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하인들이 팔을 덜덜 떨며 마차 짐칸에 실린 나무 상자들을 내리던 그때, 아드넬이 모나를 불러 세웠다.
“어차피 두 사람의 침실은 제가 알고 있으니 작업실에 먼저 들러도 될까요? 그동안 다른 짐들은 주방으로 옮겨 주셨으면 합니다.”
“주방에는 왜…….”
“제가 요리할 때 쓰는 식재료를 조금 가져왔습니다. 리들리 님께 미리 말씀도 드렸고요.”
“아, 네. 알겠습니다.”
아드넬의 말에 모나는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이곤 반대편 복도로 향했다.
잠시 후 세 사람만 남게 되자 아드넬이 한쪽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작게 말했다.
“필립 네 생일이라고 거짓말해서 주방 사용권을 받아 냈어. 그러니까 누가 혹시라도 물어보면 얼마 전에 생일이었다고 말해, 알겠지?”
그 말에 필립은 커다란 대형견이 꼬리를 세차게 흔드는 양 눈을 반짝 빛냈다.
제육볶음에 막걸리!
아드넬은 일전에 약속한 ‘그 음식’을 별궁에 온 첫날부터 먹여 줄 생각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여기서 제이든이 걱정한 필립의 눈치 없음이 기어코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우와, 아드넬은 여전하구나. 여기서도 거짓말쟁이야!”
빠악!
필립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지자마자 제이든의 손이 그의 뒤통수를 자비 없이 갈겼다.
으악 하는 비명과 함께 필립이 머리를 감싼 순간 한심하다는 눈빛이 그를 향했다.
“아드넬이 일부러 작게 말하는 거 보면 몰라?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어쩌려고 이래?”
“씨이……! 별로 크지도 않았는데……!”
“컸어. 그래서 때린 거야.”
필립이 입을 비죽 내밀며 두 손으로 머리통을 잡든 말든 제이든은 별로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래도 황성에서 ‘거짓말쟁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게 무슨 일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라, 그는 금세 제 잘못을 인정했다.
다만 아드넬의 옆에 꼭 붙어서 미주알고주알 제이든에 대한 험담을 대놓고 하는 건 별개였다.
“제이든은 나만 미워해. 나도 아드넬이랑 똑같이 오래 알고 지냈는데! 맨날 나한테만 뭐라 해!”
“응, 응, 알지. 근데 여긴 황성이잖아. 사방이 듣는 귀로 가득하다 보니 더 조심하라고 그러는 거야. 그래도 머리는 때리면 안 돼, 제이든. 왜 안 되는지 알지?”
아드넬이 고개를 돌리며 은근히 눈치를 주자 샐쭉하게 좁아진 필립의 녹안 또한 그를 향했다.
물론 제이든은 그런 그는 안중에도 없었고, 아드넬이 예전에 말한 것만 떠올렸다.
‘머리 때리면 지능 낮아져.’
“하아…….”
그래, 깜박 잊고 있었는데.
여기서 머리가 더 나빠지면 그땐 감당하기 힘들다.
결국 제이든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 그의 속마음을 꿈에도 모르는 필립은 그제야 히히 웃어 보이며 아드넬에게 더 달라붙었다.
물론 칼같이 둘 사이를 가르는 손 때문에 오래가진 못했지만.
그렇게 작은 소란을 뒤로하고 복도를 지나 작업실에 도착한 세 사람은 조금 기대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그러나 문을 막 열었을 때와 달리 내부를 확인한 순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두들 미간을 좁혔다.
‘……조악하군.’
아드넬의 원래 작업실에 비하면 허름하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방이었다.
안 쓰던 창고를 청소해 만든 것인지 창문 하나 없었고, 벽면에 붙은 책장도 예전에 쓰다가 처박아 둔 걸 가져다 놓은 듯 척 봐도 낡은 티가 났다.
그나마 튼튼해 보이는 건 책상 하나 정도였는데 계속 일만 하라는 건지 잠시 앉아 쉴 의자 하나도 없어 제이든은 저도 모르게 허 하는 허탈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이게 진짜 아드넬의 작업실이라고?”
“……그래도 있을 건 다 있으니까, 뭐.”
아드넬이 애써 아무렇지 않게 말해 보였지만 필립은 못마땅하다는 듯 부루퉁한 얼굴로 곳곳을 살폈다.
평민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드넬이 어떤 사람인데!
황성에 마련된 작업실이 저들 집에 있는 작업실보다 못한 게 말이나 되나? 그런 생각이었다.
“이것저것 따질 거 없어. 환경이 이렇다고 못 만드는 것도 아닌걸.”
“뭐 만들 건데? 샴푸도 만들 거야? 나 그거 다 썼는데.”
빠악!
어김없이 제이든의 손이 필립의 뒤통수를 갈겼다.
어째 이놈은 아드넬을 못 부려 먹어서 안달이야?
“그동안 받아 쓴 걸로도 모자라?”
“아! 그냥 물어볼 수도 있지!”
“그래, 물어볼 수도 있지. 그리고 대답은, 아니. 샴푸는 못 만들어.”
그 말에 샐쭉하던 눈동자가 금세 실망감으로 젖어 들었다.
하지만 이건 아드넬도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막 도착한 날 보낸 편지에 적은 것들은 전부 2황자에게 필요한 화장품 재료들이야. 샴푸 같은 화장품은 아예 생각을 못 했어.”
“그럼 아예 안 만드는 거야?”
필립이 울상이 되어 묻자 아드넬은 고개를 저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조만간 만들 생각이긴 해. 보니까 비누랑 소금만 있더라고, 샴푸 같은 고가 화장품은 황족만 쓰는 모양이야. 그렇다고 순하지도 않은 비누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씻으면 온몸이 사막처럼 건조해질걸? 피부도 당연히 안 좋아지고.”
이건 따로 생각해 둔 방도가 있었다.
카르카스에서 여러 가지 재료를 가져와야 한다 했던 건 제이든과 필립을 데려오기 위해서였지, 제집에만 있는 재료라서 그랬던 게 아니었다.
‘……결국 또 클리프한테 도움을 구하겠네.’
기껏 계약까지 깔끔하게 마무리 지었는데.
하지만 그녀가 필요로 하는 여러 가지 추출물은 새로운 연금술 공방에 의뢰하는 것보다 오랜 시간 함께 일한, 클리프와 계약을 맺은 연금술 공방에 맡기는 게 나았다.
질은 두말할 것도 없고 일단 의뢰하고 재료를 받기까지의 시간이 압도적으로 빠르니까.
게다가 카리아 상회는 수도에 본점도 있으니, 앞으로 화장품 재료들은 그쪽으로 주문을 넣으면 될 터였다.
다시금 일적인 관계가 재개된다는 게 좀 찝찝하긴 하지만…….
‘이건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은 지금 할 일에 집중해야지.’
아드넬은 진작 생각해 둔 화장품 레시피를 떠올리며 제각기 들어갈 재료들을 착착 꺼내 책상 한쪽에 즐비하게 올려놓았다.
다만 본격적인 화장품 제작에 앞서, 오늘 만들 화장품이 들어갈 빈 용기부터 챙겼다.
알코올이 있긴 하지만 소독용으로 한 번 쓰기엔 값이 꽤 나가 웬만해선 열탕 소독을 하는 게 나았다.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필립이 냉큼 손을 내밀었다.
“이리 줘! 내가 소독할게.”
“어, 그러려면 가져와야 할 게 있는데…….”
“말 안 해도 알아. 냄비랑 물만 있으면 되잖아!”
그간 옆에서 곧잘 일손을 도왔다 보니 필립도 어지간한 건 알고 있었다.
이동식 화구는 이미 작업실에 있어서, 그는 용기를 한 아름 안아 든 채 발끝으로 문을 툭툭 건드렸다.
당장 손이 없으니 대신 열어 달라는 뜻이었다.
제이든이 문을 열어 주는 사이 아드넬은 핫플레이트의 회전 장치를 돌렸다.
‘일단 카멜리아 스킨부터.’
카멜리아 스킨은 아토피 피부염이 심할 때 차게 해서 뿌려 주면 가려움증을 완화시켜 주는 화장품으로, 무더운 여름철에도 산뜻하게 사용할 수 있는 스킨이었다.
라크란 병을 앓는 2황자에게 있어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필요한 화장품이기도 했다.
아드넬은 핫플레이트 위에 용기를 올린 뒤 계량한 동백 오일과 라벤더, 티트리에서 추출한 에센셜 오일을 넣고 골고루 섞었다.
여기에 계면 활성제 역할을 하는 올리브 리퀴드와 여러 가지 첨가물을 넣은 뒤 가볍게 젓기만 하면 스킨은 완성이었다.
‘이건 식게 두자.’
어차피 냉장 보관을 해야 하는 화장품인지라 아드넬은 완성된 스킨은 한쪽에 빼두고 다음 화장품을 준비했다.
다름 아닌 천연 상처 연고로 상처와 종기, 흉터 치유에 좋은 병풀이 들어가는 화장품이었다.
사실 가려움증을 가라앉히는 건 임시방편일 뿐이지, 2황자가 본래 바란 것은 치료였기 때문에 의학 지식이 없는 아드넬로서는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그러고 보니 테오에게도 만들어 줬었는데.’
연고를 만들려니 문득, 된장은 진흙이라며 싫어하고 쌈장은 잘만 먹던 흑표범 테오가 떠올랐다.
하지만 아드넬은 8년 전의 아련한 추억을 빠르게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가 그립긴 하지만 본래 사람이었던 테오를 다시 만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일이나 하자.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는걸.’
아드넬은 새로운 용기에 병풀과 카렌듈라 오일, 그리고 밀랍을 계량해 넣고 밀랍이 모두 녹았을 때 핫플레이트에서 내려 잠시 식힌 뒤 마찬가지로 스킨에 들어간 에센셜 오일을 넣어 섞었다.
한편 제이든은 작업실 한쪽에서 그녀가 하는 걸 놀라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 과정만 보면 퍽 간단해 보이지만…….
‘아드넬은 꼭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 같아.’
오히려 그렇지 않다는 게 더 말이 안 됐다.
그녀가 만들어 내는 것들은 하나같이 본래 존재하지 않던 것들이었다.
항시 차가운 온도로 유지되는 프리지나 직접 가열하지 않아도 뜨겁게 달구어지는 핫플레이트 같은 마도구도 그렇지만, 아드넬이 만드는 화장품이나 그 화장품에 들어가는 재료들도 그랬다.
제국에서 최초로 ‘수증기 증류법’을 알린 사람도 그녀였고, 자몽 씨 같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재료에서 방부제 역할을 해 주는 추출물을 얻을 수 있다는 걸 밝힌 사람도 그녀였다.
그때마다 수도가 발칵 뒤집히고 연금술사들이 한바탕 난리 치며 애타게 찾았으나 아드넬은 언제나 ‘아실라’의 뒤에 숨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공을 아실라에게 돌렸다.
이러하니 사람들이 그 아실라를 무척이나 궁금해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드넬의 정체를 아는 제이든은 다른 것이 궁금했다.
‘아드넬의 진짜 과거…….’
사라진 고어라고 알려준 ‘한글’도, 필립이 환장하는 ‘한식’도, 황후까지 매료시킨 ‘천연 화장품’도, 그 모든 걸 어디서 배웠고 어떻게 알고 있는지.
평민은 대부분 모르는 ‘대륙 공용어’는 누구에게 배웠으며, 왜 ‘아실라’와 ‘아드넬’의 이름을 비슷하게 지었는지.
이러한 의문의 진실을 언젠가는 말해 줄 건지까지도.
제이든은 진심으로, ‘진짜’ 아드넬이 궁금했다.
‘……하지만 굳이 캐묻지 않을 거야. 내가 아드넬에게 있어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될 거야.’
이따금 그녀가 사무치게 그리운 얼굴로 말하곤 하는 돌아가신 어머니처럼.
아드넬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었고, 또 사랑했던 그분처럼.
그녀에게 있어 그만한 사람이 되고 나면 언젠가 아드넬이 먼저 모든 것을 말해 줄 테니까.
제이든은 다시 한번 굳게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