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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16)화 (16/141)

16화

식당으로 향하며 복도를 지나는 중에도 모나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곳 레스텔 별궁은 황궁 내에서도 밤하늘의 별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이랍니다. 특히나 후원의 정자는 천장이 유리로 만들어져 별구경 하기엔 그만이지요.”

“그렇군요…….”

“나중에 밤 산책이 하고 싶으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처음이라 길이 어려우실 테니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그리고 별궁 뒤쪽에는 온실이 하나 있는데 그곳은…….”

그녀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가다 보니 두 사람은 금세 별궁 주방 쪽에 와 있었다.

아무래도 주방과 식당이 가깝게 붙어 있는 모양인데,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맛있는 음식 냄새가 새어 나왔다.

정확한 시간은 모르나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걸 봐선 별궁 내 사용인들의 식사가 뒤늦게 준비되는 모양이었다.

‘조금 궁금하네. 황성 주방은 어떠려나.’

가능하다면 내가 직접 요리해서 먹고 싶은데.

당장 배가 고픈 것이야 대충 있는 음식으로 때우면 된다지만, 2황자가 완치될 때까지 못 나간다는 감금형이 내려진 이상 수프에 곁들인 빵으로 버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드넬이란 새로운 인물로 둔갑하고서도 또다시 저만의 작은 농장을 구축해 메주며 된장이며 고추장에 김치까지 만들어 먹었는데 두 번만 먹어도 물리는 느끼한 식단으로 어떻게 버티나.

아드넬은 잠자코 모나를 따라가려다 입을 열었다.

“저기, 주방을 잠시 구경해도 될까요?”

“네? 주방…… 말씀이십니까?”

그런데 예상외로, 별것도 아닌 부탁이라 생각해 가볍게 물어본 것과 달리 모나가 뜸을 들이며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

이에 아드넬이 고개를 갸웃하자 그녀가 뒤늦게 덧붙였다.

“음……. 조금…… 정신이 없으실 텐데 그래도 괜찮으실까요?”

“어……. 왜 정신이 없는지…….”

“이게 말로 설명드리기는 애매해서요, 그러니까…….”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는 표정이 너무 적나라해서일까, 아드넬은 오히려 더 궁금해졌다.

“전 괜찮습니다. 그냥 순수하게 궁금해서요.”

“정 그러시다면…….”

모나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주방 문을 열었다.

활짝 하고 열린 순간 향긋한 음식 냄새가 훙 하고 불어오며 코를 간지럽혔다.

그와 동시에 아드넬의 눈에도 주방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일단 그녀가 살던 집에 있는 주방과는 기본적으로 면적부터가 남달랐다.

냄비를 올릴 수 있는 화구만 무려 여섯 개에 일반 가정집에선 찾아보기 힘든 화덕이며 기다란 조리대까지 전문적인 느낌이 물씬 났다.

여기에 사람들도 한가득이었는데 모나와 비슷한 유니폼을 입은 하녀와 하인들은 물론이고 주방장까지 무척이나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건 아주 잠시였다.

한창 바쁘게 움직이던 이들의 시선은 모나가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곧장 한곳에 쏠렸다.

일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아드넬 님, 맞으시지요? 레스텔 별궁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저는 별궁 주방장인 리들리라고 합니다! 따로 좋아하는 음식이 있으시다면 제게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잘 부탁드립니다, 아드넬 님!”

와당탕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그녀에게 대뜸 달려들어 질문 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아드넬은 무척 당혹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다 오늘 처음 보는 사람들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들은 저를 알아보는 것으로도 모자라 어딘가 한껏 기대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심지어는…….

“아드넬 님께서 라크란 병에 걸린 아기들을 치료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역시 그 병의 치료법을 아시는 거지요?”

“본격적인 치료는 언제부터 시작하실 생각이십니까?”

여기저기서 팔을 번쩍 치켜들며 열렬한 수강생처럼 질문을 던지기까지 했다.

아드넬은 그제야 모나가 말했던 ‘정신없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진땀을 흘리자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모나가 손뼉을 한 번 쳤다.

“다들 진정하세요, 환대는 감사하지만 이래서는 당황스럽기만 하실 겁니다.”

모나 양……!

아드넬은 조금 감동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뒤늦게 흠흠 헛기침을 하며 입을 꾹 다물지언정, 여전히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물어보고 싶은 게 아주 많은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2황자 전하께선 잠이 부족하신 만큼 매사에 무척 예민하셔…….”

“이제 아드넬 님께서 오셨으니 2황자 전하의 고통도 분명 끝날 테지요, 아드넬 님께선 전하의 구원자이자 동시의 저희의 구원자도 되십니다……!”

“예?”

“제발 2황자 전하의 폭정을 끝내 주세요, 아드넬 님!”

그러나 모나가 다시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한 사람이 그녀의 말을 뚝 잘라먹었다.

아드넬이 당황해 되묻자 울상을 지은 사람들이 이내 훌쩍이며 저마다 고충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툭하면 상을 엎어 버리시니 더는 요리하고픈 마음도 들지 않습니다……!”

“목욕 시중은 또 어떻고요, 조금만 심기를 거슬러도 어디를 자르겠다 매섭게 호통을 치시는걸요.”

“예전에 차를 따르다 실수한 아이는 진작 쫓겨났어요…….”

“이래서는 저희 모두 죽어 나갈 겁니다.”

엉엉…….

작게 울려 퍼지는 곡소리에 아드넬은 놀라 눈을 끔벅였다.

‘그러니까 이게……. 예민한 2황자를 잠재울 수 있다는 게 나뿐이라서 그렇다는 소리야……?’

그녀의 짐작은 정확했다.

사지를 찢어 성벽에 걸어 버린다더니, 과연 그 말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아드넬 님, 제발 2황자 전하를 치료해 주세요……!”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도저히 거절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어차피 거절도 못 하긴 하지만…….

잠시간 머리가 지끈거렸으나 아드넬은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내 편이 있다는 건 좋은 거야.’

그녀는 2황자의 명으로 무작정 잡혀 끌려왔다.

하지만 아드넬에게도 책임져야 할 사람이 있었다.

바로 제이든과 필립이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저를 지켜준 두 사람에게 끝까지 책임져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입 밖으로 내어 말한 약속이라서가 아니라 어느새 자신에게도 가족 같은 사람들이 되어서였다.

그런데 이렇게 끌려왔으니 보나 마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터, 어차피 2황자가 내린 명은 ‘감금’이니 연락 정도는 해도 될 것이었다.

‘그리고 내 도구랑 재료들도. 모두 가져와야 해.’

상황이 어떻든 간에 2황자에게 평생 붙잡혀 있을 게 아니라면 뭐라도 해야만 했다.

게다가 모나의 얘기에서 작은 힌트도 얻었기 때문에 일단 화장품부터 만들 생각이었다.

다만 그러면 피치 못하게 정체가 밝혀질 수 있었기에, 아드넬은 짧은 시간 동안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뒤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 그러시다면 작은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지…….”

“물론입니다! 뭐든 말씀하십시오!”

“라크란 병을 치료하려면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모두 카르카스에 있는 제 집에 있는데, 저는 별궁 밖으로 나갈 수 없어 대신 가져와 주실 분이 필요합니다.”

“그런 거라면 따로 적임자를…….”

“다만 이 일은 여러분께 부탁드릴 수가 없습니다. 모두 생소한 것들이라 정확히 어떤 건지 알아보기 힘드실 겁니다.”

확실히…….

별궁 내 사용인들은 아드넬에 대해선 아주 단편적인 것밖에 알지 못했다.

다름 아닌 ‘아드넬이라는 평민이 라크란 병을 치료했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뭐로 어떻게 치료를 했는지도 모르는데 이런저런 약초를 가져와 달라 하면 어찌 알아보나.

사람들은 금세 수긍해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카스에 제 조수들이 있습니다. 이름은 각각 제이든, 그리고 필립입니다. 그 둘에게 제가 작성한 목록을 건네주시면 알아서 필요한 것들을 챙겨줄 겁니다.”

“글을…… 쓰실 줄 아십니까?”

그때 아드넬이 말한 ‘목록’이라는 단어에 여러 명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기본적으로 평민들은 듣고 말하기만 가능하지, 읽고 쓸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물론 예상했기에 아드넬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 주인님께서 알려주셨습니다.”

“주인님이시라면…….”

“혹 카리아 상회에서 값비싼 화장품을 독점 판매한다는 걸 아시는지요?”

별궁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이니 귀족의 사치품에 대한 얘기는 어느 정도 들었을 터다.

그리 예상한 대로, 곧 몇몇 하녀들이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럼요! 수도의 귀부인들이라면 하나쯤은 꼭 갖고 있다던, 그 ‘아실라 님’의 화장품…….”

“설마……. 그 주인님이라는 분이 아실라 님이신가요?”

“예, 제 주인님이십니다. 저는 그분의 대리인으로서 일하고 있고요.”

“맙소사!”

“아드넬 님이 그분의 대리인이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하녀들은 부담스러우리만큼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아드넬을 쳐다보았다.

다분히 원하는 게 따로 있는 얼굴들이었다.

너무도 명백해서 못 알아볼 수가 없는 수준이었지만 아드넬은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였다.

“오랜 시간 대리인으로 일하면서 저 또한 화장품 만드는 법을 알음알음 배웠습니다. 빈민가의 아이들도 그 화장품으로 치료했고요.”

“세상에나…….”

“다만 손이 많이 필요한 작업인지라 제 조수들도 필요합니다. 혹시 그들도 함께 데려올 수 있을까요?”

“치료에 필요한 것이라면 뭐든 지원하라 하셨으니 따로 전하께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아드넬이 보기 좋은 수려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하녀들이 두 뺨을 살짝 붉혔다.

흥분했을 땐 미처 제대로 뜯어보지 못한 아름다운 얼굴이 새삼 눈에 들어온 탓이다.

평민치곤 지나치게 예쁜 청년이었다.

빛이 바랜 듯한 흑발은 새하얀 피부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고, 눈동자는 그 어떤 보석보다도 아름답게 반짝였으며, 오목조목한 이목구비도 어디 하나 모난 곳 없이 매끄러웠다.

아무래도 그 ‘주인’이란 사람은 이런 예쁘장한 남자가 취향인가 보다며 하녀들이 생각했다.

“참, 마지막으로 하나 더…….”

그때 아드넬이 다시금 입을 열자 여기저기서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딘가 조금 긴장한 듯도, 또 설레는 듯도 한 얼굴들이었으나 이어진 말은 그들이 예상한 것과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요기할 음식을 조금만 챙겨 주셨으면…….”

“지금 바로 통돼지 구이를 해 드리겠습니다!”

“돼지가 웬 말이야! 당장 최상급 소고기 스테이크를 대령합지요!”

열렬한 반응에 아드넬이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모두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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