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한편 그 시각, 본성 황실 기사단장 집무실.
차가운 쇠갑옷을 전신에 두른 남자가 얼굴을 가린 투구를 벗으며 아침 들녘 같은 밀빛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나 묵직한 갑옷을 내려놓아도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아드리아나…….’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이름.
이젠 모두 잊혔다고 생각했건만.
2황자의 명을 받고 찾아간 카르카스에서 마주한 눈동자는 오랜 기억을 지나칠 정도로 선명하게 떠올렸다.
물론 그 에메랄드 바닷빛 눈동자는 드물 뿐이지, 아예 없는 게 아니라는 건 어느 누구보다도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한때 그녀를 사무치게 찾아 헤맸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나타나지 않는 행적에 끝내 마음을 내려놓았고, 그날로부터 그녀를 잊었다.
아니, 잊으려 했었다.
‘그대는 아직도……. 내 마음 한쪽에 자리를 틀고 앉아, 끝내 떠나가지 않는군.’
원망스러웠다.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는데.
그 사랑을 온 마음을 다해 보여 주었는데.
평생을 지켜 주겠노라 약속했는데.
그 말을 얼마나 믿지 못했으면, 말 한마디 없이 홀로 떠나 버렸을까.
물론 당시에 그는 아내가 있었다.
그녀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도 있었다.
하지만 아드리아나는 아내를 만나기 전부터 그의 정인이었다.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만큼 사랑하던, 진정한 영혼의 반쪽이었다.
‘다시 찾았을 땐 절대 떠나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반역이라는 누명을 쓴 건 알고 있었지만 세상은 그녀를 죄인으로 낙인찍었다.
반역자의 딸이라는 주홍 글씨는 아드리아나의 발목을 붙잡았고, 도망치듯 떠날 수밖에 없던 그녀를 끝내 놓치고 말았다.
아버지의 강력한 주장으로 결국 아내를 받아들이긴 했으나 그는 줄곧 아드리아나를 찾았다.
마침내 그녀와 재회했을 때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주겠노라 그리 약속했으나, 다시 만난 지 3개월 만에 하룻밤 아지랑이처럼 사라졌다.
호르세는 그것이 못내 원망스럽고, 안타깝고, 밉고, 또 그리웠다.
‘진실을 알려주지 않을 거라면 기억에서라도 떠나가지. 마음마저 차지하고 있으면 나는 여기서, 얼마나 더…….’
2황자의 명으로 붙잡아 온, 앳된 얼굴의 청년이 왜 그리 걸리는지 그조차도 알 수 없었다.
아드리아나의 화려한 외모와는 다소 상반되는 이목구비에 그녀의 붉은 머리칼도 갖지 않았지만, 보기 드문 그 눈동자를 마주하자마자 대번에 아드리아나가 떠올랐다.
아무렇지 않은 척 고함을 치며 체포했으나 잔뜩 겁먹은 얼굴을 보니, 마치 저가 아드리아나에게 화를 내는 것같이 느껴졌다.
“후우…….”
호르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털썩, 집무실 소파에 걸터앉았다.
몸은 분명 힘들지 않은데 지칠 대로 지친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 청년과는 다시 마주칠 일이 없을 테지.’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잊힐 것이다.
이렇게 마음이 불편할 일도, 사랑했던 연인의 기억으로 가슴 아플 일도, 사라질 것이다.
‘그래. 다시 만나지만 않으면 돼. 어차피 별궁에서만 지낼 테니 마주칠 일도 없을 거야.’
그러니까, 괜찮아.
모두 잊힐 거야.
전부 다, 없던 것처럼…….
호르세는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그가 주문처럼 되뇌는 한 마디가 가슴 속에서 메아리쳤다.
* * *
“빌어먹을……!”
제 할 말만 하고 떠난 2황자 덕분에 홀로 응접실에 남은 아드넬이 낮게 욕지기를 내뱉었다.
정말이지 억울해도 너무 억울해서 욕이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만큼 거지 같은 상황이었다.
앞뒤 사정 설명 없이 다짜고짜 저를 잡아 온 2황자는 ‘책임지라.’는 터무니없는 말에 이어 감금형까지 내렸다.
꿈이라고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판국에 진짜 현실이라니 더 기가 막혔다.
‘2황자가 라크란 병을 앓는지는 몰랐단 말이야……!’
만약 알았더라면 절대 베풀지 않을 선의였다.
그러니까 아드넬은, 전생에선 ‘아토피’라 불리는 라크란 병에 걸린 빈민가 아기들을 고쳐 준 전적이 있었다.
더러운 뒷골목에 자리한 판자촌에서 사는 아기들은 아토피에도 쉽게 걸렸다.
그 모습이 한때의 저를 보는 듯해서 아드넬은 나름의 동정을 베풀었다.
발진을 가라앉히는 아토 밤이나 땀띠를 예방해 주는 베이비 파우더 정도로 손쉽게 만들 수 있는 화장품을 선물로 준 것인데 그것만으로도 아기들은 금세 나았다.
그게 전부였다.
동정에서 비롯된 약간의 선의.
그런데 설마하니 그 선의가 2황자의 귀에 들어갈 줄이야!
눈으로 보기에도 심한 아토피를 겪고 있으니 치료법에 대해 수소문하는 건 당연하지만, 그가 라크란 병을 앓는다는 걸 알았더라면 그런 같잖은 동정은 결코 베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더 억울했다.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아야 하는데 복은커녕 감금을 당할 줄은 몰랐다.
어디 그뿐인가.
‘만약 아무런 차도도 보이지 않는다면 사지를 찢어 성벽에 걸어 주마.’
낮게 깔린 저음은 비릿했고 또한 소름 끼쳤다.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음성에 아드넬이 작게 몸을 떨었다.
‘이제 어떡하지.’
2황자의 아토피는 그녀가 치료한 아기들에 비하면 훨씬 심했다.
물론 전생의 그녀가 천연 화장품을 만들게 된 구체적인 계기가 다름 아닌 당시 본인이 앓고 있던 아토피 때문이었다지만 의사도 아닌데 아토피에 좋은 화장품 몇 개 만드는 걸로 완치라니, 그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아드넬은 그저 막막하고 또 막막한 현실에 탄식을 내뱉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제 살롱을 열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더는 클리프와 수익을 나눌 필요 없이 돈방석에 앉기만 하면 된다고 그리 상상의 나래를 펼쳤는데.
어쩜 내 인생은 순탄하게 한 번 풀리는 적이 없나.
정말이지 박복해도 지지리 박복한 인생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하아…….”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런데 아드넬이 깊은 한숨을 내쉬는 순간, 낮은 노크 소리와 함께 문 너머로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라 얼굴을 가린 손을 내리며 고개를 돌리자 달칵 문이 열렸다.
메이드복을 입은 다소 젊은 얼굴의 여자였는데, 그녀는 소파에 앉아 있던 아드넬을 발견하자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앞으로 아드넬 님을 모실 전속 하녀, 모나라고 합니다.”
“아, 그…….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제겐 편히 말을 놓으셔도 됩니다.”
“아, 아닙니다. 전 귀족도 아니고…….”
“그래도 아드넬 님께선 엄연한 2황자 전하의 손님이신걸요. 모쪼록 편안히 지내실 수 있게끔 성심껏 모시란 명을 받았답니다.”
사지를 찢겠다더니 손님 대접을 해 줄 생각은 있었나 보지?
아드넬은 외형은 완벽한 제 취향이나 인성은 파탄 난 2황자를 떠올리며 다시금 솟는 분노를 가까스로 삭였다.
“……많이 혼란스러우시리라는 점,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건 누구보다도 저희 별궁 사용인들이 가장 잘 알고 있지요.”
그때, 모나가 다소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내며 가까이 다가왔다.
아드넬이 놀라 토끼처럼 눈을 크게 뜨자 그녀가 덧붙였다.
“아드넬 님께선 라크란 병을 치료하셨지요?”
“그게……. 치료하긴 했는데, 그건 아이들의 증상이 그리 심하지 않아서였고…….”
“그럼 그 병이 심한 간지럼증을 동반한다는 것도 아시겠군요.”
순 자기 할 말만 하잖아?
아드넬이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들었음에도 모나는 가볍게 웃으며 덧붙였다.
“2황자 전하께서 다소 난폭하고, 또 거칠어 보이시겠지만 원래부터 그러셨던 건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심한 간지럼증을 동반하는 병인지라 새벽에도 툭하면 깨시어 잠이 늘 부족하신 게 가장 큰 원인이랄까요.”
“그게 무슨…….”
“간지럼증을 이기려 새벽 중에 검을 휘두르는 일도 다반사에, 잠깐 잠이 들어도 얼마 자지 못하고 일어나시곤 합니다. 그 때문에 자연스레, 매사 날이 선 것처럼 예민해지셔 지금처럼 포악한 성정이 되셨습니다. 하지만 이는 바꿔 말하면 아드넬 님께서 치료만 해 주신다면 2황자 전하께선 아드넬 님께 손끝 하나 대지 못한다는 얘기와 다름없습니다.”
모나의 목소리엔 확신이 차 있었으나 아드넬은 웃을 수 없었다.
그걸 누가 몰라?
치료가 성공적이라면 상대가 2황자인 만큼 큰 상을 받고도 남을 것이다.
하지만 차도를 보이지 않으면 사지가 찢기겠지.
“저도 처음엔 그리 생각했습니다만 증세가 워낙 심하신 터라…….”
“이렇다 할 치료란 치료는 다 받아 봤음에도 하나같이 효과가 없었다 보니 당장의 신뢰가 없으신 것뿐이지, 사실 전하께서도 완치를 기대하시는 건 아니랍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시는지……?”
“전 2황자 전하의 사람이니까요. 장담할 수 있습니다.”
차분한 음성엔 온기와 힘이 담겨 있었다.
물론 여전히 탐탁잖긴 했지만…….
‘그래도 2황자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말하니까 조금 믿음은 가네.’
이 사람들이야말로 심기에 조금만 거슬리면 손과 목이 잘려 나갈 사람들이니까.
그 위험을 감수하고 모시는 사람이 확신할 정도라니 정말로, 아주 미약하게나마 마음이 놓였다.
“감사합니다, 모나 님. 저는……확신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편히 말을 놓으셔도…….”
“아무래도 이게 더 편해서요. 죄송합니다.”
“죄송이시랄 것까지요, 정 그러시다면 내키실 때 말을 놓아 주세요. 그럼 이만 침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저, 침실은 됐고 혹시…….”
아드넬은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볼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요기를 좀 할 수 있는지……. 제가 어제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질 못해서요.”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텅 빈 위장이 아까부터 요동치는 중이라 일단 배부터 채우고 싶었다.
모나는 미약하나마 발개진 뺨을 보더니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요. 미처 헤아리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그럼 식당 먼저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내 그녀가 몸을 돌려 먼저 나가자 아드넬도 냉큼 뒤따라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