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에……. 그러니까…….”
한편, 작업실을 나선 필립은 미간을 좁히며 주방으로 가는 길을 찾으려 애쓰는 중이었다.
무작정 나오긴 했는데 오늘 처음 온 곳이다 보니 어디가 어딘지 통 알 수가 없었다.
‘빨리 소독해서 돌아가야 하는데. 아드넬은 뭐든 빨리 만드는데.’
제 눈엔 복잡해 보이는 것들도 아드넬의 손에 들어가면 눈 깜짝할 새에 뚝딱하고 끝나 버려 좀 초조한 게 아니었다.
필립은 갈팡질팡하는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다가 곧 결심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모를 땐 직진이다!’
가다 보면 사용인 한 명쯤은 만날 수 있겠지, 필립은 생각하며 성큼성큼 조용한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러면서도 복도의 창문을 예의 주시하며 혹 지나가는 사람이 있나 찾아보았다.
다행히도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기다란 빨랫줄에 하얀 시트를 널고 있는 하녀들을 발견했다.
필립은 화색이 되어 냉큼 창문 가까이 다가갔다.
‘……어, 잠깐만.’
그런데 창문 손잡이를 돌려 열 손이 없었다.
아까도 손이 없어 제이든이 열어 주지 않았던가.
필립은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투명한 유리 앞에 우뚝 섰다.
그리고 잠시 후.
쿵쿵!
“……어마!”
“여기 창문 좀 열어 줘요!”
필립은 양팔에 빈 용기를 한 아름 안은 채 닫힌 창문을 무작정 이마로 두드렸다.
쿵쿵하며 울리는 소리에 세탁물을 널던 하녀들은 금세 그를 발견했으나, 멧돼지도 아니고 머리로 창문을 들이받는 모습에 기겁하며 소리쳤다.
“부탁할 게 있어서 그래! 잠깐만 이리 와 봐요, 나 심부름 왔어!”
평생을 용병으로 살았다 보니 도저히 존대로는 보기 어려운 말투가 튀어나왔다.
그러나 하녀들은 그런 필립의 말투가 아닌 다른 것에 반짝하며 눈을 빛냈다.
‘심부름이라면, 아드넬 님의 심부름?’
그의 주인이 만드는, 귀부인들이 환장한다던 그 화장품까진 기대하기 어렵지만 아드넬에겐 조금 기대를 걸어 볼 수 있었다.
애초에 빈민가 아기들에게 화장품을 만들어 줬다가 이 별궁까지 온 사람이 아니던가.
그러니까 잘만 보이면, 저들에게도 화장품을 만들어 줄지 모르지.
빠르게 눈알을 굴리며 눈빛을 교환하던 하녀들은 한달음에 달려와 환기를 위해 열어 놓은 창문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필립을 데리고 갔다.
그제야 그는 열린 창문 너머로 하녀 한 명이 건네준 양동이에 빈 용기를 넣을 수 있었다.
“어후, 이제 살겠네. 손을 못 쓰니까 너무 불편했어.”
“저, 그보다 말이에요. 아드넬 님의 조수시죠?”
“응? 아, 맞아요. 이름은 필립.”
필립이 씨익 웃어 보이자 하녀들의 얼굴 위로 덩달아 미소가 떠올랐다.
“무슨 심부름을 오신 건가요? 혹시 화장품을 만드는 건…….”
“예! 지금 작업실에 있, 아니, 계셔요! 근데 이거 용기를 소독해야 해서, 냄비에 넣고 끓여야 하거든. 근데 주방이 어딨는지 몰라서 물어보려고 했죠.”
“역시……!”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시나? 뭐 전할 말이라도 있으신가?”
“아, 음, 그게…….”
필립이 고개를 갸웃하자 하녀들은 잠시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러자 가장 오른쪽에 있던 하녀, 리헬이 입을 열었다.
“저어……. 혹시 화장품 만드는 게 많이 어려운가요?”
“응?”
“그러니까 그게……. 마, 많이 어렵지 않으면, 아드넬 님께 부탁드리고 싶어서요.”
리헬은 민망함에 볼을 붉히며 말을 덧붙였다.
“저희한테도 화장품을 만들어 주실 수 있는지……. 무, 물론 공짜로는 아니고요……! 아, 그런데 화장품은 워낙 비싸니까, 그러니까…….”
“…….”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리헬을 응시하던 필립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갔다.
그녀들이 뭘 바라고 말하는 것인지 그 저의를 알아채자마자 입가엔 비릿한 조소가 걸렸다.
그도 그럴 게…….
“……정리하자면 그거네. 그 ‘비싼’ 화장품을 살 능력은 없고, 그런데 갖고는 싶어서 싼 가격에 그냥 만들어 줄 수 없냐는 거잖아.”
“…….”
“이봐요, 아가씨들. 내가 한마디만 할게. 물건의 가치는 만든 사람이 매기는 거야.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낮출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왜 아드넬이 공들여 만든 화장품을 그쪽들이 원한다고 저렴한 가격에 줘야 해? 그리고, 왜 그런 부탁을 하는 거야? 민망해서 얼굴까지 붉힐 정도면 부끄러운 부탁이라는 걸 안다는 소리잖아.”
“저, 저는 그냥……. 워낙 유명하기도 하고……. 하나만 갖고 싶어서…….”
저를 응시하는 살벌한 얼굴이 못내 무서워, 리헬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웅얼거렸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런 사람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아드넬이 왜 그 아기들을 포기했는데.’
작은 선의에서 베푼 화장품으로 빈민가의 아기들은 금세 나아졌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온갖 사람들이 아드넬을 찾아오며 동정을 베풀어 달라 호소했다.
자기가 쓸 화장품을 원가만 받고 만들어 달라던 코르티잔도 있었고, 돈을 구걸하는 고아도 있었고, 뒤에서 빼돌려 비싼 값에 팔려는 상인도 있었다.
결국 아드넬은 아직 라크란 병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극심한 간지럼증에 자지러지게 우는 아기들을 끝내 외면해야만 했다.
그리고 필립은 그 모든 걸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었다.
“최소한의 양심이 있으면 다짜고짜 별궁에 끌려와 갇힌 사람에게 그런 부탁을 하면 안 되지. 안 그래요?”
“……네, 맞아요…….”
“죄송해요…….”
결국 하녀들은 몰려오는 부끄러움에 눈물을 글썽이고 말았다.
냉정하긴 하지만 필립의 말은 틀린 곳이 없었다.
하나같이 맞는 말이었다.
“아무튼 이 부탁은 못 들은 걸로 할게. 양동이 빌려줘서 고마워요.”
“네에…….”
필립은 제 할 말은 다 끝났다는 듯 빈 용기가 담긴 양동이를 들고 걸음을 떼었다.
머지않아 등 뒤로 작은 훌쩍임이 들려왔지만 그는 다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 * *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납작한 용기에 부은 연고는 모두 굳었고, 완성된 스킨은 프리지에 넣어 차갑게 식혔다.
이후론 상회에 보낼 서신을 작성하고, 2황자의 침실에 가져다 놓을 전용 프리지 제작 의뢰서를 작성하고, 카르카스에 다녀온 하인에게 전달을 부탁했다.
남은 건 테시우스에게 완성품을 가져다주는 일이었다.
“그런데 꼭 아드넬이 가야 해? 그냥 내가 가서 설명해 주면…….”
“괜찮아, 뭐 어려운 일이라고. 화장품 말고도 다른 생활 규칙도 얘기해 줄 게 많아서 그냥 내가 가는 게 나아.”
“그럼 침실까지 들어 주기라도 할게. 무겁잖아.”
“이 정도도 못 드는 게 말이 돼? 진짜 괜찮으니까 먼저 가서 쉬고 있어.”
뭐가 그리 걱정되는지 어떻게든 붙어 있으려는 제이든을 가까스로 떼어내며, 아드넬은 홀로 2황자의 침실로 향했다.
그의 침실이 어디 있는지 진작 모나에게 전해 듣기도 했고, 작업실에서도 그리 멀지 않아서 아드넬은 묵직한 프리지를 들고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2황자의 침실 근처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아드넬은 낯선 인영을 발견했다.
화려한 금박 장식이 달린,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남자였는데 별궁에 온 지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에 아드넬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며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저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아, 아드넬 님……!”
아드넬과 달리 남자는 대번에 그녀를 알아보며 냉큼 다가왔다.
그리곤 울상이 된 얼굴로, 다급하게 말했다.
“지금 2황자 전하께서 무척 힘들어하십니다……!”
“예?”
“아까부터 물건을 온통 집어 던지시고, 아무래도 병이 더 깊어진 모양이라 그러잖아도 찾아뵈려 했습니다. 일단 들어가서 전하부터 봐 주십시오!”
그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문 앞은 다름 아닌 2황자의 침실이었다.
사실 그 화려한 금장식만 보더라도 알 수 있지만, 남자는 아렌이 “알겠습니다.” 하고 채 대답하기도 전에 다짜고짜 문부터 두드렸다.
“2황자 전하,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그리곤 들어오란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는데 제멋대로 문부터 열고 보았다.
아드넬의 등 뒤로 떠미는 손길이 닿은 건 그때였다.
“어어……!”
얼떨결에 떠밀려 침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탁 하고 문이 닫혔다.
그 순간 방 안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어디 하나 온전한 곳이 없었다.
바닥엔 깨진 도기 조각이 즐비했고, 커튼은 사정없이 찢어져 있었으며, 의자는 나동그라져 있고 테이블은 뒤집혀 있었다.
그리고 어둠이 내려앉은 침실 안에선, 분을 억누르는 듯한 거친 숨소리만이 나지막하게 울릴 뿐이었다.
그 짐승 같은 숨소리에 아드넬은 바짝 긴장했다.
방 안의 모든 것을 때려 부수는 인간이 있는 곳에 다짜고짜 떠밀려 들어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상대는 그 2황자가 아니던가.
‘사지를 찢어 성벽에 걸어 준다던 놈.’
아드넬은 선뜻 걸음을 옮기지도, 그렇다고 말문을 열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녀의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테시우스가 먼저 말을 걸어 왔기 때문이다.
“……펠릭스냐.”
아까 그 시종의 이름이 펠릭스인 걸까?
아드넬은 생각하며 프리지를 든 손에 힘을 주었다.
“아드넬입니다.”
“……네가 여긴 무슨 일로.”
이상하게도 아드넬은 제 이름을 말하자마자 테시우스의 목소리가 조금 바뀐 것 같다고 느꼈다.
뭐랄까, 어쩐지 저에게 화가 난 것 같달까.
어딘가 신경질적인 느낌이 다분한 음성에 아드넬의 미간이 미묘하게 찌푸려졌으나 그녀는 순순히 대답했다.
“간지럼증에 좋은 화장품을 가져왔습니다.”
“…….”
짤막한 문장에 일순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드넬은 속으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묵직한 프리지를 엎어진 테이블 대신 소파에 올려놓은 뒤, 뚜껑을 열어 낮 동안 차갑게 식힌 카멜리아 스킨을 꺼냈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냉기가 퍽 시원했다.
그러나 막 등을 돌리려는 찰나, 아드넬은 제 손목을 낚아채는 강한 힘에 놀라 “헉!” 하고 숨을 들이켜며 놀라고 말았다.
“그럼 빨리 뭐라도 해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