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자, 봐 봐, 형씨. 아니, 리들리 님. 이렇게, 이 오크 리프를 손바닥에 쫙! 펴서 올린 뒤에 말이야, 뜨거운 쌀밥을 먹을 만큼 올리고 이 제육, 아니, 고기를 올리는 거야. 그리고 접어! 이렇게! 다음엔 바로 한입에 먹어!”
와앙-
살짝 보랏빛이 도는 쌈은 그가 벌린 입 크기만큼이나 컸다.
당연하지만, 필립에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는 입 한가득 제육 쌈을 밀어 넣은 뒤 와그작 소리가 나도록 사정없이 씹었다.
이를 본 리들리는 어딘가 파리하게 질린 기색이었다.
저만한 크기의 한입이 실존할 줄이야, 얼굴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이걸 손으로 싸서 먹으라니.’
손은 요리하면서 진작 씻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품위 없는 방법은 지금껏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얼굴 위로 난감함이 어리자 아드넬이 냉큼 치커리와 오크 리프를 겹친 뒤 적당한 크기의 쌈을 만들었다.
“여기, 아- 하세요.”
“아, 아드넬 님, 이게 갑자기 무슨.”
“어서요, 직접 만드셨는데 맛도 한 번 보셔야죠.”
이걸 직접 만들었다고 할 수 있나…….
그가 한 일이라곤 볶아서 접시에 담은 것밖에 없으나, 리들리는 아드넬의 배려를 눈치채고 순순히 입을 열어 받아먹었다.
물론 도중에 자기가 손가락으로 살짝 집어 밀어 넣긴 했지만.
이윽고 필립이 먹었을 때처럼 와삭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입 안에서 반으로 쪼개진 푸릇한 채소 사이로 뜨끈하지만 조금은 끈적한, 하지만 아무런 간이 되지 않은 ‘밥’의 맛이 먼저 느껴졌다.
그러나 싱겁다고 느낀 건 딱 1초뿐이었다.
뒤이어 혀의 미각을 자극한 건 적당한 간의 육질이었다. 생각보다 많이 짜지 않은 고기는 쫄깃했고, 또 매콤했다.
리들리는 딱히 매운맛을 즐기지 않는 편에 속했는데 그 새빨간 고춧가루가 들어간 것 치고도 확실히 아주 맵진 않았다. 여기에 설탕도 들어가서인지 은근히 매운맛을 중화시켜 주는 것도 같았다.
입 안에서 느껴지는 맛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적당히 물렁한 양파의 단맛과 대파의 풍미, 그리고 다진 마늘 특유의 향이 한데 어우러지며 내는 맛은 그야말로 완벽했다.
어디 하나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이 없을 만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나 새삼 생각될 만큼, 그저 놀라웠다.
처음엔 이런 품위 없는 방법이라니 하며 꺼렸던 게 부끄러워질 정도로 싸서 먹는 채소에서 느껴지는 아삭한 식감은 없으면 무척 아쉬울 것 같았다.
마침내 한입을 삼키고 난 뒤의 리들리는 그야말로 감격한 얼굴이었다.
“어떻게…… 이런 맛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드넬은 그가 미각의 향연에 빠진 사이 따라 둔 막걸리를 내밀었다.
별궁에 오기 전, 카르카스의 집에서 다 마시고 새로 담근 것인데 드디어 때가 된 것이다.
리들리는 탁한 우유처럼 희끄무레한 막걸리를 잠시간 쳐다보는가 싶더니 이내 꿀꺽, 한 모금 들이켰다.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필립은 은근히 기대하는 눈으로, 아드넬은 씨익 웃는 낯으로, 제이든은 예의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리들리의 입이 열렸다.
“아드넬 님.”
리들리는 어딘가 진지하기까지 한 얼굴이었다.
그가 사뭇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자 아드넬은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되어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얼마 전 생일이었던 조수분을 위해 만드신 거라 하셨지요.”
“예.”
“이걸 무척 좋아하셔서, 약속도 하셨다고요.”
“그랬지요.”
무슨 말을 하려기에 묻는 것일까? 아드넬이 생각하던 찰나, 리들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음껏 쓰십시오!”
“예?”
“굳이 생일이라서, 약속해서, 그러실 것 없이 앞으로 주방은 원하시는 대로 마음껏 쓰십시오! 아니, 써 주십시오!”
아드넬은 순간 벙쪄 커진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러나 리들리는 정말로 진심인 것처럼 보였다. 그의 갈색 눈동자가 흥분기로 반짝였다.
“이런 음식을 한 번만 만든다는 건 말도 안 됩니다! 그거야말로 벌 받을 일이지요, 더구나 누구든 먹으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요리인데!”
“아…….”
“뭐야, 형씨 뭘 좀 아네? 마음에 들어!”
“필립.”
“아, 아니. 리들리 님! 마음에 들어!”
“존칭은?”
“아, 정말 그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해? 술 마시면 다 친구야! 그냥 말 놓으라고! 불편해 죽겠어.”
“뭐……. 그쪽도 나이가 좀 있어 보이니, 형이라고 부른다면 허락하지.”
“아니 이것 봐요, 리들리 님! 형이라니? 나 아직 창창한 20대야!”
“일 년밖에 안 남았으면서……?”
“아드넬까지 그러기야? 이 주방장님은 못해도 40대는 되어 보인다고!”
“난 30대다.”
“형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아드넬은 쉴 새 없이 오가는 대화에 결국 못 참고 소리 내어 웃었다.
오랫동안 남장을 하다 보니 본래 제 목소리는 거의 잊어버린 수준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맑고 깨끗한 웃음소리에 제이든이 살짝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역시 아드넬은 웃을 때가 제일 예뻤다.
그리고 본래 느끼던 이 일상을, 비록 그들의 아늑한 집은 아니지만 이 별궁에서나마 다시금 느낄 수 있게 된 것에 무척 감사했다.
“자, 그럼 먹어 보자고!”
이만하면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는 듯 필립이 주저 없이 치커리를 집어 들자 이젠 리들리도 체면이고 품위고 신경 쓰지 않는지 마찬가지로 오크 리프를 집어 들었다.
그사이 아드넬과 제이든은 막걸리가 찰랑거리는 질그릇을 가볍게 맞부딪혔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저들을 지켜보는 눈이 바로 아래에 있다는 것을.
* * *
‘……이 시간에 뭘 하고 있는 거야?’
간만에 느껴 보는 평화로운 산책이었다.
미칠듯한 가려움증이 사라지고 난 뒤 실로 오랜만에 편안히 잠들었다가 깨어 밤 산책이나 할 겸 별궁 후원을 거닐던 중, 2층 테라스에서 다소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리기에 고개를 들어보니 아드넬은 물론이고 그의 조수라는 사람들과 리들리까지 한데 모여 무언가를 먹고 있었다.
‘이제야 식사를 하는 건가?’
그렇다기엔 시간이 꽤 지났는데.
식당에서 먹는 것도 아니고.
테시우스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으나 곧 고개를 돌렸다.
사실 걷다 보니 뒤늦게 허기가 밀려와 리들리에게 요깃거리라도 부탁할 생각이었는데, 저리 웃고 떠드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오늘은 알아서 해결해야 할듯싶었다.
간만에 실컷 웃는 리들리를 방해하고 싶진 않아 테시우스는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다만 후원을 돌아가기는 영 귀찮아서 별궁을 빙 둘러싸듯 나 있는 복도의 창문을 익숙하게 열고 들어갔다. 환기를 위해 늘 조금씩 열어 두는 곳이 있어 밖에서도 충분히 열 수 있었다.
허리쯤 올라오는 높이의 창문을 단숨에 훌쩍 뛰어넘은 테시우스는 ‘당장 먹을 만한 음식이 있으려나.’ 하는 생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주방에 거의 다다르자, 바닥만 보고 걷던 그의 눈에 얇은 빛줄기가 보였다.
고개를 들어 보니 불이 꺼져 있어야 할 주방 문틈 사이로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새어 나오는 건 비단 불빛만이 아니었다.
“……이게 대체 뭐람?”
“냄새가 좀 맵긴 한데 그래도 확실히…….”
“이런 음식은 처음 봐. 정말로 주방장님이 만드신 것 맞아?”
“그렇다니까. 오늘 저녁 뒷정리가 끝나고서도 할 일이 있으시다며 혼자 주방에 남으셨잖아.”
작게 소곤대는 목소리가 퍽 다양했다.
테시우스는 저도 모르게 기척을 죽인 채로 문 가까이 다가가 내부 상황을 살폈다.
주방 안엔 아직 앳된 얼굴의 하인 두 명과 하녀 한 명이 있었는데, 그들을 보는 순간 일전에 리들리가 했던 말이 번쩍하고 떠올랐다.
‘그, 그것이 요즈음 밤에 몰래 들어오는 사용인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번 달 식자재비가 평소보다 많이 나온…….’
갑작스레 늘어난 지출의 이유를 묻고자 불렀을 뿐인데 리들리는 연신 그의 눈치를 살피며 달달 떨었다.
사실 식자재 관리는 주방장의 고유 권한인 만큼 책임 또한 그에게 있었다.
다만 큰 벌을 받을까 겁먹은 듯 보여 ‘신경 쓰지 않으니 알아서 하라.’ 하곤 그냥 돌려보냈었다.
그런데 저리 어린 사용인들이 여전히 주방에 들어오는 걸 보니, 리들리도 오죽 배가 고프면 그럴까 하는 마음에 그냥 둔 모양이었다.
물론 테시우스가 신경 쓰는 건 그쪽이 아니었다. 그는 하녀가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넓은 팬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매운 냄새…….’
어딘가 굉장히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익숙한 느낌이 드는 냄새였다.
처음 맡아보는 향을 그리 느낄 수 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던 와중 하녀가 잠시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손가락을 뻗어 팬에 남은 양념을 한 번 쓱 훑어 냉큼 입에 넣었다.
그리고 잠시 후.
“……와, 이거 진짜 맛있어!”
“뭐? 이게 맛있다고?”
“야, 얘 매운 거 좋아하잖아. 우린 못 먹어.”
“아니, 그게 아니라 진짜 생각보다 안 매워. 먹어 봐.”
팬에는 고기를 볶고 남은 양념만 있던 것이 아니라 고기도 조금 남아 있었다. 아드넬이 원체 많은 양을 재워 두어 접시 하나에 전부 올리기엔 자리가 부족했던 것이다.
하녀는 냉큼 포크를 들고 와 적당한 크기의 제육을 푹 찍더니, 바로 옆에 있던 하인에게 먹여 주었다.
다짜고짜 들이미는 식이라 하인은 싫다고 말할 새도 없이 강제로 먹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는 아까 전 하녀가 그랬듯, 금세 크게 벌어졌다.
“……진짜네? 나한텐 좀 맵긴 한데, 그래도 엄청 매운 건 아냐. 게다가…….”
쫄깃하고, 매콤하고, 알싸하면서도 은은한 풍미가 일품이었다.
일단 한 번 먹고 나니 계속 입 안에 침이 고였다.
“근데 이것만 먹기에는 좀…….”
“기다려봐, 빵 좀 찾아볼게.”
이미 맛을 본 두 사람이 화덕 안이며 식자재실을 뒤지는 동안, 남은 하인 한 명은 멀뚱히 서 있다가 곧 조리대 위에 놓인 냄비 하나를 발견했다.
이내 별생각 없이 뚜껑을 연 그의 얼굴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이게 뭐야……?”
밀가루보다 새하얀데 모양은 씨앗 같고, 냄비를 들어 이리저리 흔들어 보아도 떨어지긴커녕 미동도 없었다.
반죽도 이것보단 끈적이지 않을 것 같은데, 하인이 그리 생각하던 그때였다.
“……저,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