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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17)화 (17/141)

17화

이날 늦은 밤, 별궁 내 집무실.

테시우스는 아까 못다 마신 술을 연이어 들이키고 있었다.

에메랄드빛 바다를 담은 듯한 눈이 아렌, 그 아이를 떠올리게 만들어서.

사실 아드넬은 라크란 병의 치료법을 수소문하다가 찾아낸 사람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어떤 약이 아니라 귀부인들이나 쓰는 화장품으로 빈민가 아이들을 치료했다고 했다.

듣기로는 ‘아실라’라는 주인이 따로 있다던데 치료한 사람은 아니니 그렇다 치고, 믿기 어렵지만 이미 효과를 본 사람들이 있으니 일단 데려와 치료하라 명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드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그는 어딘가 아렌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아렌이 화장품을 거래하던 상회의 이름은 ‘카리아 상회’였고, 그가 사라진 뒤 몇 년이 지나 ‘아드넬’을 통해 다시금 화장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에 의구심을 갖고 물어보니 카리아 상회의 주인은 아렌이 죽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아드넬이 한 말을 그대로 전한 것이고, 아렌이 어쩌다,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는 몰랐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에 덧붙인 말이 뇌리에 박혔다.

‘델리움 산에 불이 난 해, 여름이 다가오던 시기였습니다.’

그 불은 다름 아닌 테시우스 본인이 지른 불이었다.

‘내가 아렌을 죽인 걸지도 몰라.’

순간이동 마도구를 사용한 아렌이 왜 그 산을 완전히 벗어났으리라고만 생각했을까.

필요한 것을 챙기기 위해 돌아왔을 수도 있는 것이고, 애초에 목적지를 어디로 설정했는지도 모르는데 그저 흔적을 지우길 바랄 거란 생각에 아렌이 있는지 확인조차 안 하고 산불부터 지르다니.

그게 얼마나 어리석고 조급한 판단이었는지 한참이 지나고서야 깨달았다.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은 아드넬이 아렌일 거라는 희망으로 변모했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서일까, 막상 그를 봐도 아렌과는 크게 겹쳐 보이지 않았다.

그의 얼굴이 기억에서 많이 흐려진 탓이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건 그 찬란한 바닷빛 눈동자 하나뿐이었지만 그런 눈은 보기 드물 뿐이지,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여기에 아드넬은 아렌과 머리색도 달랐다.

목소리도 달랐다.

주인이 준 화장품을 상단에 넘기기만 하던 아렌과는 달리 그는 직접 화장품을 만들 줄도 안다고 했다.

그러니까 아드넬은, 아렌이 아니었다.

정말로 아렌이 죽었고, 내가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짐작은 그를 보는 순간 사실이 되고 말았다.

“……젠장!”

테시우스는 결국 들고 있던 잔을 거세게 집어 던지고 말았다.

와장창하며 벽에 부딪힌 유리잔이 산산조각이 났다.

쨍한 소음이 그의 복잡한 감정만큼이나 요란하게 울렸다.

슬픔.

그리움.

미안함.

아렌과 함께했던 시간은 8년 전 그날 모두 묻어 버렸는데.

8년 만에 알게 된 뼈아픈 사실이 묻어 둔 기억을 모조리 끄집어냈다.

‘아렌…….’

널 다시 만나면 해 주고 싶은 얘기가 정말 많았는데.

사실 나는 제국의 2황자였고.

네가 연고를 발라줬던 곳들의 흉터는 여전히 날 괴롭히고 있고.

흑표범으로 변한 건 아직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지만 우리가 헤어진 날 저절로 사람으로 돌아왔고.

그날 널 위협한 사람은 그저, 오해해서 그런 것이었다고.

그리고 이따금, 네가 해 줬던 요리들이 사무치도록 그리워지곤 한다고.

하지만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을 들을 사람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었다.

테시우스는 비탄에 젖어 넓은 손바닥으로 눈을 감쌌다.

한참 동안이나 그는, 얼굴을 가린 손을 내리지 못했다.

* * *

우당탕.

아드넬이 끌려간 이후로 초상이라도 난 양 고요하던 집에 소란이 일었다.

다름 아닌 필립으로, 거의 울기 직전의 얼굴을 한 그가 버럭 외쳤다.

“제이든! 황성에서 사람이 왔어!”

세상을 살아갈 희망을 전부 잃은 사람처럼 소파 위에 축 늘어져 있던 제이든은 방을 쩌렁쩌렁 울리는 외침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필립이 내민 종이를 황급히 낚아채 냅다 읽고 보았다.

태양과 달을 가리키는 교차된 두 자루의 검과 그 사이에 자리한 방패 형상.

황실을 상징하는 문양이 그려진 고급스러운 종이 위에, 익숙하디익숙한 글자가 쓰여 있었다.

‘2황자가 라크란 병을 앓고 있어. 예전에 내가 빈민가 아이들을 치료했다는 소리를 듣고 찾은 모양인데, 소문대로 인성에 문제 있더라. 나 혼자서는 도저히 못 버틸 것 같아. 그래서 두 사람을 내 조수라 말하고 데려오라 했어. 필요한 목록은 아래에 적어 둘 테니 모두 챙겨줘. 그리고 알지? 된장, 고추장, 간장, 지하 저장고에 있는 양념도 모조리 챙겨. 제육볶음에 막걸리 먹자.’

다른 사람들은 결코 알아보지 못하는 익숙한 글자는 다름 아닌 한글이었다.

아드넬은 저와 마찬가지로 평민인 필립과 제이든에게 꾸준히 글자를 가르쳐 왔다.

대륙 공용어보다 쉬운 한글을 먼저 가르쳤고, 그들이 제법 능숙하게 읽고 쓸 즈음이 되어선 공용어도 가르쳤다.

배움이 더딜지언정 두 사람은 아드넬의 가르침을 열심히 받았다.

그 결과, 세 사람은 대륙을 통틀어 저들 말고는 누구도 알아볼 수 없는 언어로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하…….”

편지를 다 읽은 제이든이 마치 탄식 같은 숨을 내뱉으며 넓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덮었다.

그의 연한 갈색 머리가 가볍게 흐트러졌다.

다행이다, 오직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갑자기 잡혀가서 걱정했는데 적어도 아드넬에게 손대진 않을 것 같아.”

“그렇겠지. 지금껏 아무도 그 병을 치료하지 못했는데 설마하니 손을 댈까. 그보다도…….”

2황자가 라크란 병을 앓고 있다니.

그건 처음 듣는 얘기였다.

여기에 아드넬이 저들만 알아볼 수 있는 한글로 썼다는 건 비밀에 부쳐야 한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제이든은 “역시 나랑 한 약속을 잊지 않은 거야. 같이 축하하기로 했었잖아!” 하며 감동 어린 눈물을 글썽이는 필립에게 다소 매서운 눈초리를 보냈다.

“무조건 입조심해야 해. 알지? 황성엔 우리 목쯤은 단칼에 자를 수 있는 사람들 천지야.”

“물론이지. 얌전히 있을게.”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2황자가 라크란 병을 앓는다는 것도 어디 가서 말하지 마.”

“네 눈엔 내가 그 정도로밖에 안 보여?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거든!”

“그래서 ‘혹시나’라고 했잖아.”

제이든은 투덜대는 필립을 뒤로한 채 책상으로 향했다.

그리곤 아드넬이 적은 편지 아랫부분에 적혀 있는 재료 목록을 새 종이에 줄줄이 옮겨 쓰기 시작했다.

플로럴 워터, 에센셜 오일, 올리브 리퀴드, 밀랍, 왁스…….

모두 천연 화장품을 만들 때 들어가는 재료들이었다.

“일단 각자 따로 챙기자. 저장고엔 내가 다녀올게.”

“그래.”

필립이 지하실로 내려간 사이 마저 옮겨 적은 제이든은 아드넬의 편지는 잘 갈무리해서 품속에 집어넣고 서둘러 그녀의 작업실로 향했다.

사실 그는 아드넬이 진짜 ‘아실라’라는 것과 ‘여자’라는 걸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필립 같은 둔탱이는 꿈에도 모르지만 한집에서 같이 살면서 조금만 유심히 지켜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다만 무슨 이유에선지 줄곧 숨기며 앞으로도 공개할 생각이 없어 보이기에 잠자코 모른 척할 뿐이었다.

‘어차피 그것도 곧 끝날 테지만.’

머지않아 그는 2층의 방 두 칸을 연결해 만든 아드넬의 전용 작업실에 도착했다.

이곳에 있는 재료만도 어마어마했지만 목록을 보아하니 당장 쓸 것만 써 둔 모양이었다.

제이든은 능숙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찬장에 즐비하게 놓인 여러 가지 오일이며 첨가물에 마도구까지 한가득 챙겼다.

다음으론 아드넬의 방이었다.

다소 차분하고 정적인 느낌이 드는 침실에서 제이든은, 침대 옆 협탁 서랍을 하나하나 열어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서랍을 연 순간, 그의 눈에 곱게 접혀 있는 새하얀 천 뭉치가 대번에 들어왔다.

‘……아드넬, 미안.’

연인도 아닌 저가 이런 걸 챙겨 주면 수치스러워할지도 모르지만, 한 명쯤은 아드넬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녀는 아주 어릴 때부터 혼자 지내버릇해서인지 어지간한 일은 다 제 선에서 처리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집도 아닌 황성에서 이런 개인적인 사정을 몰래 처리하기란 힘들 터다.

애초에 구하기도 어려울 거고.

제이든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이내 얼굴을 붉히며 냉큼 가방에 챙겨 넣었다.

그래, 지금은 아니지만 곧 고백할 거니까 괜찮아.

꿈만 같은 일이지만 정말로 언젠가 연인이 된다면 이런 것쯤은 몇백 번이고 챙겨 줄 테니까.

그렇게 마지막 짐까지 아드넬의 ‘전용 가방’에 챙긴 제이든은 1층으로 내려왔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는데, 벌써 다 챙겼는지 지하실로 이어지는 입구 옆에 큼지막한 나무 상자가 한가득 놓여 있었다.

“다 했어? 얼마나 기다려야 해?”

“……잠깐만! 이게 마지막이야!”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필립이 다급하게 외치며 곧 묵직한 상자 하나를 더 들어 올렸다.

계단 위에서 양팔로 번쩍 들어 올린 모양새였는데 필립 정도 되니까 가능한 일이지, 어지간한 남자도 저렇게 들진 못할 거라며 제이든이 잠시 진저리를 쳤다.

‘하여튼 순 곰탱이라니까.’

무식하리만큼 두껍게 부푼 팔만 봐도 그랬다.

그렇게 마지막 상자까지 올린 필립은 살짝 배어 나온 진땀을 소매로 훔치며 히죽 웃어 보였다.

“다 했어!”

“그래. 그럼 이만 가자.”

제이든이 안 봐도 알겠다는 듯 1층의 현관문을 열자 널찍한 마당 끝, 대문 근처에 세워진 마차 두 대와 그 옆에 선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남자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뒤 필립과 함께 쇳덩어리라도 든 양 무거운 나무 상자를 옮겼다.

아드넬이 이 두 사람을 별궁에서 만난 건 그로부터 하루가 지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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