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난 망했어…….”
테시우스의 침실 앞.
시종 펠릭스가 청소를 위해 들어간 뒤 복도에 혼자 남은 아드넬은 괴로움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만큼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침실을 옮긴다니, 그것도 2황자의 침실 바로 옆으로!
‘분명 잠도 편히 못 잘 거야.’
간지럼증이라는 게 일정한 시간에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바로 옆방이니 다짜고짜 문을 두드릴지도 몰랐다.
반평생을 넘게 남자로 살아온 만큼 목소리를 낮게 내는 건 익숙하나 긴장이 다 풀린 꼭두새벽은 위험했다.
더구나 잠을 잘 땐 가슴을 갑갑하게 조이는, 특수 제작한 복대를 풀고 잤는데 더는 그럴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아드넬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면서도 푸념 어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정말 진심으로, 술이 간절하게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아드넬!”
그때 제 발끝만 쳐다보는 아드넬을 누군가 불렀다.
고개를 돌려보니 돌아가는 복도 끝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제이든.”
단숨에 저를 향해 달려온 그를 보자니 괜스레 울컥해, 아드넬이 입을 비죽 내밀었다.
“어떻게 된 거야? 얘기는 잘했고?”
“응, 다행히 효과는 있는데…….”
하아…….
채 말을 잇지 못하고 한숨이 뒤따라왔다. 잔뜩 울상이 된 얼굴로 아드넬이 덧붙였다.
“내 침실을 옮기겠대. 그것도 자기 침실 옆으로.”
“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2황자의 침실과는 거리가 꽤 있으니까. 매번 부르기 번거롭겠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어쩌겠어, 2황자의 명인데. 받아들이는 수밖에.”
당연하지만 그녀는 테시우스의 명을 거스를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아드넬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필립은? 필립은 어디 두고 혼자 왔어?”
“……그놈의 제육볶음, 제육볶음, 아주 노래를 부르길래. 정신 사나워서 두고 왔어.”
제이든은 어딘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주먹을 꽉 쥔 채였다.
하지만 바닥만 보며 걷는 아드넬은 그런 그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그저 “그렇구나.” 하고 작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마침 잘됐네, 나도 생각나던 참인데.”
“어떤 게?”
“술 말이야. 오늘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마시고 싶어.”
필립과 약속한 것도 있고, 카르카스에서 가져온 막걸리도 있으니 늦은 저녁은 그것으로 해결하면 될 듯싶었다.
주방은 이미 여러 번 가 보아서 아드넬은 익숙한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근처에 다다랐을 땐 향기로운 음식 냄새가 코끝에 어른거렸는데, 이미 식당으로 다 옮겨 놓았는지 막상 도착한 주방엔 음식이고 사람이고 리들리 외엔 아무도 없었다.
“리들리 님.”
“……아, 아드넬 님! 오셨군요.”
주방 한쪽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쉬던 리들리가 아드넬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그래도 물어볼 게 있어 찾아가야 하나 생각하던 차였다.
“저어, 아드넬 님. 그……. 혹시 오늘 들어온 그 나무 상자들이 다 뭔지…….”
아드넬이 말한 대로 그의 조수들이 가져온 재료들은 지하 숙성실로 옮겼다.
그런데 그 개수가 원체 많고 또 무거워서, 호기심에 한 번 열어 보았는데, 웬걸.
붉은 기가 도는 도기 안엔 액체 같지도 고체 같지도 않은,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냄새가 원체 괴상해서 맛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궁금하긴 했다.
이에 아드넬이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일종의 소스라고 보시면 됩니다. 다만 종류가 꽤 많아서 자세히 설명드리긴 어렵고……. 아, 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무게가 좀 나갔을 겁니다.”
술?
그 순간, 리들리의 눈이 반짝 빛났다.
스쳐 지나가듯 빠르게 사라진 이채를 발견한 그때, 아드넬은 본능적으로 미끼를 던지듯 설명을 덧붙였다.
“아주, 아주 독특한 술이랍니다. 제 조수가 특히 좋아하는 술인데 은근히 달달하면서도 알싸하고 맥주처럼 톡 쏘는 맛이 일품이랄까요.”
“오호…….”
역시나 리들리는 무척이나 흥미롭다는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
사실 주방 사용권은 진작 받아 냈지만 앞으로도 자주 사용하려면 주방장 리들리를 그녀의 사람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술이라는 단어에 눈을 빛내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를 공략하려면 그게 정답인 것 같았다.
“저어, 리들리 님. 혹시 이건 어떠십니까?”
아드넬의 머릿속에, 완벽한 계획이 떠올랐다.
* * *
어슴푸레 어둠이 내려앉은 밤.
한창 조용해야 할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인영이 있었다.
뭘 하는 건지 문도 걸어 잠근 채 화구를 작동시킨 남자는 깊이가 있는 팬을 올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빨간 양념에 재운 고깃덩이를 투하했다.
먹기 좋은 크기로 잘린 양파와 대파가 뒤섞인 돼지고기는 금세 희뿌연 연기를 뿜어내며 치이익 익어가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대로 익히기만 하면 된다고 했지.’
야심한 시각에도 주방에 남은 사내는 다름 아닌 리들리로, 아드넬이 재워 놓고 간 고기를 볶는 중이었다.
사실 그는 아드넬이 하는 걸 보며 무척 놀랐다.
‘쌀’이라는 곡식은 밀가루와 달리 반죽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물에 잠긴 채 불 위에 올라갔고, ‘고추장’이라는 빨간 양념은 딸기 타르트처럼 달콤한 맛이 아닌 맵고 짠 아주 독특한 소스였는데 여기에도 아주 많은 재료가 들어갔다.
처음 맡아 보는 냄새의 검은 액체는 물론이고 안 그래도 빨간 양념에 빨간 고추를 곱게 갈아 만든 가루며 설탕이며 리들리가 보기엔 하나도 이해되지 않는 것들 천지였다.
짠 음식에 설탕을 넣다니? 하는 단순한 의문에서 시작해서 매운 가루가 들어가는데도 그리 맵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것도 이상했다.
그래도 맛있다는 게 거짓말은 아닌지 고기가 익어갈수록 맵지만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이런 냄새는 처음인데도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게 되는 것이 못내 신기했다.
연신 꼴깍대던 리들리는 마침내 고기가 완전히 익자 널찍한 접시에 한가득 담아 올린 뒤 더욱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드넬이 만들어 놓은 ‘밥’이란 것은 조금 오목한 그릇에 덜어 담았고 진작 씻어서 물기를 빼놓은 치커리와 오크 리프도 체에 밭친 그대로 챙겼다.
이내 아드넬이 말한 모든 음식이 트레이 위에 올라가자 그 모든 걸 다 덮을 만큼 큰 반구형 뚜껑이 냄새와 열기를 차단했다.
철컥하며 잠겼던 주방 문이 열린 건 바로 그때였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일단 얼굴부터 내민 리들리는 잠시 주위를 살피더니 최대한 살살 트레이를 끌고 나왔다. 이것 때문에 저녁도 굶은 터라 뒷정리는 나중으로 미룰 생각이었다.
달달 소리를 내며 트레이가 복도를 지났다.
머지않아 아드넬이 지내는 2층 침실 문 앞에 도착한 그가 작게 노크했다.
“아드넬 님……! 가져왔습니다!”
들리게끔 목소리를 내긴 내는데 그 와중에 크게 내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쉰 소리가 나왔다. 그 소리를 용케 알아들은 누군가가 벌컥 닫혔던 문을 열었다.
필립이었다.
“얼른 들어오십시오……!”
그는 거의 열흘은 굶은 짐승의 눈빛을 하고서 재촉했다.
리들리는 ‘아무래도 소리가 아니라 냄새를 맡은 모양이야.’ 하고 생각하며 냉큼 들어왔다.
그러자 활짝 열린 테라스의 티테이블에 앉아 손을 흔드는 아드넬이 보였다.
“기다렸습니다, 리들리 님.”
리들리는 히죽 입꼬리를 위로 올리며 트레이와 함께 테라스로 향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티테이블 위엔 잔이고 술이고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에 술 마실 생각으로 이 은밀한 요리를 감행한 건데, 리들리의 얼굴 위로 살짝 실망감이 어렸다.
“저, 그런데 술은…….”
“술은 여기 옆에 있습니다. 일단 음식부터 옮기죠.”
옆에 있다는 말과 달리 그의 눈엔 딱히 보이는 게 없었다.
그래도 일단 리들리는 아드넬을 믿어 보기로 했다.
반구형 뚜껑을 열자 익숙하디익숙한 제육볶음 냄새가 순식간에 퍼지며 코를 자극했다.
티테이블 위로 작은 찻잔 대신 제육볶음과 하얀 쌀밥, 그리고 치커리와 오크 리프가 담긴 체가 올라갔다.
이윽고 필립과 리들리가 자리에 앉자 제이든이 기다렸다는 듯 턱 하고 옆에서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다름 아닌 냉기가 흐르는 철판 상자로, 모서리는 완만하게 깎여 있었으며 뚜껑 손잡이 또한 꽤 단단하게 고정된 모양새였다.
이게 뭔가 하고 리들리가 눈을 동그랗게 뜬 순간.
“이건 ‘프리지’라는 마도구입니다. 이미 아시지요?”
“아……!”
원래 이 세계엔 냉장고라는 개념이 없었다.
보통 식자재실이나 저온 숙성실, 와인 저장고에 통째로 냉기 마법을 걸어 대형 냉동고처럼 쓰면서 주기적으로 마나 스크롤을 교체해 마력을 주입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그건 귀족들이나 사용하는 방법이고, 마나 스크롤은 평민들이 감당할 수 있는 가격이 아니어서 정육점이나 생선가게 같은 곳에서나 냉장고 비슷한 개념으로 냉기 마법을 건 두꺼운 철판을 사용했다.
마법을 거는 비용 자체는 저렴해도 효과가 오래 가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어 영업일도 일정하지 않았고, 일주일에 사흘만 문을 여는 가게가 허다했다.
델리움의 정육점같이 문 여는 날을 정해 놓는 곳이 오히려 드물었다.
이를 본 아드넬, 아니, 아렌은 프리지라는 마도구를 만들어 달라는 의뢰를 넣었었다.
마나 스크롤보다 훨씬 오래 가는 대신 몇 곱절은 비싼 마력석을 박아 넣고, 냉기 마법을 걸어 늘 일정한 온도가 유지되는 냉장고를 이 세계에서 만들어 낸 것이다.
그녀는 몰랐지만, 아렌의 요청으로 처음 제국에 탄생한 ‘프리지’는 곧 수도에 엄청난 열풍을 몰고 와 어지간한 귀족들은 주방마다 다 하나쯤 가지고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저택에 들어오는 식재료가 원체 많다 보니 크기도 대부분 크게 제작되었는데, 아드넬은 작은 크기를 선호했다.
자고로 식재료는 신선도가 생명인 만큼 필요한 건 그날그날 시장에 가서 샀고, 그 외의 용도로는 화장품 전용 냉장고로 썼다.
그리고 이건 ‘술 전용 냉장고’였다.
리들리는 이렇게 작은 프리지는 처음 보는지라 눈을 동그랗게 떴으나 곧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을 표했다.
“확실히……! 이런 작은 크기라면 활용도가 아주 높겠군요! 굳이 주방에 가지 않아도 원할 때마다 시원한 술, 아니, 물을 마실 수 있겠어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본심을 냉큼 바꾸며 리들리가 태연하게 말했다.
아드넬 또한 그를 못 들은 척해 주며 수긍했다.
“예, 맞습니다. 방에 가져다 놓아도 좋고, 땀 흘릴 일이 많은 연무장에 가져다 놓아도 좋지요. 그리고 이건 ‘술 전용’ 프리지입니다.”
제이든은 차가운 냉기가 흐르는 상자 안에서 얼음과 함께 넣어 둔, 막걸리가 담긴 유리병은 물론이고 널찍한 질그릇 네 개를 차곡차곡 꺼냈다.
리들리의 눈동자가 흥미로 반짝였다.
“일단 고기 먼저 한 점 할까요? 시범은 여기, 필립이 보여 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