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11)화 (11/141)

11화

글을 쓸 줄 안다.

당연히, 귀족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눈앞의 아이는 귀족은커녕 제대로 먹고살긴 하나 싶을 만큼 꼬질꼬질한 행색이었다.

얼굴은 퍽 반반했으나 몸은 비쩍 말랐고 지저분하기 그지없는 가방을 메고 있었다.

옷도 마찬가지였다.

원래는 하얀색으로 추정되는 상의는 누렇고, 갈색 면바지는 진작 색이 바래 군데군데 연한 갈색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신발 밑창은 닳았고 머리는 온통 삐뚤빼뚤하다.

길거리에 떠도는 거지라고 봐도 무방할 행색에, 바스토르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네가 테오의 편지를 가지고 온 아이냐 물었다.”

이미 그의 머릿속엔 다른 이미지가 떠올라 있었다.

테시우스를 발견하고, 그가 인간이라는 것을 알자 협박을 해서 가둬 놓고 편지를 보낸 걸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한 한 편의 이미지였다.

이 어린아이는 눈속임에 불과할 뿐, 조종하는 사람은 따로 있을 것이라 그리 생각하는 참이었다.

그러나 잔뜩 겁먹은 아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오들오들 몸을 떨 뿐이었다.

“……모하임 경. 당장 이 아이를 포박하도록.”

“존명!”

입을 열지 않는다면 입을 열게 만드는 수밖에.

아렌에 비하면 크다 못해 거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척척 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섰다.

에메랄드빛 눈동자 위로 공포가 떠올랐다.

“얌전히 따라오는 게 좋을 거다.”

“……시, 싫어……!”

아렌의 손이 바지춤으로 쑥 들어갔다.

뒷걸음질 치며 물러서던 아이가 주머니에 손을 넣을 일이 뭐가 있다고?

그러나 생각은 짧았다.

찰나라고도 할 수 있는 짧은 시간, 공포에 질린 아이가 무언가를 콰득 손에서 부쉈다.

그리고 그 순간.

펑!

“이 무슨……!”

미약한 폭파음과 함께 희뿌연 연기가 피어오르자마자 모하임이 아이에게로 달려들었으나, 그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손으로 가르고 말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정확히는, 아이가 없었다.

“……순간이동이라, 이제야 모든 게 확실해졌군.”

바스토르가 비릿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아이가 쓴 건 마도구였다.

본인이 설정한 위치로 순간이동 할 수 있는, 어지간한 귀족도 사기 어려운 금액의 마도구.

그런데 저리 비쩍 마른 아이가 그 비싼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어쩌면 테시우스를 변하게 한 놈들과 한패일지도 몰라.’

그가 안쪽 입술을 짓이겼다.

설마하니 마도구를 가지고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놓쳐 버리다니.

이건 제 실수라고도 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중요한 건 테시우스였다.

바스토르가 외쳤다.

“분명 배후가 있을 터, 델리움을 샅샅이 수색해라! 우거진 산속이든 버려진 헛간이든 델리움에 속한 곳이라면 모두 샅샅이 뒤져!”

“존명!”

바스토르의 한마디에 기사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마을 곳곳에서 놀란 비명 소리가 들리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 * *

왜 안 오지?

테시우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막혀 있는 개구멍을 쳐다보았다.

오늘은 아렌이 시간을 말해 놓고 갔다.

점심이 다 지날 즈음엔 돌아올 거라고.

편지가 왔는지만 확인하고 곧장 돌아온다고.

그 말을 믿었는데, 하늘이 주홍빛으로 물들어갈 기미가 보이는데도 어째서인지 아렌은 오지 않았다.

‘……또 찾으러 가야 하나?’

하지만 그때는 운이 좋았다.

길도 모르면서 무작정 돌아다니다 찾았을 뿐이다.

오늘도 그런 우연이 겹치리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도 걱정되는데.’

아무리 산에 익숙하다 한들 절대 넘어지지 않을 거라 어떻게 확신한단 말인가.

가뜩이나 그렇게 마르고 작은데.

마법이 걸린 가방이라니 짐이 무거워서 휘청거릴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였다.

테시우스는 초조한 듯 바닥을 발톱으로 닥닥 긁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

내가 아니면 누가 그 앨 찾겠어.

‘이래서는 내려갈 때마다 같이 가서 기다릴까 봐.’

마을까진 함께 못 가겠지만 적어도 그게 마음이 편할 듯했다.

테시우스는 “푸릉…….” 하는 한숨 아닌 한숨을 쉬곤 뭉툭한 앞발로 돌덩이를 치웠다.

그리곤 익숙하게 개구멍을 빠져나와 코를 킁킁거렸다.

일단 저번에 아렌을 마주친 곳부터 가 볼 참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느낌이 안 좋지?’

산 자체가 동요하는 기분이었다.

싸한 감각에 그가 잠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왜 긴장하게 되는 건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머지않아 알게 되었다.

“……없어!”

“이쪽에도 없다!”

“위로 더 올라가야겠군.”

늘 고요하기만 하던 산에 난데없는 불청객이 침입했다.

귀로 들리는 목소리와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진동이 한둘이 아니라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누구지?’

테시우스는 일단 수풀 뒤에 숨어 동태를 지켜보았다.

철컥거리는 쇠 마찰음이 가까워질수록 황금빛 눈동자 속 동공이 가늘게 좁아졌다.

그리고 그 순간.

‘저건……!’

태양과 달을 가리키는 교차된 두 자루의 검과 그 사이에 자리한 방패 문양.

테시우스의 눈에 가장 익숙한 문양이자 황실을 상징하는 문양이 정중앙에 그려진 갑옷을 입은 이들은 다름 아닌 황실 소속 기사였다.

‘기사들이 왜 여기에?’

설마 바스토르가 그 편지를 벌써 받은 건가?

그게 아니라면 이 산에 들어올 일이 뭐가 있지?

와중에 아렌은 어디 있고?

혼란스러운 중에도 머리는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 또한 오래가지 않았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명백한 인기척에 테시우스가 본능적으로 몸을 확 돌리며 이를 드러내자 이전과 달리 창날을 들이밀지 않는 기사가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2황자 전하!”

테시우스가 잠깐 벙찐 사이 그가 다시금 목소리를 높였다.

“2황자 전하를 찾았다! 지금 여기 계셔!”

“전하- !”

“계속 찾고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우르르하며 기사들이 모여들었다.

테시우스는 당황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일단 제 정체를 알아본 건 반가운 일인데,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1황자 전하께서 편지를 받으시자마자 델리움으로 오셨습니다. 지금 산 아래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가시지요.”

“……크르릉.”

바스토르가 왔다면 그래, 그건 일단 다행이다.

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렌은?

아렌은 어디 있는 거야?

‘혹시 기사들을 보고 도망친 걸까?’

제아무리 성숙하다 한들 아렌은 아직 어린아이였다.

늘 조용하기만 하던 산에 시커먼 사내들이 들이닥쳤으니 지레 겁먹고 숨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래서인지 더 걱정되었다.

혼자 얼마나 벌벌 떨고 있을지 상상이 되어서.

테시우스는 잠시 고민했으나, 곧 순순히 기사의 뒤를 따랐다.

일단 바스토르와 얘기를 나눠 봐야 모든 게 확실해질 것 같았다.

더구나 기사를 보고 도망간 거라면 그들이 모두 산에서 내려가야 아렌이 안심하고 집에 돌아갈 수 있을 터였다.

테시우스는 그 생각만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사들이 연신 신기하다는 눈으로 흘긋대는 게 못내 불편하긴 했지만.

머지않아 테시우스는 산 입구 근처에서 초조한 기색으로 손톱을 물어뜯는 바스토르를 발견할 수 있었다.

“……1황자 전하!”

테시우스의 옆에 있던 기사가 외치자 바스토르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처음 흑표범으로 변했을 때처럼, 반짝이는 금안과 보랏빛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쳤다.

“테시우스……!”

바스토르는 체통도 잊고 다짜고짜 산을 뛰어올랐다.

테시우스도 무척이나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내려왔다.

저를 향해 뻗어진 팔이 목을 감싸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정말, 요 며칠을 얼마나 피 말리는 심정으로 보냈는지……!”

“크릉!”

걱정할 만했지만,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나는 아렌 덕분에 잘 지냈는데.

테시우스는 제 목을 감싸 안은 바스토르에게 이마를 살짝 비비며 반가움을 표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일단 마차에 타자. 너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

그건 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굳이 조급해할 것도 없었다.

아렌을 통해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찾았으니까.

테시우스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바스토르와 함께 보란 듯이 황실 문양이 그려진 마차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저가 아렌을 기다리는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 * *

점점 가늘어지는 달이 떠오른 늦은 밤.

놀랍게도, 테시우스는 다시 사람으로 돌아왔다.

자초지종을 설명할 생각으로 그와 바스토르가 여관 뒷마당에 나갔을 때였다.

“……거기 누구냐!”

일부러 기사들도 다 물렸는데 어디선가 바스락하며 이파리가 짓밟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이 시간에 이 뒷마당까지 나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즉 누군가 저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소리였다.

바스토르가 크게 외치며 사방을 둘러보던 그때, 테시우스는 무성한 수풀 사이에 숨어 있는 인기척을 눈치챘다.

원치 않게 갖게 된 짐승의 예민한 감각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가 막 뛰어들려던 찰나, 갑자기 전신에 기묘한 기운이 감돌았다.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듯한 이상한 기분에 테시우스는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고, 실제로도 잠깐 정신이 아득해졌다.

어쩌면 이대로 기절할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어?”

“맙소사……! 테시우스!”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거짓말처럼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채였다.

“정말 다행이다, 다시 사람으로 돌아와서……!”

“…….”

바스토르는 근 일주일 만에 조우한 동생을 냅다 끌어안았지만, 테시우스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분명, 누군가 있었어.’

실제로도 소리가 났고, 인기척을 느꼈다.

하지만 막 달려들려던 찰나 거짓말처럼 몸이 다시 돌아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꼭 일부러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다분히 작위적인 느낌이랄까.

“……일단 주변을 수색해야겠어. 도망가기 전에 빨리.”

“내 생각도 그래. 하지만 아직 떠나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 우선 안으로 들어가자.”

바스토르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면서도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테시우스를 부축했다.

그리곤 곧장 기사들에게 여관 주변을 샅샅이 수색하라 명했다.

그제야 테시우스도 비로소 조금 편해진 마음으로 방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때 마찬가지로 따라 들어온 바스토르가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물어왔다.

“아까 못한 얘기부터 하자. 그동안 어떻게 지낸 거야?”

“아, 그게……. 산속을 헤매다가 사냥꾼의 아이를 만났어.”

그의 질문에 테시우스는 일전에 생각해둔 거짓말을 유려하게 늘어놓았다.

그러나 잠자코 듣던 바스토르는 어디가 마음에 안 드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로 대필한 게 맞아? 필체가 어린아이의 것이던데.”

테시우스가 미처 생각지 못한 허점은 다름 아닌 아렌의 필체였다.

이윽고 바스토르가 건넨 편지를 보는 순간, 그는 허탈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정말로, 딱 어린아이나 쓸 법한 글씨체였다.

“처음엔 귀족가 자제인 줄 알았어. 이 델리움에 그만한 귀족이 있는지는 모르니 일단 우체국 직원에게 말을 해 두고 기다렸지. 그런데 찾아온 건…….”

아렌.

지저분한 옷차림에 얼굴만 좀 반반한 거지 아이.

그 모습에 바스토르는 배후가 있다고 생각하고 포박하려 했다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수포로 돌아갔어. 그 아이, 마도구를 가지고 있더군. 심지어 순간이동 마도구를.”

“……뭐?”

“모하임 경에게 명을 내린 순간 사용했어. 이후로 델리움을 샅샅이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다. 분명 어딘가 먼 곳으로…….”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쾅!

하얗게 질린 주먹이 탁자를 매섭게 내리치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나무가 두 동강이 나며 폭삭 주저앉았다.

“그 애는……!”

보랏빛 눈동자가 잔뜩 흥분한 테시우스를 향했다.

마주한 그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그 애가 지금까지 날 도와준 아이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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