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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14)화 (14/141)

14화

순간 아드넬의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체포라니?

내가 왜?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며 정말 혹시라도, 잘못한 게 있는지 지난 기억들을 되짚어 보았지만 그러기엔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았다.

기사의 뒤에 서 있던 병사들이 냉큼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와 아드넬의 팔을 붙잡고 뒤로 꺾었다.

“왜, 왜 이러십니까……! 전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습니다! 최소한 죄목이 뭔지라도 말씀을……!”

“그건 수도에 올라가면 2황자 전하께서 친히 말씀해 주실 거다. 끌고 가!”

병사들은 가차 없이 아드넬을 끌고 나갔다.

그제야 그녀의 눈에도 옆구리를 붙잡은 채 “으으…….” 하며 낮은 신음을 흘리는 두 남자가 들어왔다.

“제이든, 필립……!”

이젠 아드넬에게 친구이자 동료, 그리고 새 가족이 된 두 사람은 통증을 호소하면서도 그녀를 구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에 절망하며 흔들리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눈을 제대로 마주칠 틈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아드넬……!”

그들을 스쳐 지나가며 등 뒤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병사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황실 기사의 등장 자체가 큰 소란이라 무슨 일인지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이 연신 웅성거렸으나, 영문도 모른 채 끌려 나온 아드넬은 걸쇠가 문밖에 달려 있는 마차에 강제로 올라타야만 했다.

그리고 마차는, 아드넬이 타자마자 소란을 가로지르며 곧장 수도로 출발했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땐 밝은 대낮이었다.

눈을 몇 번 끔벅이며 정신을 차리던 아드넬은 이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여기가 어디지?

술기운에 졸음까지 덮쳐 깜빡 잠이 든 모양인데, 일어나자마자 머릿속에 밀려오는 기억들이 너무도 비현실적이라 혼란스러웠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본능적으로 상황을 살피던 그때.

“……허억!”

일렁이는 촛불처럼 흉흉하게 빛나는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의 바로 맞은편에, 사람의 것이 분명한 실루엣이 있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격한 숨을 들이켜며 몸을 뒤로 뺐으나, 등 뒤에 닿은 건 차갑고 축축한 돌벽의 감촉이 아닌 푹신한 소파의 감촉이었다.

끌려올 때 상상한 것과 달리 이곳은 감옥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방, 그것도 꽤 넓고 좋은 방이었다.

곧 흐렸던 시야가 점차 선명해지며 눈앞의 인영을 찬찬히 보여 주었다.

윤기가 흐르는 칠흑 같은 머리와 황금을 통째로 녹여 부은 듯한 금안을 담은 치켜 올라간 눈매.

사람의 몸이 저럴 수 있나 싶을 만큼 쩍 벌어진 어깨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셔츠 아래 감춰진 가슴팍.

그리고…….

“늦게도 일어나는군.”

일개 평민에게선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위압감 어린 목소리까지.

모두 단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2황자 테시우스……!’

테시우스 폰 아이테라.

엔하시아 대제국의 네 번째로 고귀한 핏줄.

그녀를 이곳에 끌고 온 장본인이자 악명으로 자자한 바로 그 2황자였다.

‘이 사람이 왜 나를?’

아드넬이 2황자에 대해 아는 건 오래 앓은 병 탓인지 성격이 불같고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 없이 목을 베어 버리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는 소문뿐이었다.

이렇다 할 접점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그에게 밉보일 짓 또한 한 적이 없었다.

그럼 대체 왜?

아드넬의 바닷빛 눈동자 위로 혼란이 어렸다.

그 눈을 마주한 2황자의 금안 또한 어딘가 거세게 흔들리는가 싶었으나, 테시우스는 금세 동요를 지웠다.

대신 사뭇 거만한 태도로 다리를 꼰 채 술잔을 잠시간 기울이더니 말했다.

“……오늘부터 네가 내 몸을 책임지도록 해라.”

순간 아드넬이 당황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책임을 지라니? 그게 뭔 소리야?’

듣고도 이해가 되지 않아 바보처럼 눈을 끔벅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다짜고짜 끌고 와서 한다는 소리가 가관이었다.

그러나 테시우스는 태연했고, 또한 여유로웠다.

아드넬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불쾌한 기색을 들키지 않게끔 고개를 수그렸다.

상대는 황자,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신분의 사람이다.

“송구하오나 전하……. 책임을 지라 명하신 것이 무엇인지 감히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일부러 낮게 깐 목소리가 혼란으로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이를 겁먹은 것으로 생각한 테시우스는 잠시간 아드넬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저보다는 다소 옅은 색의 흑발은 어깨 위에서 찰랑거렸으나 퍽 부드러워 보였고, 새하얀 피부 위 이목구비도 앞머리에 좀 가려져서 그렇지, 하관만 봐도 꽤 예쁘장한 외모를 가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니었다.

이렇게 제 눈으로 직접 보고 나니 알 수 있었다.

테시우스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으나, 그는 금세 고개를 들었다.

“나에 대해 아는 걸 말해 보아라.”

“예……?”

뜬금없는 소리에 아드넬이 되물었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일렁이는 금안만이 알 수 없는 빛으로 반짝이며 그녀를 응시할 뿐이었다.

아드넬은 고개를 수그린 채 안쪽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는 걸 말해 보라니 뭐 이런 질 나쁜……!’

저에 대한 얘기라면 악명밖에 없다는 걸 알고 묻는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런 걸 묻지?

‘듣고 심기에 거슬리면 혓바닥을 잘라 버릴 위인이……!’

불안감과 공포로 심장이 불규칙하게 박동했다.

솔직하게 말했다간 이 자리에서 어디 하나가 잘려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아드넬은 쥐어짜듯 간신히 한 마디를 내뱉었다.

“전하에 대해 제가 아는 건……. 없습니다.”

“없다……? 정말, 단 하나도 없다는 건가?”

“예, 없습니다.”

그것 말고 달리 할 수 있는 말이 뭐가 있다고!

아드넬은 머리 위에 군림하는 포식자를 마주한 느낌에 몸을 가늘게 떨었다.

다행히도 겁먹은 강아지 같은 모습이 그리 심기에 거슬리진 않았는지, 테시우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 그렇다면야.”

“…….”

“고개를 들어라.”

아드넬은 진심으로 그의 얼굴을 마주 보고 싶지 않았다.

두렵기도 두렵거니와 묵직한 저음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이 숨통을 조여 왔다.

그러나 그 또한 2황자가 원한다면 죄목이 될 수 있어, 아드넬은 마지못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

다시금 그의 선명한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칠흑 같은 머리며 황금 같은 눈동자를 제하고서라도 우뚝 솟은 콧날과 다부진 턱선, 움푹 팬 볼과 술을 한 모금 넘길 때마다 움직이는 툭 튀어나온 목울대까지 어디 하나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럼에도 아드넬은 감탄할 수 없었다.

그녀가 눈알을 위로 굴린 순간, 2황자가 대뜸 저가 입은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에 화들짝 놀라며 다시금 고개를 수그렸지만 테시우스는 시선을 피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라 말했을 텐데.”

“그, 그것이…….”

“네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도록.”

어느새 아드넬의 머리는 새하얗게 변해 버리고 말았다.

이제, 모든 게 명백해졌다.

‘2황자가 남색을 즐기는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저를 이곳에 데려다 놓을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다.

아드넬은 같은 남자-실상은 아니지만-에게도 수도 없이 추파를 받았으며, 그녀가 자란 시르노에선 사항에서 유명한 사내가 나중에 성인이 되면 꼭 자기 가게로 오라며 돈을 쥐어 준 적도 있었다.

단 한 번도 자신의 예쁘장한 외모를 불평하지 않았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역시 이 세계에서 예쁜 건 독이 되나보다고 아드넬은 생각하며 당장이라도 질끈 감고 싶은 눈에 부릅 힘을 주었다.

너무 힘을 주어서인지 눈알이 시렸으나 그와 별개로 두 뺨은 발개졌다.

테시우스가 터질 것 같던 셔츠의 단추를 풀 때마다 툭 툭 소리가 나며 활짝 벌어진 탓이다.

그 사이로 드러난 깊은 가슴골이며 정확한 대칭의 근육은 안타깝게도 아드넬의 취향과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안 돼……! 여기서 얼굴 붉히면 나도 그쪽 취향이라고 오해받는단 말이야!’

7살 이후로 줄곧 남장을 하고, 반평생 이상을 남자로 살아왔다.

그 사실을 남색을 즐기는 2황자에게 들켰다간 목이 분리된 채로 이곳을 나갈 것이다.

이에 아드넬은 이를 악물고 제 허벅지를 꽉 꼬집었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흡……!”

테시우스의 셔츠가 완전히 벌어진 그때였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아래로 내려간 눈동자가 소설에서 으레 나오는 ‘빨래판’이란 표현이 정확하게 들어맞는 복근과 골반 위로 무심하게 걸쳐놓은 듯한 선명한 치골근을 발견하고 그녀의 심장을 강하게 후려쳤다.

아드넬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켜며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때 테시우스가 자조 섞인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자신의 오른쪽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그래, 놀랄 만하지. 네가 보기에도 중증인가 보군.”

기다란 손가락이 닿은 곳엔 옷에 감춰져 보이지 않았던 흉터가 있었다.

“보다시피 나는 라크란 병을 앓고 있다. 아주 오래전에 걸렸지만 지금껏 어느 의사도 치료하지 못했지.”

“아…….”

다행이다, 내가 놀란 걸 흉터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봐.

아드넬은 슬그머니 입을 틀어막은 손을 내렸다.

그제야 그녀의 눈에도 몸 곳곳에 번지듯 생긴 흉터가 들어왔다.

턱 바로 아래서부터 쇄골까지 번진 선홍빛 피부는 꼭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보였다.

당장 보이지는 않지만 등은 물론이고 무릎 뒤쪽같이 살이 접히는 부위에도 저런 흉터들이 있을 터였다.

“이제 내가 왜 널 불렀는지 알겠나.”

테시우스는 아드넬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2황자가 라크란 병을 앓는지는 꿈에도 몰랐지만, 아드넬은 충분히 그의 저의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예, 제게 치료를 부탁하시려고…….”

“부탁이라니?”

그러나 그 순간.

테시우스가 그녀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

아드넬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거만한 투로 말했다.

“세상 어느 황족이 한낱 평민에게 부탁이라는 걸 하지?”

“그게…… 무슨…….”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다.”

테시우스가 내려놓았던 잔을 다시금 들어 올리며 덧붙였다.

“날 완전히 치료하기 전까진 이 별궁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는 소리다.”

아드넬의 정수리가 차갑게 식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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