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짐승이 낮게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와 함께,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지독하리만큼 고통스러운 간지럼증을 참는 것도 이젠 한계라는 듯, 얇은 손목을 낚아챈 손등 위로 굵은 핏줄이 돋았다.
“……알겠으니 이 손부터 놔주십시오. 이러다간 부러질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별개로 당장 잡힌 손목이 무척이나 욱신거렸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테시우스가 손을 놓자마자 선명한 손자국이 낙인처럼 남았다.
아드넬은 지끈거리는 통증을 애써 참으며 말했다.
“일단 앉으시지요. 간지럼증은 언제부터 시작되셨습니까?”
“조금 전에……. 씻고 나오자마자 갑자기 도졌다.”
그러고 보니 2황자는 지금 새하얀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촛대를 집어 던진 건지 조명을 부순 건지 찢어진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노을 외엔 빛이라 할 만한 것이 전혀 없어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타고 투명한 물방울이 투둑 떨어졌다.
“로션은 안 바르셨습니까?”
“로션이라니?”
“씻고 나서 바르는 화장품인데 카리아 상회에서 주기적으로…….”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군. 난 그런 걸 발라 본 적이 없다.”
테시우스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대답했다.
그런 그의 얼굴은 정말로, 뭘 말하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설마, 여기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에 아드넬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아드넬은 그 자리에서 몸을 돌려 아직도 수증기가 남아 있는 욕실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없어.’
당연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2황자의 욕실엔 아드넬의 침실에 딸린 욕실과 마찬가지로 비누와 굵은 소금 두 가지가 전부였다.
‘황족만 사용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설마하니 2황자가 저와 마찬가지로 비누 하나만 사용할 줄이야.
아드넬은 조금 충격을 받아 입을 벌렸다.
그도 그럴 게 8년 전 아렌으로 살 때만 하더라도 샴푸에 컨디셔너, 바디 워시에 천연 치약까지 공급했고 지금은 그 품목이 더 많아졌다.
세안할 때 쓰는 클렌징 밤과 잠자기 전 바르는 크림은 물론이고 남성용 로션은 이제 특별 주문 건이 아닌 기본이 되었다.
그런데 2황자가 사용하는 세정 화장품이 비누와 굵은 소금뿐이라니,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황후가 아직도 2황자를 견제하는 건가?’
카리아 상회에서 공급하는 화장품은 모두 본성으로 들어가고 황후가 관리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1황자 바스토르는 이미 몇 년 전 황태자 자리에 올랐다.
그렇다면 더는 황후가 2황자를 견제할 이유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치졸하기 짝이 없군.’
기초 화장품인 스킨로션만 해도 쓰다가 안 쓰면 피부가 얼마나 건조한지 온몸으로 느낄 것이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인 황후가 하다못해 세정 화장품조차 별궁으로 보내지 않았다니 아드넬은 기가 막혔다. 그와 동시에 처음으로, 2황자에 대한 안쓰러움이 물씬 솟았다.
‘순하지도 않은 비누로 씻었으니 오죽할까.’
아토피, 그러니까 라크란 병은 치료도 물론 중요하지만 여러 가지 생활 규칙을 지키는 것도 무척 중요한 병이었다.
그중 하나가 순한 비누로 가볍게 씻되 염증이 일어난 부위는 피하고, 몸의 물기가 완전히 마르기 전에 로션을 발라 피부가 건조해지는 걸 막아야 한다는 점이었는데 지금 2황자는 해서는 안 될 그 세 가지를 모두 한 상태였다.
‘당장 로션을 바르는 건 별 효과가 없겠어.’
이미 가운이 몸의 물기를 모두 흡수한 마당에, 더구나 가려움증에 미칠 것 같은 와중에 끈적이는 로션을 바른들 간지럼증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아드넬은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고 욕실에서 나와 테시우스의 팔을 잡아끌었다.
“지금 어딜 가는…….”
“일단 따라오십시오.”
침실은 너무 어두워 잘 보이지도 않는 데다 욕실은 습기로 가득해서 마땅치 않았다.
결국 테라스로 향했는데 여기도 아니나 다를까, 테이블이며 의자며 침실과 마찬가지로 난장판으로 어질러져 있는 상태였다.
아드넬은 빠르게 엎어진 의자를 세운 뒤 다시금 테시우스를 잡아 앉혔다.
그리고 말했다.
“이제 벗기겠습니다.”
“무, 뭐?”
당황한 나머지 테시우스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아드넬은 태연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재차 말했다.
“그럼 직접 벗으시겠습니까?”
“벗으라니 그게 갑자기 무슨……!”
“가운 위에 화장품을 바를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다짜고짜 끌고 와서 벗으라니 테시우스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미칠 것 같은 가려움증만 사라진다면야 몇백 번이고 벗을 수 있었다.
‘어차피 같은 남자인걸.’
부끄러운 것도 없거니와 당황할 필요도 없다.
테시우스가 잠자코 있자 아드넬은 그의 허리춤으로 팔을 뻗었다. 그리곤 매듭진 끈을 살짝 푼 뒤 어깨 위의 가운을 잡아 허리까지 끌어내렸다.
몸에 열이 올라서인지 아니면 저녁노을 때문인지 흉터가 평소보다 더 샛붉게 달아오른 듯했다.
‘그보다 무슨 몸이…….’
진짜 얼굴에 혹하고 싶진 않은데.
하필이면 2황자는 아드넬의 취향에 딱 들어맞는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어차피 오르지도 못할 나무이긴 하지만, 성격은 정말 정말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도 솔직히 몸만 보면 은근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조금만 움직여도 꿈틀거리는 선명한 근육은 제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도통 현실감이 없었다.
넓고, 크고, 단단하고, 듬직했다.
어디 성격도 좋으면서 이런 몸 가진 남자 없나.
아드넬은 속으로 생각하며 겉으론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지금 어디가 가장 간지러우십니까?”
“가슴 쪽이…….”
하필이면 또 간지러운 곳이 거기람!
애써 태연한 척하던 얼굴이 가늘게 떨렸다.
‘이건 절대 흑심 채우는 게 아니야. 자기가 말한 거잖아.’
다행히도 아드넬이 앉아 있는 테시우스를 내려다보는 식이어서, 그는 빠르게 스쳐 지나간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아드넬은 용기 뚜껑을 돌려 열고 차가운 스킨을 손바닥에 덜었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기가 무섭게 팔을 뻗어 흉하게 벗겨진 흉터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하지만 시원한 손가락이 가슴께에 닿은 순간, 테시우스는 깜짝 놀라 흠칫 몸을 떨었다.
‘하나도 신경을 안 써……?’
당연히 제게 사용법을 알려 주고 직접 바르라 할 줄 알았다. 지금껏 만난 의사들은 모두 그랬다. 말로 처방을 내릴지언정 직접 흉터에 손을 대는 사람은 없었다.
별궁 내 사용인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고, 그건 그의 목욕 시중을 맡고 있는 펠릭스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었지만 아드넬은 아무렇지 않게 직접 손을 대고 만지는 것으로도 모자라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곤 꺼리는 기색 하나 없이, 그의 가슴께에 대고 입바람을 불었다.
그 모습에 테시우스는 잠시 말문을 잃고 말았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멍했다.
‘……아렌도 그랬었는데.’
짐승으로 변했을 때, 몸 곳곳에 있는 흉터 위로 직접 연고를 발라 주던 그가 떠올랐다.
아렌 외에 제 몸에 직접 손을 댈 사람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일까.
테시우스는 입바람을 후후 불더니 이젠 손부채질을 하는 아드넬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어진 음성에 마치 홀린 듯, 대답하고 말했다.
“앞으로 간지럼증이 도지실 땐 이 스킨을 바르시면 됩니다. 제가 방금 한 것처럼 가볍게 두드리듯 펴 바르시고, 손이 닿지 않는 곳은 다른 사용인에게 말씀하셔서…….”
“네가 해라.”
“예?”
자기가 말하고도 놀라 테시우스의 눈이 조금 크게 벌어졌다.
아드넬이 놀라 반문함과 동시에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지만, 그는 냉큼 눈을 돌렸다.
그리곤 태연함을 가장한 무표정으로 덧붙였다.
“……손이 닿지 않는 곳은 앞으로 네가 책임지란 소리다.”
얜 책임지란 말을 왜 이렇게 좋아하지?
아드넬의 눈썹 사이가 좁아졌으나 오래 생각할 틈도 없이 테시우스가 휙 하고 몸을 돌렸다.
벌어진 어깨만큼이나 넓은 등이 시야를 가리자마자 그가 말했다.
“뭐 하나? 안 바르고.”
“…….”
뭐 이런 멍멍이 같은…….
아드넬은 어이가 없어 잠시 입을 벌렸다.
그러나 테시우스의 사정을 알 리 없어, 금세 울상이 된 얼굴로 마지못해 스킨을 두드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제이든 보낼걸……!’
일단 사용법만 알려 주면 다음부턴 사용인들에게 맡길 거라 생각했는데.
애초에 일개 귀족도 아닌 황족이 아닌가, 목욕 시중드는 이 하나 없을 리가 없다.
그럼 저보단 당연히 그 사람이 더 편할 텐데 일이 이렇게 흘러가다니!
‘이래서는 꼼짝없이 붙어 있어야 하잖아.’
졸지에 부르면 달려오는 강아지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앞으로 조금만 간지러우면 사람을 보내 부를 텐데, 절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에 아드넬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진 못하고 속으로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손부채질은 잊지 않아 스킨을 발라 줬던 오른손이 힘없이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한편 등을 돌린 채 앉은 테시우스는 점차 사라지는 가려움증에 마침내 조금 편안해진 얼굴로 눈을 감았다.
금방이라도 벅벅 긁고 싶을 만큼 간지러웠는데 놀랍게도 이 차가운 화장품을 바른 뒤 시원한 바람이 닿자 가려움증이 차츰 가라앉았다.
물론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참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긁으면 긁을수록 더 크게 번지는 병인지라 참는 것엔 도가 텄는데 그 인내심이 마침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정말로 효과가 있었구나…….’
내로라하는 의사는 다 불러 봤지만 정작 효과를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온갖 약물치료에도 증상이 심해지면 심해졌지, 나아진 적은 없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그의 병을 악화시킨 의사들은 모두 쫓겨났다. 그래서 아드넬도 그렇게, 쫓아내게 될 거라 생각했다.
라크란 병을 치료했다는 소식에 무작정 데려오긴 했으나 믿지 않는 마음이 훨씬 컸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오히려 제가 한 말처럼, 완치될 때까지 그를 이 별궁에 살려 둔 채로 놓아 두면 될 것 같았다.
테시우스는 생각을 마치고 입을 열었다.
“그래, 기왕 책임지는 김에 하나 더.”
“예?”
“네 침실을 옮겨야겠어. 내 침실 바로 옆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