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18)화 (18/141)

18화

그동안 아드넬은 퍽 잘 지냈다.

일단 2황자, 테시우스는 “사지를 찢어 성벽에 걸어 주마.” 하는 살벌한 협박을 한 것 치곤 꽤 잠잠했다.

뒤늦게 돌아다니면서 둘러본 별궁은 본성에 비하면 턱도 없을 정도로 작다는데, 우연히 마주친 적도 없을 정도였다.

이에 궁금증을 품자 모나는 “전하께선 하루의 대부분을 전용 연무장에서 보내십니다.” 하며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그래서 몸이 그런 건가.’

테시우스는 뭐랄까, 굳이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전생에서 즐겨 보던 소설의 전형적인 ‘떡대공’ 덩치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가 옷을 벗던 순간은 뇌리에 박혀 떠올리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건 얼굴도 마찬가지였는데 특히나 젖살 하나 없이 움푹 팬 볼과 술을 한 모금 들이킬 때마다 움직이던 목울대가 유독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그럼 뭐하나. 기본적으로 인성이 파탄 났는데.’

이런 식의 납치라니, 현대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나 이곳에선 아무리 억울함을 호소해도 소용없었다.

그렇다 보니 아드넬은 되도록, 기왕 지내는 동안만이라도 평소와 같이 윤택한 삶을 살고자 마음먹었다.

아직 해가 밝게 떠 있는 오후였다.

“……그러니까, 그 ‘아실라 님’께서 알려주셨다는 말씀이시군요.”

“예. 아주 독특한 요리인데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아드넬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요 며칠 지내는 동안 먹은 음식을 생각해 보면 일전에 주방장 리들리가 말했던 ‘최상급 소고기 스테이크’를 포함해서 매번 주재료가 바뀌는 샐러드와 수프, 갓 구운 빵, 온갖 종류의 고기 요리며 디저트에 음료까지 사실상 진수성찬이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진수성찬이라 한들 솔직히 아드넬은 물리고 질렸다.

샐러드에 닭고기를 넣든 스테이크를 넣든 샐러드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닌데 돼지고기에 간장 양념을 하느냐, 고추장 양념을 하느냐에 따라 맛이 확확 바뀌는 한식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한식을 잊지 못해 메주까지 띄울 정도인 아드넬이 황성에 들어왔다 해서 그걸 포기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해서 그녀는, 주방장을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제이든과 필립에게 ‘양념 가져와라.’하고 말까지 해 두었는데 최소한 보관할 자리 정도는 미리 마련해 둬야 하지 않겠나.

“한번 먹어 보고는 싶은데 아무래도 무척 생소하다 보니…….”

“입맛에 맞지 않을까 싶으신 거군요?”

“예. 물론 궁금하긴 합니다.”

리들리가 미안하다는 듯 눈살을 살짝 찡그렸으나 사실 내포된 뜻은 다른 종류였고, 그건 아드넬도 진작 눈치챘다.

기본적으로 주방장에게 다른 음식을 얘기하는 것 자체가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낼 수 있는 일이라 말을 무척 조심해야 했다.

더욱이 제 편을 만들고자 한다면 뭐든 호감도를 최대로 끌어내야 하지 않겠나.

아드넬은 저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으로 예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실 이리 말씀을 드린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원래 제 조수들과 함께 만들어 먹기로 한 음식인데, 리들리 님도 아시다시피 앞뒤 사정 모른 채 무작정 끌려온지라…….”

“아…….”

“더구나 조수 중 한 명이 얼마 전 생일이었는데 그 음식을 무척, 좋아해서 약속한 것이다 보니 저도 되도록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해서 주방을 잠시 빌려주실 수 있는지 여쭤보고자 찾아왔습니다만, 사실 저는 단순히 공간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리들리 님께서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아무리 요리하는 걸 좋아한들 감히 별궁 주방장님의 실력과 비견할 수는 없지요.”

얼마 전 생일이었던데다 아주 좋아하는 음식이라니 거절하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주방에서 내쫓는 게 아니라 오히려 도움을 받고 싶다 하고, 여기서 은근히 돌려 칭찬해 주기까지 하는 유려한 언변에 리들리는 “음음.” 하며 퍽 신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와중에 한쪽 입꼬리는 가늘게 떨리는 것이 웃지 않으려 퍽 애쓰는 모양이었다.

이미 다 설득됐으면서.

“정 그러시다면야……. 다른 분도 아니고 아드넬 님의 부탁이시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리들리 님. 주방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 신성한 영역인지 아는 터라 이런 부탁을 드리기가 죄송스러웠는데 과연 호쾌하시군요.”

“하핫! 뭐, 그런 말을 종종 듣긴 합니다!”

“역시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젠 대놓고 띄워 주는 데도 좋다고 웃는 모습에 아드넬도 씨익 보기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히려 솔직하게 좋아하는 그가 필립을 보는 듯해 조금 귀여웠다.

“아, 제 조수들이 가져올 재료는 어디에 두면 될까요?”

“식자재실엔 이미 기본적인 것들이 있어서, 음……. 아! 지하 숙성실은 여유가 있습니다.”

“다행이군요. 그럼 도착하는 대로 그곳에…….”

“아드넬 님!”

그때, 아드넬이 제 이름을 외치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카르카스에 갔던 마차가 돌아왔어요!”

* * *

그 외침을 듣자마자 아드넬은 자리를 박차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주방에서 별궁 입구까지는 거리가 좀 되었지만, 어서 두 사람을 보고 싶은 마음에 복도부터 내달리고 보았다.

이내 별궁 입구 쪽에 다다르자 하녀의 말대로 카르카스에 갔던 마차가 돌아와 있었다.

문은 진작 열린 채였고, 그 앞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제이든! 필립!”

아드넬이 외치자 벼락이라도 맞은 듯 번쩍 고개를 돌린 두 사람이 냅다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

곰 같은 덩치의 사내와 어지간한 장정을 훌쩍 뛰어넘는 큰 키를 가진 남자가 달려오는 모양새가 무서울 법도 한데, 아드넬은 오히려 양팔을 벌리고 그들을 반겼다.

그리곤 저를 향해 달려온 남자들에게 덥석 안기며 그립고 보고 싶었던 마음을 한껏 드러냈다.

“보고 싶었어……! 이렇게 갑자기 불러서 미안해, 많이 놀랐지?”

“미안하긴 우리가 미안하지, 지켜 주지도 못하고…….”

“아드넬은? 그동안 잘 지낸 거야? 밥은 먹었어? 또 빵 쪼가리만 먹은 거 아니야?”

필립은 이제 얼굴 본 지 몇 초나 지났다고 벌써부터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으며, 제이든은 안도하면서도 걱정하는 기색이 다분한 표정으로 아드넬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그래, 이거였어.

이 온기와 걱정이 그리웠어.

아드넬은 저보다 한참은 더 큰 필립의 짙은 적발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웃어 보였다.

그가 허리를 잔뜩 숙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편 제이든은 그런 아드넬의 등에 팔이 닿지 않게끔 띄워 놓고서도 마치 보호하듯 감싼 채 매서운 눈초리로 주변을 살폈다.

‘……한산하군.’

2황자가 지낸다는 별궁은 마차를 타고 오면서 보았던 본성에 비하면 훨씬 작고 초라했다.

건물은 그 자체로도 기품이 있었으나 장식이며 규모가 뒤떨어졌다.

제아무리 황비의 자식이라지만 그래도 명색이 황자인데 이런 별궁에서 지낸다는 게 영 꺼림칙했다.

‘병 때문에 그런 건가? 아니면 황태자의 견제 때문에?’

보통 평민들은 신문으로 나오지 않는 이상 황실 사정엔 전무했다.

여기에 아드넬이 알려준 2황자의 라크란 병까지 고려했을 때 그가 추리할 수 있는 건 이 두 가지였다.

다만 2황자가 후계자 수업을 포기한 지 십여 년이 훌쩍 넘은 만큼 전자가 더 유력해 보였다.

제이든은 여러모로 상황을 잘 살펴야겠다고 생각하며 슬슬 별궁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아드넬의 뒤를 따랐다.

다만 별궁은 늘 한산하고 또 조용했기 때문에 아드넬 같은 방문객의 등장은 꽤 큰 이슈였다.

제 할 일을 제쳐 두고 달려온 여러 하인과 하녀들이 곳곳에서 기웃대며 그들을 주시했다.

개중에는 몇몇 얼굴을 발갛게 붉히는 결혼 적령기의 하녀들도 있었다.

‘음. 둘 다 괜찮은 신랑감이긴 하지.’

엔하시아 제국에서 정식 기사 서임을 받으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하나는 일정 나이가 되면 의무적으로 황실 기사단에 견습 기사로 들어가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점, 그리고 그 대상은 모두 귀족가 자제라는 점이었다.

황실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 주는 용도로 사용되는 제도였는데 모두 귀족가 영식인 만큼 대부분의 기사는 용모가 꽤 준수했다.

생각해 보면 간단한 이유였다.

사람은 아름다움을 좇기 마련이고, 귀족은 권력을 가지고 있으니 어지간해선 그 자식들도 괜찮은 용모를 물려받았다.

그래서 아드넬은 기사 행세를 할 용병을 구하면서 외모를 기준으로 세웠다.

그렇게 뽑은 사람이 상당히 준수한 편에 속하는 제이든과, 덩치가 크긴 하지만 얼굴은 용병과 기사 중간 즈음에 머물러 있는 필립이었다.

이러하니 하녀들이 은근히 얼굴을 붉히는 것도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때마침 아드넬과 마찬가지로 소식을 듣고 찾아온 모나가 싱긋 웃으며 세 사람을 반겼다.

“레스텔 별궁에 오신 두 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저는 아드넬 님을 모시는 전속 하녀, 모나라고 합니다.”

“제이든이라고 합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어어,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필립입니다.”

제이든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며 인사하자 필립도 허둥대며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였다.

와중에 제이든은 속으로 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모시는 사람의 성별에 따라 사용인이 배치될 텐데 아드넬은 왜 하녀가 배정되었지?’

혹시 여자라는 걸 들킨 건가?

그렇다고 보기엔 별 반응이 없는데.

입고 있는 옷도 여전히 남성복이고.

그리 생각하던 중 모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먼 길 오시느라 지치셨을 테니 침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드넬 님의 요청대로 가까이 붙어 있는 방을 미리 치워 두었습니다.”

그 말에 두 남자는 금세 화색이 되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잖아도 아드넬과 떨어지는 게 영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맨날 그녀의 문 앞을 지키던 사람들인지라 일정 거리에서 벗어나면 불안해진다는 게 이유였다.

“참, 그러고 보니 짐은?”

그때 아드넬이 고개를 돌려 제이든을 바라보자 그가 눈매를 가늘게 휘며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오직 그녀에게만 보여 주는 웃음이었다.

“나무 상자는 모두 주방에 가져다 두면 되는 것들이고, 재료는 가방에 따로 챙겨 왔습니다.”

그래도 다른 사람 앞이라고 말을 높이는 모습에 아드넬이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아까 막 만났을 땐 태연하게 반말을 해 놓고 이제 와 조수 노릇이라니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그냥 와서 좋은 건가. 나도 잘 모르겠어.’

사실 그녀는 제이든과 필립, 두 사람이 별궁에서 지낸다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편이 든든했다.

뭐랄까, 저를 끔찍이 여겨 주는 동복 오빠들을 데려온 느낌이랄까.

“저, 모나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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