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곱게 접혀 있는 새하얀 천 뭉치.
카르카스에 있는 그녀의 집, 침대 옆 협탁 서랍에 넣어 둔 것이었다.
두 사람이 제 방을 뒤질 리는 없으니 딱히 자물쇠는 안 걸어 놨지만, 그래도 이걸 어떻게 알고 가져온 거지?
아드넬의 눈동자가 혼란으로 흔들렸다.
그 시선을 받은 제이든이 말했다.
“원래 알고 있었어. 아드넬도 알잖아, 나 눈치 빠른 거.”
“그……렇긴 한데,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몰라. 확신할 수 있어. 나도 한집에서 같이 살게 되고 난 후에야 알았으니까.”
사실이었다.
눈치 빠른 그조차도 함께 여행하는 동안엔 전혀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그만큼 아드넬은 태어나길 남자로 태어난 것처럼 항상 남장을 유지했다.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아서 원래는 계속 모른척하려고 했어. 하지만 여기는…….”
“……황궁이지.”
“……응. 미안.”
아드넬은 잠시 가방 속 새하얀 천 뭉치를 들여다보는가 싶더니 곧 꺼냈던 용기들을 도로 집어넣었다.
이불을 무겁게 짓누르던 유리병들은 금세 가방 안으로 들어가 제 자리를 찾았지만 제이든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초조하고, 두렵고, 혹여나 아드넬이 거리를 두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겁이 났다.
티 내지 않으려 애써 봐도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감정들은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잠깐의 정적 뒤, 아드넬이 입을 열었을 때였다.
“……고마워, 제이든. 제이든이 없었다면 나 혼자선 분명 벅찼을 거야. 진심으로, 고마워.”
돌아온 대답은 그가 두려워하던 것들로 가득 찬 눈동자가 아니라, 제 말마따나 진심 어린 감사를 담은 채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였다.
과거의 저를 사랑에 빠지게 만든.
그리고 누구든 보노라면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다정한 미소가 화살처럼 날아와 가슴에 박혔다.
“……어……. 그러니까, 나는…….”
뭐라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제이든은 쥐어짜듯 간신히 몇 마디를 내뱉었다.
이마저도 숨통이 조여와 도중에 멈추고 말았다.
결국 그는 여기서 더 말하는 대신 주먹이 하얗게 질리도록 꽉 움켜쥐고 말았다.
‘나한테…… 고맙다고.’
꺼리고, 수치스러워하고, 어쩌면 제게 거리를 둘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드넬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언제나 일정한 선을 그어 놓는 사람이고, 그걸 넘는 순간 멀어지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녀는 제게 고맙다고 했다.
진심으로 고맙다고.
‘이런 너를, 내가 어떻게…….’
제이든은 붉어졌을 게 뻔한 얼굴을 숨기고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 아드넬이 다시 입을 열었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아니, 사실 많이 놀랐지만 그래도……. 정말 고마워.”
고개를 숙인 그는 보지 못했으나 나지막하게 내뱉는 아드넬의 두 뺨도 조금 붉게 변했다.
고마운 건 사실이지만 솔직히 부끄럽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가족 같은 제이든에게 이런 식으로 들킬지도 몰랐거니와 아무래도 예민한 부분이다 보니 조금 창피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였다.
한 달에 한 번씩 돌아오는 주기가 머지않아 자칫 하녀들의 거처라도 몰래 뒤져야 하나 생각하던 차였는데, 제이든이라면 피치 못할 상황이 찾아왔을 때 적당히 말을 둘러대거나 필요한 만큼 구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아드넬은 애써 얼굴 위에 피어오른 홍조를 가라앉히며 입을 열었다.
머릿속이 여러 가지 생각으로 복잡할 땐 일에 전념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었다.
“나는 작업실에 가 있을게. 제이든도 씻고 필립이랑 같이 작업실로 오면 돼. 그래도 명색이 조수인데, 나 혼자 있으면 괜히 의심 살 수도 있잖아.”
아무렇지 않게 말해 주는 배려가 고마웠다.
제이든도 괜스러운 얼굴의 열기를 간신히 무시하며 답했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
“안 그래도 예민한 사람인데 트집 잡힐 일은 하지 말아야지. 그럼 나 먼저 갈게.”
“알았어.”
“주방장님도 필립이랑 같이 깨워 주고! 이미 늦으셨을지도 몰라.”
“응.”
제 할 말을 마친 아드넬은 곧장 가방을 챙겨 침실을 나섰다.
아무렇지 않게 말하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방금 막 나눈 대화의 내용이 내용인지라 좀 어색한 건 어쩔 수 없어 차마 똑바로 눈을 마주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곧 괜찮아질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제이든이니까.
그는 내 가족이니까.
조용한 복도를 지나며 아드넬이 생각했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테시우스가 말했던 대로 아드넬의 침실이 옮겨졌다.
정확히는 문 하나로 연결된 그의 개인 서재가 침실로 개축된 것인데, 저가 간지러울 때마다 사용인을 불러 데려오라 명하기 번거롭다는 게 그 이유였다.
덕분에 아드넬은 테시우스 대신 번거로워졌다.
‘이러다간 내가 피곤해서 죽겠다…….’
침실이 바뀌고서부터 매일 늦은 새벽, 한창 단잠에 빠진 시각에도 2황자는 벌컥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자기가 간지러우면 일단 들이닥치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는.
“발라라.”
“…….”
어떤 선택의 여지도 주지 않은 채 무작정 바르라 명했다.
막 간지럼증이 도지기 시작할 때 스킨을 바르면 금세 가라앉기 때문이었다.
당연하지만, 그가 편해질수록 아드넬은 피곤해졌다.
더구나 잠을 잘 땐 가슴을 갑갑하게 조이는, 특수 제작한 복대를 풀고 잤는데 더는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
언제나 퀭하던 테시우스의 눈가에 혈색이 돌수록 아드넬의 눈 밑은 점점 시커멓게 물들었다.
이에 별궁 내 사용인은 그녀를 마주칠 때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괜찮으세요, 아드넬 님?”
“요즘 많이 피곤하신가요? 안색이 좋지 못하세요.”
하지만 그런 안부도 잠시, 뒤이어 나오는 말들은 하나같이 비슷했다.
“아드넬 님의 화장품이 정말 효과가 있나 봐요! 얼마 전에 전하께서 제게 일은 할 만하냐며 물어보시지 뭐예요?”
“안 그래도 차 시중을 들다 슬쩍 봤는데 어쩜, 흉터 가장자리에 새 살이 돋으시더라고요!”
“씻고 나서 바르시는 로션 덕분에 더는 피부가 건조하지 않으시대요. 촉촉함이 무척 오래 간다고…….”
클리프는 그녀가 보낸 편지를 받자마자 빠르게 답장을 보냈는데, 아드넬이 필요로 하던 재료도 동봉된 채였다.
덕분에 빠르게 완성한 순한 비누와 바디 로션 같은 화장품은 곧장 2황자의 욕실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사용인들의 증언대로, 그리고 아드넬의 본래 목적대로, 2황자는 점점 유순해지기 시작했다.
예전엔 웃는 얼굴을 보기 힘들었는데 요즘은 씻고 나오면 피식 웃기도 하고 새벽 중에 깨는 일도 많이 줄어들었다.
툭하면 어딜 자르겠네, 쫓아내겠네 하는 말들도 더는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건 분명 좋은 일이었다.
좋은 일인데…….
“나 너무 힘들어…….”
“아드넬…….”
피곤함에 찌든 얼굴에 필립이 울상을 지으며 나지막하게 이름을 불렀다.
그런 그의 옆에 선 제이든도 표정이 좋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제아무리 황자라지만 이렇게나 제멋대로여서야……!’
아드넬은 남자가 아니다.
그녀는 여자고, 남자 행세를 하는 것뿐이다.
만약 제게 여자같이 목소리를 내 보라 하면 뜻대로 되지도 않겠지만 매 순간 그렇게 말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아드넬은 아주 잠시나마 여자로 돌아가 편해질 수 있는 시간마저도 2황자에게 강탈당했다.
가슴을 갑갑하게 조이는 복대는 풀지도 못하고 꼭두새벽에 일어나는 건 물론이요, 잠들었다 막 깬 순간에조차 긴장해야 하는 것이다.
제이든은 얼마 전 멀찍이서나마 본, 그러나 전보다 훨씬 혈색이 돌던 2황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부득 이를 갈았다.
“……아, 그러고 보니……. 그 화장수…….”
“응? 화장수라니?”
“왜, 저번에……. 하녀들한테 주기로 한 거 말이야…….”
그때 아드넬이 꺼낸 ‘하녀’라는 단어에 필립이 와그작 미간을 구겼다.
그러니까, 지난번 마주친 하녀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 주려던 건 결코 아니었다.
그냥 주방에서 냄비를 빌린 뒤 돌아와 “여기도 별수 없나 봐. 그리 갖고 싶으면 자기들이 돈 주고 사면 될 것이지, 하여튼 사람들이 염치가 없어요.” 하며 불평을 늘어놓았을 뿐이었다.
그것도 아드넬에게 한 말이 아니고 제이든에게 작게 속삭이듯 한 말이었는데, 그 작은 수군거림을 포착한 아드넬이 “무슨 일인데 그래?” 하며 계속 캐물어 마지못해 설명한 것이다.
하지만 설마하니 진짜 만들어 주겠다고 할 줄은 몰랐던 터라, 오히려 필립이 더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
“그 하녀들한테 뭐하러 만들어 줘! 안 그래도 2황자 때문에 억지로 만드는 판국에, 별궁에까지 갇혔는데! 여기 사람들이 뭐가 예쁘다고……!”
“그래, 아드넬. 굳이 만들어 줄 것 없어. 우리는 2황자만 낫게 해 주면 되잖아. 뭐하러 네가 별궁 사용인들까지 챙겨 줘.”
제이든도 이번만큼은 필립의 편에 서 아드넬을 설득했다.
하지만 아드넬은 그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가볍게 저어 보였다.
“너무 그러지 마. 오죽 갖고 싶었으면 그랬겠어. 주인님이 만든 화장품은 귀족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수준이니까 나한테라도 부탁하고 싶었겠지. 그리고 이미 다 만들어 놨어.”
“이미 다 만들었다고?”
“응, 그러니까 두 사람이 좀 전해 줘. 작업실 책상 위에 올려놨으니까…….”
와중에 생리통까지 겹쳐, 아드넬은 죽어 가는 얼굴로 침대 위에 엎어져 있다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아랫배가 끊어질 것같이 아프고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이대로 편히 쉴 시간이 없었다.
이제 곧 황궁에 큰 행사가 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겹쳐도 지금…….’
올해로 스물넷이 되는 황태자는 아직까지도 짝이 없었다.
병상에 누워 있는 황제 대신 국정을 돌본다는 핑계로 여태 미룬 것인데, 나이가 나이인 만큼 더는 미룰 수 없었다.
따라서 황태자비 후보로 황궁에 들어오는 두 공녀를 위한 축하 연회가 잡혔고, 연회가 열리면 2황자도 반드시 참석할 수밖에 없어 아드넬은 새로운 화장품을 만들어야만 했다.
카멜리아 스킨은 냉장 보관을 해야 하는 데다 차갑게 해야 효과가 좋아서, 평소에도 수시로 바를 수 있는 간편한 화장품이 필요한 것이다.
“나 다녀올게…….”
필립과 제이든이 뭐라고 말하며 그녀를 붙잡았지만 아드넬의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드넬은 복도를 지나는 내내 나사 하나 빠진 사람처럼 비척거리며 작업실로 향했다.
매 순간 긴장한 채로 지내자니 여간 졸린 게 아니었다.
아무래도 작업실에서 조금 눈을 붙여야 하나, 생각하던 그때였다.
“……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