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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13)화 (13/141)

13화

“후우…….”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드디어, 모든 것이 끝났구나.

기나긴 여정의 마침표는 진작 찍었는데도 막상 집에 돌아오고 나니 그 사실이 새삼스레 자각되었다.

다시금 클리프의 아쉬움 어린 얼굴이 떠올랐지만, 아드넬은 금세 고개를 저으며 머릿속에서 지웠다.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본들 그때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오늘은 축배를 들어도 모자란 날이었다.

새하얀 얼굴 위로 가느다란 미소가 떠올랐다.

아드넬은 눈을 가린 앞머리를 가볍게 쓸어올리며 책상 뒤 진열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열장엔 온갖 종류의 술이 보기 좋게 나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문을 연 순간 손은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구석진 곳에 자리한 두툼한 병을 집어 들었다.

오늘이 오길 손꼽아 기다린 저만큼이나 얌전히 때를 기다리던 독주였다.

아드넬은 털썩 의자에 앉아 책상 오른쪽에 놓인, 엎어진 채로 있던 유리잔을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이내 두근대는 마음으로 봉인된 병의 뚜껑을 열자 알싸하면서도 은은한 향이 코끝에 어른거리며 제 존재감을 부각했다.

아드넬은 얼음도 넣지 않은 유리잔에 술을 쪼르륵 따라 일단 들이켜고 보았다.

“……크으!”

아직 앳된 티가 남은 얼굴과 상반되는 목소리가 대번에 튀어나왔다.

혀가 저릿할 정도로 독하지만 그 맛은 일품인 독주가 목구멍을 화끈하게 달구었다.

하지만 이 술을 맛보고서야 비로소, 아까의 그 기분이 재차 상기되며 새삼 감상에 젖게 만들었다.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바닷빛 눈동자가 찰랑거리는 유리잔을 응시했다.

‘벌써 8년인가.’

세월은 유수와 같다더니.

쉴 새 없이 달려온 지난 8년이 딱 그랬다.

찬찬히 돌이켜보면 참 길었던 것 같은데도 동시에 짧게 느껴졌다.

그 복잡미묘한 기분에 아드넬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얼굴을 살짝 일그러트렸다.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듯 지난 과거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러니까, 언제부터였더라.

‘되도 않는 귀족 행세를 하고 다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귀엽지만, 그래도 나름 먹혔어.’

피식.

작은 실소가 잇새로 새어 나왔다.

그땐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12살의 아렌은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돌이켜보면 그전에도 여러 가지 사건 사고는 많았다.

7살, 유일한 제 편이자 가족이었던 엄마가 더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을 때.

아렌은 엄마와의 기억이 가득한 시르노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와 수중에 가진 돈을 모두 투자해 별다른 도구나 첨가물 없이도 만들 수 있는 화장품을 만들었고, 잠잘 곳이 없어 위험한 산속을 돌아다니며 버려진 사냥꾼의 오두막을 찾아 잠을 청했다.

당시 신생 상회였던 카리아 상회를 찾아가 화장품을 들이민 것도 그때였고, 우연히 들은 ‘델리움의 산은 짐승의 씨가 말랐다.’는 이야기에 작정하고 올라가서 적당한 거처를 찾다가 발견한 천연 요새 같은 동굴을 제집으로 삼은 것도 그때였다.

하지만 진짜 사건 사고는 그 이후에 시작되었다.

이젠 많이 흐려진 기억 속 남자애 덕분에 하루아침에 아늑한 은신처를 잃어버린 날로부터였다.

‘귀족 행세에, 용병 고용에, 떠돌이 생활에, 지금의 정착까지…….’

일이 많아도 너무 많아서 이걸 다 풀려면 장장 책 한 권은 나오겠다 싶었다.

그래도 지금 생각해 보면 꽤 재밌었다.

당시 아렌은 용병 길드에 들러 ‘호위 기사가 올 때까지 호위를 맡아 달라. 단 용병이라는 것을 밝히면 그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을 테니 자유 기사인 척 거짓말을 해 달라.’는 조건으로 두 명을 고용했다.

각각 두 사람에게 똑같은 거짓말을 함으로써 그들이 뒤통수를 칠 일을 사전에 방지한 것인데, 아버지와 대판 싸운 뒤 집을 뛰쳐나와 귀족 신분을 감춘 채 자유로이 여행하는 방랑자로 둔갑하면서 기사인 척하는 두 명의 용병을 데리고 제국 곳곳을 여행했다.

그러다 점차 정이 들고 신뢰가 쌓여 진짜 속사정을 털어놓고 지금까지 함께 지내기에 이르렀다.

제이든과 필립.

이젠 아드넬에게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었다.

‘많이 아쉬워했지만.’

방에 들어오기 전 필립이 “오늘 같은 날엔 다 같이 축배를 들어야지!” 하며 제안했지만 아드넬은 주저 없이 거절했다.

오늘만큼은 편히 상념에 잠기고 싶어서였다.

무척이나 아쉬워하기에 축배는 내일로 미루자고 타협을 보긴 했는데, 덩치는 산만 한 사람이 비 맞은 강아지처럼 축 늘어지던 모습을 떠올리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일은 맛있는 걸 해 줘야지. 제육볶음을 제일 좋아하니까, 여기에 막걸리도 곁들이고. 안 그래도 호시탐탐 노리는 눈치던데 개봉하면 아주 좋아하겠어.’

몇 년간 여행을 하고 돌아온 아드넬은 델리움이 아닌 카르카스를 새로운 거처로 정했다.

저를 지켜 줄 두 남자가 있는 만큼 더는 산속에서 지낼 이유가 없어 번듯한 주택도 구했다.

귀족의 저택만큼 으리으리하진 않지만 그래도 있을 건 다 있는 데다, 무엇보다도 마당을 텃밭으로 사용해도 될 만큼 넓어서 고른 곳이었다.

당연하지만 당시 미성년이었던 아드넬은 임대를 할 수 없어 이때도 클리프의 도움을 받았다.

‘……많이 붙잡았지만. 나도 해 줄 만큼은 해 줬어.’

다시금 그가 떠오르며 조금 미안해졌으나 자고로 공과 사는 명확히 구분해야 하는 법이다.

몇 년 만에 ‘아드넬’이라는 사람으로 나타나 다시 거래를 트긴 했어도 원래라면 2년 전에 끝났어야 할 계약이었다.

그저 ‘아렌’이 사라진 몇 년의 공백기 동안 황후에게 불려가 시달린 것은 물론이고 매출에도 큰 손해를 입었기 때문에, 일 년만 더, 반년만 더 하고 붙잡는 클리프에게 순순히 붙잡혀 준 것뿐이다.

그에게 정체를 감춘 게 미안한 것도 있었고.

아드넬은 아렌이 몇 년 전 죽었으며 자신은 아실라의 새로운 대리인이라 소개했는데, 머리도 검은색으로 물들인 데다 시간이 지나면서 외모도 목소리도 조금씩 변했기 때문에 클리프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델리움 산에 큰불이 난 적이 있거니와 그녀의 바닷빛 눈동자는 보기 드물 뿐이지,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테오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문득 델리움을 떠올리니 자연스레 테오 또한 생각났다.

사실 그에 대해선 딱히 아는 바가 없었다.

순간이동 마도구를 쓰며 도망친 날 이후로 당장 제 살길 찾기에도 급급했다.

물론 이따금 그가 생각나기는 했다.

계곡 옆 자갈밭에서 처음 만난 테오.

육식을 즐기는 맹수라 생각하기엔 그저 커다란 고양이 같던 그.

삼겹살과 곁들인 쌈장은 좋아하면서 된장 냄새는 지독하게 싫어하던 새까만 고양이를.

‘그래서 머리를 검은색으로 물들였지.’

그와의 추억은 아렌과 함께 기억 저편으로 묻어 두기로 했지만, 완전히 잊고 싶지는 않아서 내린 결정이었다.

사실 염색 공방에 들어가자마자 생각난 색도 테오의 까만색이었다.

그러니까 부디, 잘 지냈으면.

아드넬이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테오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거짓말을 늘어놓은 것처럼 테오 또한 진짜 이름을 숨겼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든…… 됐어. 다 지난 일이고. 이젠 모두 끝났는걸.’

아드넬은 미간 사이를 가린 앞머리를 재차 쓸어올리며 홀가분하다는 듯 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비로소 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참이었다.

8년을 돌고 돌아 마침내, 누군가의 뒤에 숨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날에 우울한 감성은 어울리지 않았다.

아드넬은 살짝 웃으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고생했어, 나 자신.’

그래.

정말 많이 고생했어.

아드넬은 과거의 자신에게 위로를 건네듯 생각하며, 알싸한 위스키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지난한 고생이 끝난 날을 축하하기에 더없이 완벽한 순간이었다.

적어도, 방금 전까지는.

“……안 돼, 여기는……!”

“크악!”

쿠당탕.

닫혀 있던 문 너머로 요란한 소리와 함께 고함이 들려왔다.

무언가 넘어진 듯한데, 목소리는 제이든과 필립의 것이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아드넬은 깜짝 놀라 잔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직접 문을 열려고 다가간 그때, 굳이 네가 열 필요도 없다는 듯 벌컥 소리를 내며 닫혀 있던 방문이 활짝 열렸다.

“……네가 아드넬인가?”

얼굴을 감싼 투구 사이로 푸른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사내의 전신을 두른 쇠갑옷의 서늘한 감촉이 손끝으로 전해지는 것도 아니건만, 그를 마주한 잠깐 사이에 등줄기를 타고 싸한 기운이 흐르며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다짜고짜 아드넬의 방문을 열고 들어온 불청객은 다름 아닌 기사였다.

그녀가 한때 기사로 둔갑시킨 두 용병이 아닌, 정식 서임을 받은 진짜 기사.

그리고 그가 입은 갑옷 정중앙엔 보란 듯이 큰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저건 분명…….’

태양과 달을 가리키는 교차된 두 자루의 검과 그 사이에 자리한 방패 문양.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레 알게 된 저 문양은 다름 아닌 황실의 것이었다.

‘황실 기사가 왜 여길?’

아드넬은 당황했다.

갑자기 누가 방문을 열어젖힌 건 그렇다 쳐도, 황실 소속 기사가 자신을 왜 찾아왔는지는 전혀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오히려 클리프의 상회를 통해 황후에게 점수를 땄으면 땄지, 딱히 밉보일 짓을 한 적도 없어서 더욱 그러했다.

“네가 아드넬이냐고 물었다.”

그때 사내가 재차 물으며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비록 투구에 가려져 표정이 온전하게 보이진 않았으나 잔뜩 찌푸려진 눈살은 정확하게 보였다.

당황스러움에 잠시 말문을 잃었던 아드넬은 위협하는 기색이 다분한 목소리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미약하게 주억거리는 얼굴 위로 불안한 낯이 어렸다.

“마, 맞습니다만 무슨 일로 절 찾으시는지…….”

“2황자 전하의 명이시다, 체포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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