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12)화 (12/141)

12화

“하아, 하…….”

아직도 진정이 되지 않아 아렌이 이마를 한 번 훔쳤다.

가슴이 요란하게 쿵쾅거렸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머리가 어지러워 쉬이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아렌이 이동한 곳은 다 허물어져 가는 낡은 오두막이었다.

동굴에서 살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대비를 해 두긴 했지만 7살의 ‘아렌’이 시작된 이곳에설마하니 다시 돌아오게 될 줄이야.

“후우…….”

아렌은 진정하려 애쓰며 가방끈을 움켜쥔 손에 힘을 풀었다.

그 사람들은 대체 누굴까.

‘설마 테오의 적?’

하지만 믿을 만하니까 오웬 백작가를 말했을 텐데.

어쩌다 오웬 백작가로 보낸 편지가 엉뚱한 곳으로 흘러간 거지?

정말로 적이라면, 테오는 무사할까?

‘……지금은 내 코가 석 자지. 당장 지낼 곳부터 찾아야 해.’

아렌은 먼지가 수북이 쌓인 내부를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동굴을 찾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도망치긴 했지만 돌이켜 생각할수록 아까워 죽을 것 같았다.

보호자가 없는 아이는 보육원이 아니면 갈 곳이 없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제 명의로 된 집 한 채 살 수 없고, 거의 모든 일에 보호자의 공증이 필요했다.

아렌이 ‘아실라’라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상회와 계약을 할 수 있었던 건 정체를 드러내길 꺼린다는 말에 클리프가 대부분 문제를 해결해 줬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이름 석 자만으로도 계약을 하고 다소 평화로운 나날을 보낼 수 있었던 건데.

‘이젠 안 돼. 그를 찾아갈 수도 없어.’

클리프는 상인이다.

이윤을 챙기고, 실속을 챙기는.

어찌 보면 귀족과 비슷하지만 그들보다 훨씬 더 계산적이다.

허영심보단 자기가 취할 이득에 더 관심이 많다.

물론 아렌은 전생의 기억까지 합하면 클리프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지만, 지금은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클리프가 작정하고 법적 공방을 벌이면 지금의 아렌은 결코 이길 수 없었다.

단순히 그것 하나만 봐도 문제인데 ‘사실 내가 아실라다.’는 최대의 비밀을 밝혔을 때 그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는 일이다.

‘세상엔 나 혼자야. 믿을 사람도, 나뿐이고.’

예전에야 엄마가 있었다지만 지금은 아니니까.

그렇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까.

‘……일단 숨자.’

아까 그 잘생긴 남자애가 왜 저를 포박하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사를 부리는 것만 봐도 꽤 대단한 집안 자제일 테니 정체를 숨기는 게 좋을 듯싶었다.

어차피 원래 집엔 돌아갈 생각도 없거니와 동굴 안을 조금만 살펴보면 화장품을 만드는 재료며 도구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될 테니 화장품 만드는 것도 당분간 보류할 생각이었다.

가능하면 다 불태워서라도 흔적을 없애고 싶은데 그게 아쉬울 뿐이었다.

‘그리고 새 거처도 찾아야 해.’

산속이 제일 안전하지만 정보 길드에 의뢰했다간 또 어떤 식으로 정보가 퍼질지 몰랐다.

애당초 저만한 꼬맹이가 사람도 없고 들짐승도 없는 은신처 같은 곳을 찾아 달라는 것 자체가 의심 살 일이었다.

‘예전엔 돈이 없어서 못 했지만…….’

지출은 언제나 가슴이 아프지만 이젠 물러설 곳이 없었다.

당분간 귀족 행세를 하는 수밖에.

누가 봐도 평민으로 보이는 어린애가 여관에서 머무르면 뭇 어른들의 표적이 되기 마련이다.

어쩌다 큰돈을 얻진 않았을까 하며 의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귀족처럼 입고, 말하고, 여기에 호위 기사로 둔갑시킬 용병까지 구한다면 여관 주인도 별 의심 없이 넘어가겠지.

문제는 그 용병이 제 뒤통수를 칠 수도 있다는 것이지만, 완벽한 귀족 모습으로 탈바꿈한 뒤에 구하면 뒤탈이 무서워서라도 쉽게 손대지는 못할 것이다.

아렌은 대충 각자에게 거짓말을 하는 식으로 두 명을 고용할 계획을 세우며 가방을 뒤적거렸다.

이내 낡은 천 가방에서 묵직한 자루가 끝없이 나오기 시작했다.

‘역시 내 선택이 맞았어.’

집에 불이 나면 반드시 챙겨야 하는 것 하나.

다름 아닌 돈이다.

그래서 아렌은 그동안 대금을 받으면 꼬박꼬박 이 가방에 넣어 놓고 일절 꺼내질 않았다.

물을 담을 때 쓰던 병이 서너 개밖에 안 들어가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럼 지출은 대충, 새 옷에 용병 고용, 여관비, 그 외에 잡다한 거랑……. 순간이동 마도구까지. 후, 미쳤어. 그건 절대 쓸 일이 없길 바랐는데…….’

머릿속에 떠오르는 숫자가 커질수록 가슴이 욱신거렸지만 별수 없었다.

아렌은 입술을 꾹 깨물며 당장 쓸 돈은 바지 주머니에 넣고 자루는 도로 가방에 넣었다.

‘……이제 델리움은 잊자. 클리프는……. 나중에 거처를 찾게 되면, 그때 연락하고.’

아렌은 사선으로 가방을 멘 뒤,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젠 또 다른 사람으로 살아갈 때였다.

탁.

낡은 오두막 문이 닫혔다.

* * *

“어떻게 그런 일이…….”

바스토르는 테시우스의 무례를 탓하는 대신, 그동안 있었던 일을 고스란히 전해 들었다.

일이 이렇게 틀어진 이상 거짓말을 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리고 들은 내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이제 고작 열 살 정도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테시우스에게 듣고서야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남루한 행색을 하고도 비싼 마도구를 가지고 있던 건 정체를 밝히길 꺼리는 주인이 준 게 분명했다.

그리고 테시우스에겐 정말 순수한 호의만을 가지고 도와준 것이었다.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선 안 됐는데.’

이젠 인정할 수 있었다.

그 아이를 포박하라고 명한 것 자체가 실수였다.

“……미안하다, 테시우스…….”

“…….”

그러나 바스토르의 진심 어린 사과에도 테시우스는 대답 대신 비탄에 빠져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아직도 아렌의 모습이 선명했다.

그 애는 말갛고 순수한 미소 뒤에 진짜 속사정은 모두 감추어 두었다.

언제든 거처를 옮길 수 있다는 건, 그리고 그만한 대비를 해 놓았다는 건,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못한다는 불안감의 방증일 터인데.

그런 건 하나도 알아주지 못하고 힘들게 만든 음식이나 넙죽넙죽 받아먹던 제 모습이 부끄러워 미칠 것만 같았다.

‘은혜를 갚으려 했는데.’

아렌의 정체를 감춰 준 뒤에 따로 편지를 보내서, 제 정체를 밝히고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 약조해야지 그리 마음먹었는데.

주인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면 자유를, 산에서 사는 게 힘들다면 번듯한 집을, 그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주려고 했는데.

이젠 은혜를 갚긴커녕 그의 얼굴 한번 볼 수 없게 되었다.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거야.’

테시우스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바스토르가 포박하라는 명을 내린 이상, 아렌은 다시금 자신을 이 세상에서 꼭꼭 감춰 숨겨 버릴 것이다.

공고를 내어 ‘아렌’이라는 소년을 찾는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누군들 그러지 않겠냐마는, 그 공고에 지레 겁먹을 게 뻔했다.

이제 와 제 정체를 밝히는 것도 불가능했다.

2황자가 흑표범이었다는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소문낼 수도 없거니와 그런다고 아렌이 나타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럼 난 널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일주일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그 시간 동안 아렌은 그에게 너무 많은 추억과 기억을 남겨 두고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아지랑이도 이보단 오래 머무를 텐데.

아직도 네가 내 몸에 덮어 준 담요의 온기가 선명한데.

저만 두고, 오직 아렌만 사라졌다.

‘아렌…….’

얼굴을 감싼 손등 위로 핏줄이 돋자 바스토르 또한 덩달아 심란해졌다.

저가 생각하기에도 그 아렌이라는 아이가 나타날 것 같진 않았다.

‘다짜고짜 나타나 위협한 무뢰한이 되었으니.’

이 미안함을 어찌 보상해야 할까.

테시우스에게도, 아렌에게도 미안해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제아무리 동생이 걸린 문제라지만, 그 아이 또한 제 나라의 국민이거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한 것이 못내 부끄러웠다.

아직도 지도자로서의 덕목을 모두 갖추지 못했음을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테시우스, 그 아이는 내가 어떻게든 찾아보마. 파비오 후작에게 따로 말을 해서라도…….”

“그럴 필요 없어.”

내뱉는 목소리는 어딘가 서늘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바스토르는 알 수 있었다.

화난 건 맞지만, 그 목소리엔 저를 향한 분노보다는 슬픔이 더 깊게 스며들어 있었다.

테시우스는 얼굴을 감쌌던 손을 내리며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너라면 이걸 바랐겠지.

어쩌면, 그리될 거라 예상했을지도 모르고.

그가 말했다.

“……찾는 건 됐으니 모두, 불태워 줘.”

“뭐……?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산을 통째로 불태우는 건 불가능하더라도 그 아이가 지내던 곳만큼은 모두 불태워 흔적을 없애 줘.”

주인이 정체를 드러내길 꺼린다 했으니까, 분명 그걸 바랄 거야.

그리고 테시우스의 예상은 정확했다.

아렌이 바라는 건 제 흔적을 모두 지우는 일이었다.

어차피 순간이동 마도구도 주인이 줬을 게 분명하니 어쩌면 그 주인에게로 이동했을 수도 있고.

“안에 뭐가 있는지 알아볼 것도 없어. 그냥 원래 없던 것처럼, 모두 불태우는 거로 충분해.”

“그래도…….”

“그 애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나는 알아.”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너머로 제 감정이 온전히 숨겨지길 바라며, 고개를 숙였다.

실망감도, 그리움도, 아쉬움도, 서글픔도…….

‘모두 사라지는 거야. 모두 묻어 두는 거야.’

그래, 전에 생각했잖아.

최대한 빨리 떠나야겠다고.

그 꿈만 같던 기억들을 추억으로 묻어 두면, 아렌을 두고 한 말도 안 되는 생각도 더는 들지 않을 거라고.

원래 바라던 것이고 원래 생각하던 것이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정말로 어쩌면, 시간이 흘러서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부탁할게, 형.”

언뜻 단호하기까지 한 눈빛에 바스토르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일을 이렇게까지 어렵게 비틀어 놓은 장본인인 이상, 테시우스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었다.

바스토르는 그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려 몇 번 토닥이더니 이내 방을 나섰다.

탁하고 문이 닫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잠시간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그리고 이날 새벽.

테시우스는 자기가 부탁했던 대로, 그리고 아렌이 바랐던 대로.

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진 산에 시뻘건 화염이 일렁이는 모습을 마침내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정확히 8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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