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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9)화 (9/141)

9화

‘솔?’

솔치고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모양새는 딱 솔이었다.

이게 뭐? 하고 생각하던 찰나, 아렌이 덧붙였다.

“양치해야지.”

“컹?”

“아무리 동물로 바뀌었대도 양치는 필수야. 이빨이 썩으면 엄청 고생한다구.”

도대체가…….

테시우스는 콧등을 찌푸리며 아렌이 들고 있는 솔을 쳐다보았다.

짐승이 사람처럼 양치를 한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 보았다.

재봉할 때나 쓰는 가위로 고기까지 자르더니, 대체 이 작은 머리통 어디서 그런 발상이 나오는 걸까.

“얼른 와, 빨리 씻고 자자.”

아렌은 당연히 테오가 뒤따라올 거라 확신하는지 총총 동굴을 나서 빈 나무 대야에 물을 한가득 받았다.

다만 수도꼭지를 돌리며 보니 오크통이 살짝 흔들리는 게, 아무래도 불판을 닦는다고 물을 많이 써서 슬슬 바닥을 보이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내일 즈음엔 계곡을 여러 번 왔다 갔다 해야 할 것 같았다.

“아- 해 봐.”

잠시 후 아렌은 치약을 한가득 올린 솔을 그대로 입 안에 들이밀었다.

가장 안쪽 어금니는 물론이고 촘촘한 앞니와 길쭉한 송곳니까지 꼼꼼하게 문질렀다.

“어엉?”

“기다려 봐, 잘 안 보여서 그래.”

그때 아렌의 작은 손이 테시우스의 주둥이를 붙잡았다.

정확히는 입 안에 손을 넣고 턱까지 붙잡은 모양새였다.

날이 어둑하다 보니 잘 보이지가 않아, 아렌은 벌어진 입속에 머리를 거의 들이미는 수준으로 이빨을 닦아 주었다.

테시우스는 당황했으나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지 않도록 바짝 긴장해야만 했다.

“됐다! 이제 헹구기만 하면 돼. 삼키지 말고 뱉어야 해?”

글쎄, 그게 내 맘대로 되려나.

사람 모습이라면 모를까, 물을 한가득 머금고 헹구는 게 될는지는 해 봐야 알 것 같았다.

이내 아렌이 팔을 후들거리며 물을 부어 주자 테시우스는 최대한 목구멍에 힘을 주고 삼키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사람과 구강 구조가 달라서인지 입을 다물고 볼을 부풀리려 해 봐도 잘 되지 않아서, 고개를 좌우로 이리저리 흔드는 게 최선이었다.

“……하하, 귀여워!”

“…….”

이제 삼 년 뒤면 성인인데 귀엽다니…….

물론 아렌의 눈에야 커다란 고양이 정도로 보일 테니 이상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황자인데.

‘왜 싫지?’

나도 아까 전엔 아렌이 귀엽다고 생각해놓고.

막상 아렌이 저를 두고 귀엽다고 하니 뭔가 묘하게 심기에 거슬렸다.

귀엽기로는 칫솔을 입에 물고 제 입에 물을 부어 주는 아렌이 훨씬 귀여운데.

‘다른 사람 눈에 자기가 어떻게 보이는지는 알까?’

이채 어린 에메랄드 바닷빛 눈동자가 얼마나 찬란하게 반짝이는지.

새하얀 얼굴 위에 떠오르는 미소가 얼마나 순수한지.

네가 보여 주는 행동도, 네가 내뱉는 말들도, 하나같이 얼마나 신기하고 또 흥미로운지.

그래서일까, 흘러내린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는 아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테시우스는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만약 아렌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면…….

‘……응?’

* * *

그 순간, 테시우스는 자기도 모르게 떠올린 생각에 흠칫 몸을 떨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

홀린 듯이 떠오른 생각에 테시우스는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자기가 한 생각을 자각하자마자 얼음물이라도 들이부은 양 정수리가 차갑게 식었다.

반대로 얼굴은 화악 하며 달아올랐다.

사람이었으면 분명 시뻘겋게 변했을 만큼 화끈거렸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생각을……!’

지금 아렌을 이성, 아니, 연인 상대로라도 보는 거야?

남자가 아니라 여자면, 뭐?

어떻게 저 작은 아이를 두고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자기가 한 생각임에도 파렴치하기 그지없어 테시우스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잠깐, 착각한 거야. 워낙 예쁘게 생겼잖아. 그런데 하는 짓도 귀여우니까, 그래서 잠깐 그런 생각이 든 거야.’

그러나 아무리 합리화를 해 봐도 아까 했던 생각이 하지 않았던 게 되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낯이 뜨거웠다.

차마 아렌을 볼 수가 없어 테시우스는 황급히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응? 벌써 자려고?”

마침 양치를 마친 아렌이 속도 모른 채 뒤따라 들어와 물었다.

그 말간 얼굴을 마주하니 또다시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 저가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워졌다.

결국 테시우스는 벌떡 일어나 침대 위에서 내려왔다.

이대로는 도저히 함께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크앙!”

“어? 왜 그래?”

테시우스는 황급히 바닥에 글자를 썼다.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심장이 쿵쾅거려서 거의 휘갈기듯 쓴 글자였다.

“……밖에서……. 바람? 이게 무슨 말이야?”

바람 쐬고 오겠다고!

먼저 자라고!

테시우스는 아렌의 바짓자락을 물고 침대 가로 잡아당겼다.

어어 하며 속절없이 끌려간 아렌이 침대 위에 털썩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동굴을 뛰쳐나왔다.

그리곤 정확히 입구 앞에, 등을 보인 채로 앉았다.

몸이 뻣뻣하게 굳었으나 아렌은 눈치채지 못했다.

“뭐야……?”

“…….”

혼란스럽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으나 테시우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모습에 아렌은 고개만 몇 번 갸웃거리다가 슬금슬금 침대에 누워 담요를 끌어 올렸다.

보아하니 지금 잘 생각은 없어 보여 먼저 잘 참이었다.

“그럼 자기 전에 촛불 다 꺼 줘야 해?”

“……킁.”

테시우스는 간신히 한 번 대답하며 콧등을 씰룩였다.

그렇게 석상처럼 굳어 있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곧 색색대는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새벽같이 일어나 마을에 다녀와서인지 어제보다 빨리 잠든 듯했다.

그제야 테시우스는 “푸우…….” 하며 심란한 한숨을 내쉬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간혹 남색을 즐기는 귀족이 종종 있다는 얘기를 듣긴 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쪽엔 전혀 관심도 없었을뿐더러, 아렌이 ‘여자’이길 바라는 건 완전히 별개의 문제였다.

애당초, 이제 고작 열 살 남짓 된 아이를 두고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게 미치도록 부끄러웠다.

‘난 삼 년 뒤면 성인이지만 아렌은 아니잖아.’

아렌은 아직도 성인이 되기까지 8년은 족히 남았다.

저에 비하면 한없이 작고 작은…….

‘……이런 미친! 이젠 나이 차이까지 생각하는 거야?’

나이가 얼마나 차이 나던 아렌이 남자가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닌데!

정말이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라, 정신이 아찔해졌다.

만약 지금 사람의 모습이었다면 필시 “젠장!” 하며 욕지기를 내뱉었을 것이라고 테시우스는 생각했다.

‘염치도 없지, 어떻게 아렌을 보고……!’

그를 대상으로 한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곱씹을수록 창피하고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최대한 빨리 떠나야겠어.’

이런 생각을 하면서 계속 함께 지내다가는 정말 상상도 하기 싫은, 불순한 마음을 품을 것 같았다.

이미 아렌을 보고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테시우스는 그것이 못내 두려웠다.

‘그냥 생각하지 말자. 오히려 생각할수록 더 신경 쓰게 되니까.’

애초에 그런 생각을 안 했으면 새삼스럽게 아렌을 쳐다보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어차피 그는 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럼 그냥 아예 없던 일로 만드는 게 나았다.

테시우스는 생각을 떨쳐내려 애쓰며 어두컴컴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도 달빛은 시리도록 맑고 청명했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정말 느리게 가는 것 같아.’

아렌을 만나고 난 뒤 정말로, 느리다 못해 거북이 같은 속도로 시간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와 함께 하는 것 하나하나가 너무 강렬해서일까.

평범한 일상처럼 별일 없이 흘러가질 못하고 기억에 콱 박혀 버려서인지도 몰랐다.

원체 신기한 것투성이다 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아렌을 만나서 다행이야.’

새삼스럽지만 그를 만난 게 정말 천운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렌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산속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르지.

‘어디 양치는 할 수 있었겠어?’

짐승으로 변한 주제에 누릴 건 다 누리고 있으니.

테시우스는 생각하다가 문득 다짐했다.

그래, 정확히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은혜를 갚아야지.’

바스토르를 만나면 우연히 사냥꾼의 아이를 만나 그 부모에게 도움을 받았노라 할 것이다.

부모의 경계심을 풀기 위해 아이에게 먼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그 아이를 내세워 바닥에 글 쓰는 것을 보여 주었다고.

그리고 우체국에 대필을 맡겨 편지를 보냈노라고.

다만 황실에서 큰 포상을 받았다 하면 사례금을 노리는 자들이 생길지도 모르니 그들의 도움에 대한 성의는 제가 알아서 하겠다고.

그렇게 아렌을 숨겨 준 뒤에, 따로 그를 찾는 것이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뭐든 들어주겠노라며.

굳이 산속에서 힘들게 살 것 없이 수도의 집을 준다거나, 주인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면 자유로이 살 수 있게 해 준다거나, 그가 바라는 것이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 약조해야지.

그걸로 모두 끝내자.

지금 이 꿈만 같은 기억을 추억으로 묻어 두면 아렌을 두고 한 말도 안 되는 생각도 더는 들지 않을 테니까.

테시우스는 바닥에 벌러덩 누워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편히 잠들기엔 그른 것 같지만.

서늘한 새벽바람에 상념도 함께 날아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 * *

‘오늘은 할 일이 많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 일찍 기운차게 일어난 아렌은 따로 세수할 것도 없이 일단 짐부터 챙기고 보았다.

계곡에 가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아렌에겐 이공간 마법과 경량화 마법이 걸린 가방이 있었지만 제약이 없는 건 아니었다.

가방의 입구 크기를 뛰어넘는 물건은 애당초 넣지를 못했고, 경량화 마법이기 때문에 많이 넣으면 넣을수록 무거워지긴 했다.

더구나 아이의 몸은 들 수 있는 한계치가 정해져 있었다.

때문에 오크통을 가득 채우려면 계곡에 몇 번은 왔다 갔다 해야 했다.

테오도 있으니 샤워는 좀 미룰 생각으로 필요한 것만 챙기던 아렌은 어제 썼던 그의 ‘전용 칫솔’을 냉큼 집어 들었다.

그리곤 팔에 건 양동이를 덜렁거리며 다가가 소리쳤다.

“테오! 일어나!”

“…….”

“테오, 어서 일어나라니까? 빨리 일어나! 빨리!”

“……컹?”

그제야 부스스, 눈을 뜬 흑표범이 나른하게 하품을 하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이내 아렌을 발견했다.

“물이 거의 떨어져서 계곡에 다녀와야 해. 가는 김에 세수도 하고 양치도 하자, 알겠지?”

멍한 시선으로 아렌을 바라보던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고분고분한 태도였다.

“그럼 가자!”

고작 며칠 만에 그와 함께 하는 게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마치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아렌은 꿈에도 몰랐다.

그 시각, 다른 곳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전하, 2황자 전하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불과 하루 만에, 아렌이 보낸 편지가 바스토르에게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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