보자 그가 조금 멋쩍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누구든 저 사람을 마주하면 나처럼 아무 말도 못 할 거라고, 아드넬은 생각했다.

‘그런데 왜 익숙한 느낌이 들지?’

어디서 한 번 본 것 같은데, 하지만 이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를 잊을 리가 없어 조금 혼란스러웠다.

와중에 자수정처럼 반짝이는 보랏빛 눈동자는 따듯한 온기를 한가득 품고 있었다.

목소리는 다정했고, 입가에 머무른 미소도 부드러웠다.

대체 누구지?

아드넬이 멍하니 쳐다만 보며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그때, 남자의 뒤에 서 있던 연한 녹빛 머리의 사내가 대뜸 외쳤다.

“이놈! 당장 엎드려 용서를 빌어도 모자랄 판국에 감히 황태자 전하의 호의를 무시할 셈이냐!”

황태자라고?

여름 햇살처럼 화사하게 웃으며 나한테 손을 내밀고 있는 미남이, 그 황태자라고?

‘2황자의 이복형제가 이 사람이란 말이야?’

제아무리 이복형제라지만 테시우스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외형이며 태도와 말투가 아드넬의 뒤통수를 거세게 후려쳤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드넬은 차마 그의 손은 잡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이보다 더 굽힐 수 없을 만큼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소, 송구합니다……! 천한 것이라 전하의 존안을 감히 알아뵈지 못했습니다……!”

“괜찮다. 충분히 그럴 수 있지.”

갈 곳 잃은 손을 거두며 매만지던 황태자, 바스토르는 웃는 낯으로 대답하면서도 허리를 넙죽 숙인 아드넬을 위아래로 샅샅이 살펴보았다.

하인이나 시종이 입는 유니폼이 아닌 평복 차림의 남자아이.

하지만 그가 입은 셔츠와 바지는 평범할지언정 일개 평민이 입을 수 있는 원단이 아니었고, 창백하리만치 새하얀 피부며 그 위에 오밀조밀 모인 매끄러운 이목구비며 잘 익은 자두처럼 탐스러운 입술은 퍽 마음에 들 만큼 반반했다.

그리고 그 눈동자.

유명한 휴양지의 바다를 고스란히 담아 온 것 같다던 그 눈.

‘……이놈이구나.’

바스토르는 확신했다.

모두 파비오 후작에게 들은 그대로였다.

“네가 테시우스의 라크란 병을 치료한다는 아이구나.”

“그, 그렇습니다……!”

“잘 되었군. 그러잖아도 널 보려던 참이었다.”

날 보려던 참이었다고?

그럼 설마 이 별궁까지 온 것도 그 때문인가?

아드넬은 놀란 나머지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제 등 뒤로 황태자의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낮은 묵직한 저음이 들려온 순간 그녀는 또 한 번 놀라 흠칫 몸을 떨고 말았다.

“……황태자 전하.”

이젠 아드넬에게도 퍽 익숙한 목소리는 다름 아닌 테시우스였다.

바스토르가 온다는 말을 듣고 마중을 나온 차에 복도에서 딱 마주친 것이다.

‘그런데 이놈은 뭘 하고 있는 거야?’

힘들진 않나 싶을 만큼 잔뜩 숙인 허리가 은근히 눈에 거슬렸다.

테시우스는 미묘하게 눈썹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이내 터벅터벅 걸어와 아드넬이 입고 있는 셔츠 뒷덜미 부분에 손가락을 걸어 위로 끌어 올렸다.

“어어……!”

“아주 이마가 땅에 닿겠구나.”

강제로 아드넬의 허리를 세운 테시우스는 그제야 황태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주 오랜만은 아니지만 그래도 반가운 얼굴에 바스토르가 싱긋 웃어 보였다.

“여어, 테시우스. 잘 지냈나?”

“저야 늘 똑같지요.”

“그래? 듣기로는 전혀 아니던데.”

바스토르가 손을 들어 아드넬을 가리켰다.

“저 아이가 만든 화장품이 효과가 아주 뛰어나다지?”

“……벌써 소문이 났습니까?”

“알면서 모른척하긴. 황후 폐하께서 부르시는 걸 네가 막고 있잖아.”

황후가 날 불러?

그리고 그걸 2황자가 막고 있어?

아드넬은 새삼 놀란 눈으로 테시우스를 흘긋 쳐다보았으나 눈알을 잘못 굴렸다간 또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아 냉큼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그보다 여기서 계속 이야기를 나눌 순 없으니 이만 자리를 옮기지.”

“……아, 서재는 안 됩니다.”

“응? 서재는 왜?”

“침실로 바꿨습니다.”

테시우스는 아드넬이 했던 것처럼 흘긋,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모습에 바스토르가 흥미롭다는 듯 호오 소리를 내며 눈을 반짝였다.

“우리 둘의 오랜 아지트였는데 아쉽군.”

“위치만 바뀐 겁니다. 그럼 가시죠.”

테시우스는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것도 고작 몇 걸음, 아드넬이 저를 따르는 대신 몸을 뒤로 빼며 벽에 가까이 붙은 채 꼼짝하지 않자 그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곤 팔을 뻗어 냅다 아드넬의 손목을 낚아챘다.

“너도 따라와라.”

“저, 저 말입니까? 어, 그, 그럼 저는 황태자 전하께서 가시면 그 뒤에…….”

“됐으니 오기나 해.”

잡아끄는 힘이 어찌나 센지 아드넬은 어어 하는 소리를 내며 얼결에 테시우스가 가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보폭도 넓어서 그가 한 번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아드넬은 그 배로 발을 빠르게 놀려야 했다.

한편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바스토르의 얼굴 위로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것 봐라……?’

눈치를 보아하니 모르는 것 같은데.

테시우스는 지금껏 저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정을 주거나 마음을 붙이지 않았다.

흑표범으로 한번 변한 후로 찾아온 라크란 병은 이상하게도, 인간으로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테시우스는 지금도 그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는 오직 그와 바스토르, 둘만이 알고 있는 비밀로 대략 반년에 한 번씩 테시우스는 8년 전 그때처럼 흑표범으로 변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다시 사람으로 돌아왔다.

테시우스가 별궁에서 홀로 지내는 이유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당연하지만 긁으면 긁을수록 크게 번지는 피부병과 흑표범으로 변하는 저주는 그를 사람들과 동떨어지게 만들었고, 그럴수록 테시우스는 스스로를 음지로 몰아넣었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마음을 주었던 아이, 아렌.

바스토르는 그 꼬질꼬질한 남자아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파비오 후작이 아드넬이란 평민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을 때, 그리고 처음으로 마주친 지금.

그 ‘아드넬’이 ‘아렌’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름도 비슷할뿐더러,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인도 같았다. 머리 정도야 얼마든지 염색할 수 있는 것이고.

얼굴도 좀 바뀌고 목소리도 다르긴 하지만 보기 드문 바닷빛 눈동자와 느낌은 분명 아렌, 그 아이가 맞았다.

‘무슨 이유로 감춘 건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그때의 아렌은 테시우스의 정체를 모르고 있으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기막힌 우연이라니, 게다가 아무리 정체를 몰랐다 한들 자신의 과거를 감추고 있다는 게 영 꺼림칙했다.

다만 제 이복동생은 전혀 알아보지 못한 눈치였다.

원래도 곰처럼 눈치가 없는 편이긴 하지만, 만약 아렌이라는 걸 알았더라면 저것보다 훨씬 더 다정하고, 애틋하게 대했을 테니까.

‘……일단 좀 지켜볼까.

아렌의 수상쩍은 목적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약간의 호의를 얻어 낼 필요가 있었다.

앞장서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뒤를 따르는 바스토르의 얼굴 위로 묘한 미소가 진하게 떠올랐다.

* * *

한편 그 시각, 아드넬의 작업실 안에서 필립은 연신 툴툴거리며 주섬주섬 화장품을 챙기고 있었다.

다름 아닌 하녀들에게 줄 화장수였다.

“아드넬은 착해도 너무 착해! 그래서 싫어! 오히려 더 이용하려 들면 그땐 어떡하려고? 이미 한 번 당해 봤으면서 또 그런다고, 또.”

“…….”

“……아, 진짜 주기 싫어!”

필립은 화장수를 챙기는가 싶더니 곧 으악 하는 고성과 함께 소파 위로 발라당 엎어졌다.

그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할 때마다 보이는 행동이었다.

제이든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사실 필립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중이었다.

‘네 호의가 값싸지길 원치 않아.’

그에겐 이 세상 그 무엇보다 값진 것이 아드넬이었다.

그리고 그런 아드넬이 만든 것들은 아드넬 다음으로 값진 것이었다.

한데 그 아름답고 귀한 호의가, 막상 하녀들에게 갔을 때 당연하다는 듯 권리를 주장하는 반응으로 돌아올까 그게 못내 싫고 걱정되었다.

하지만 제이든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아드넬은 하녀들에게 줄 화장수를 만들었고, 나눠 주라고 했다.

그럼 그 말대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이든은 엎어진 필립 대신 마저 화장수를 챙겨 일어섰다.

“뭐야, 진짜 줄 거야?”

“아드넬이 주라고 했으니까.”

“와……. 무슨 입력된 명령만 듣는 기계도 아니고!”

“그건 또 뭔 소리야?”

“아드넬이 그랬어, 제이든은 가끔 보면 기계 같다고. 나도 처음엔 무슨 말인가 했는데 진짜 그러네.”

필립은 조금 질린다는 얼굴로 제이든을 응시했다.

물론 깔끔하게 무시당했지만.

“그래서 갈 거야, 말 거야?”

“……아, 정말!”

하지만 아드넬의 말대로 할 수밖에 없는 건 필립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그녀 한정으로 물러지다 못해 흐물흐물해지는 두 사람은 곧 침실에서 나와 걸음을 옮겼다.

아직 대낮이기도 하고, 시커먼 사내들이 하녀들의 침소까지 찾아갈 순 없으니 당장 눈에 보이는 사람부터 줄 생각이었다.

필립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눈알만 열심히 굴리며 제게 터무니없는 부탁을 했던 양심 없는 하녀들을 찾았다.

머지않아 그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긴 빨랫줄에 세탁물을 널고 있는 리헬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세탁실 하녀인 모양이라 필립은 생각하며 창문을 활짝 열고 외쳤다.

“거기! 이리 좀 와 봐요!”

아직 이름은 모르는지라 ‘거기’라는 호칭이 최선이었다.

어차피 살갑게 굴기도 싫었지만.

반면 리헬은 필립을 발견하자마자 흠칫 몸을 떨었다.

다른 하녀들과 잠시 눈빛을 교환하던 그녀는 마지못해 창문 가까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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