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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10)화 (10/141)

10화

오웬 백작가에 편지를 부칠 적만 하더라도 아렌은 몰랐다.

그 백작가가 델리움에 있다는 걸.

그도 그럴 것이 델리움엔 거의 다 부서져 가는 낡은 저택이 하나 있긴 했으나 철문에 잔뜩 녹이 슬어 가문의 문양을 알아볼 수도 없었다.

사람들도 오웬 백작가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안 한 게 아니라 몰라서 못 했다.

빈집이 된 지 아주 오래됐거니와 사람이 오가는 걸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몰랐기로는 테시우스도 마찬가지였다.

바스토르가 ‘오웬 백작가’를 사들인 이후로 이따금 귀족파의 동태를 지켜볼 일이 생길 때 가끔 쓴다는 것만 알고 있었지, 그게 델리움에 있는지는 몰랐다.

그러나 이날 이른 아침.

유일하게 먼지가 쌓이지 않은 우체통 손잡이가 철컥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그는 바스토르의 몇 안 되는 심복으로, 상시 델리움에 거주하며 오웬 백작가로 들어오는 편지를 받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남자는 조용히 편지를 챙겨 나무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이파리가 몇 개 떨어졌다.

‘……발신인은 따로 적혀 있지 않고……. 편지에 적어 놓은 건가?’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별생각이 없었다.

오웬 백작가에 도착하는 편지는 아직 어린 ‘오웬 백작’ 행세를 하고 있는 1황자가 이따금 모임에 참석할 때나 왔는데 최근엔 그런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봉인된 편지를 뜯고 머지않아, 사내의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다소 삐뚤빼뚤한 글씨체였으나 내용은 절대 간과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테오라는 이름은 분명……!’

절대 잊을 수도, 잊어서도 안 되는 이름.

2황자의 어릴 적 아명이었다.

‘전하께선 지금 산티노로 가는 길목에 계시니까. 금방 갈 수 있겠어.’

심지어 지금 바스토르가 있는 곳은 델리움에서 그리 멀지도 않았다.

말을 빠르게 달리면 한 시간 만에 도착하는 거리로, 테시우스가 반나절이 지나도록 달리다 도착한 건 그저 사람이 보일 때마다 피하고 빙빙 돌면서 길을 헤맸기 때문이었다.

사내는 편지를 읽자마자 곧장 품속에 챙겨 넣고 말 등에 올라탔다.

그리고 머지않아 1황자가 머무는 여관에 도착했다.

지나가던 시녀를 붙잡고 바스토르의 방을 찾은 그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1황자 전하, 2황자 전하께서 보내신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말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벌컥 하며 문이 활짝 열렸다.

저보단 작은, 하지만 차기 황태자로서의 위엄은 이미 갖추고도 남은 태양 같은 금발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존귀하신 분을 뵙습니다!”

“편지는?”

바스토르를 보자마자 한쪽 무릎을 굽히며 고개를 숙인 남자가 냉큼 품속에서 편지를 꺼내 들었다.

이에 바스토르는 거의 낚아채듯 가져가 일단 읽고 보았다.

[수신인 : 레이튼 오웬 백작님. 발신인 : 테오. 무슨 이유에선지 아침에 흑표범으로 변했습니다. 어떤 마법에 걸린 것 같으나 정확한 건 알 수 없습니다.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만나고 싶다면 일주일 안에 회신을 부탁합니다.]

짧고 간결한 편지였으나 담긴 내용은 가벼이 넘길 만한 것이 아니었다.

‘테시우스가 분명하다……!’

바스토르는 확신했다.

비록 필체는 그의 것이 아니었으나 그건 나중에 알아보면 될 문제였다.

애당초 흑표범으로 변했는데 글을 쓸 수 있을 리도 없고, 이 ‘오웬 백작가’에 편지를 테오라는 아명으로 보냈다는 것 자체가 테시우스라는 얘기였다.

그가 오웬 백작 행세를 하고 있다는 건 황실 일원과 몇 없는 심복을 제외하고선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당장 델리움으로 가야겠다!”

“지, 지금 바로 말씀이십니까?”

“일주일 안에 회신을 달라고 했으니 이건 바꿔 말하면 일주일 안에 최소 한 번은 우체국에 들른다는 소리나 마찬가지. 일주일이 다 지나고서 온다는 보장도 없으니 최대한 일찍 도착해야 그만큼 테시우스도 빨리 만날 수 있지 않겠나.”

현명한 대답이었다.

사내는 잠시 감탄한 눈으로 바스토르를 쳐다보다 이내 고개를 숙이며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존명!”

“일단 우리 먼저 출발하고, 테시우스를 찾는데 투입된 병력은 여관에 돌아오는 대로 델리움에 오게끔 여관 주인에게 말을 해놓도록.”

“예, 알겠습니다!”

남자가 자리를 뜨자 바스토르는 문을 닫고 편지를 잘 갈무리해 품속에 넣었다.

일단 테시우스의 생사를 확인한 것만으로도 그를 짓누르던 초조함이 한결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테시우스가 사라진 지 오늘로 사흘째이니 아주 먼 곳에 있는 건 아닐 터였다.

그리고 이렇게 편지까지 보낸 걸 보니 도와주는 사람이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용케 사람이라는 걸 알아봤군.’

필체로 봐선 어린아이 같은데,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 본론만 간결하게 말한 걸 보면 마냥 어린아이 같지도 않고.

어차피 글을 쓸 수 있다면 귀족가 자제일 테니 그렇다면 성숙한 모습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만나게 된다면 내가 직접 큰 상을 내려야겠어.’

테오라는 아명을 썼다는 건 테시우스가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정체를 모르고도, 더구나 짐승의 모습인데도 도와줬다면 상을 내려도 백번 내려 마땅하지 않겠는가.

바스토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미소 지었다.

‘지금 바로 달려가마, 테시우스. 조금만 더 기다리고 있어.’

* * *

그로부터 사흘 뒤.

아렌은 마을로 내려갈 채비를 했다.

사흘이란 시간 동안 그녀와 테오는 다소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

‘아니, 딱히 조용한 건 아닌가.’

굳이 하나를 꼽아보자면, 제발 된장국 한번 먹어 보라며 설득했다는 것 정도?

아렌은 양 앞발로 코를 틀어막은 채 꼬리를 팡팡 내리치던 그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바닥에 ‘진흙’이라고 써 놓은 것도 웃겼지만 그렇게 필사적으로 편식하던 모습도 귀여워서 생각하면 자꾸 웃음이 나왔다.

그날 테오는 기어코 된장국을 먹지 않았다.

아쉽긴 하지만 안 먹겠다는 걸 억지로 먹이는 것도 잘못된 것이라, 쌈장에 삼겹살 한번 먹어 보라 설득했던 수준에서 끝나고 말았다.

“그럼 나 다녀올게.”

“컹!”

“음식 다 해 놨으니까 배고프면 먹고, 알겠지?”

“크르릉.”

낮은 목 울림은 더 이상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아렌은 씨익 웃어 보이곤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편지가 왔는지 확인하고 안 왔다면 고기나 더 사서 올 참이었다.

테오는 흑표범으로 변하긴 했으나 식성이나 본성은 사람과 똑같았다.

하지만 원래 ‘밥’이라는 것 자체가 제국엔 드문 음식인 데다 귀족이라서 그런지 고기를 많이 찾았다.

거의 매 끼니 육류가 올라가는 식단에 익숙할 그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고기가 없으면 계란말이에 김치, 쌀밥에 국이 최선이었으니까.

테오에겐 하나 빼고 모두 낯선 음식이었다.

‘오늘은 수육을 만들어 볼까? 아니면 저번처럼 그냥 구워?’

델리움의 정육점엔 들어온 지 꽤 된, 신선도가 다소 떨어지는 것들 뿐인 데다 값비싼 소고기는 아예 없어서 닭고기 아니면 돼지고기가 최선이었다.

그렇다 보니 테오가 좋아한다는 소고기 스테이크는 불가능했다.

치킨은 기름이 워낙 많이 들어가니 패스하고, 그럼 닭볶음탕이나 삼계탕, 돼지고기면 제육볶음이나 갈비 정도인데…….

‘갈비는 재워야 하니 이것도 패스. 삼계탕 재료는……. 안 돼, 여름에 내가 먹을 거야. 너무 비싸다구, 주문하고 받는 데도 오래 걸리고……. 그럼 닭볶음탕을 만들어 볼까? 아니면 제육?’

어느새 메뉴는 두 가지로 좁혀져 있었다.

아렌은 손이 덜 가는 게 뭘까 고민하며 산에서 내려왔다.

시간이 좀 걸려 그렇지, 원체 발에 익어 산을 내려가는 것 정도는 별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또 얼마나 지났을까.

마을까지 내려온 아렌은 총총 우체국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일주일 안에 회신을 달라고 했지만 그래도 일찍 답장이 왔을 수도 있으니 한번 확인해 볼 참이었다.

딸랑-

아렌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종소리가 들리며 그녀의 방문을 반겼다.

이번엔 편지를 보낼 것이 아니라 받은 걸 확인할 생각이어서 아렌은 당연하다는 듯 창구로 걸어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델리움은 워낙 작은 영지라 우체국에서 일하는 사람도 한 명뿐이었는데, 우체국 직원 길테의 낯빛이 무척 어두워 보였다.

뭔가 굉장히 피로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아렌은 사람 없는 창구 앞에서 고개를 갸웃하며 일단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아, 안녕…….”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얼굴이 엄청 안 좋아 보여요.”

“아, 아무것도 아니다. 응, 아무것도 아니야.”

직원 길테는 말을 더듬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눈 밑에 다크서클 장난 아닌데.

아무것도 아닌 얼굴이 아닌데.

아렌은 미묘하게 눈살을 찌푸렸으나, 딱히 캐물을 것도 없었으므로 본론을 꺼냈다.

“저기, 혹시 ‘테오’라는 사람한테 온 편지 있나요?”

그러나 그 순간,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피로해 보이던 길테가 번쩍하고 고개를 치켜들며 아렌을 쳐다보았다.

당황한 기색이 다분한 얼굴이었다.

“지, 지금 뭐라고 했니?”

“네? 제가 뭘…….”

“누구, 누구라고? 테, 테오?”

“……그런데요?”

아렌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주춤 물러서자 길테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곧장 우체국 뒷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정말이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아렌은 어안이 벙벙해져 멀뚱히 서 있을 뿐이었다.

‘……뭐지?’

잠시간 침묵이 흐르고 난 뒤 불현듯, 전신에 불길한 기분이 감돌았다.

뭔가, 도망가야 할 것만 같은 그런 느낌.

길테가 보여 준 행동은 그만큼 불안하고 낯설었다.

아렌은 어깨에 멘 가방끈을 움켜쥐며 주변을 살폈다.

어째서인지 잠깐 사이에 지독하리만큼 고요해진 것 같았다.

주춤, 주춤, 절로 뒷걸음질이 쳐지며 마른침을 삼켰다.

뭔가 이상하다.

일단 도망가야 해.

그 생각에 아렌이 몸을 돌려 문을 향해 달려간 순간.

“……읏!”

딸랑 소리와 함께 활짝 열린 문에 부딪힌 그녀는 그대로 나동그라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렌은 꼬리뼈에서 느껴지는 진한 고통에 신음성을 흘렸다.

그러나 진짜 놀랄 일은 이후에 이어졌다.

“……네가 테오의 편지를 가지고 온 아이냐?”

아렌을 내려다보는 보랏빛 눈동자에 냉기가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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