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엄마……!”
갑자기 튀어나온 검은 물체에 깜짝 놀란 아렌은 저도 모르게 “엄마야……!”까지 나오려던 걸 가까스로 참아냈다.
당연히 동굴에 있을 줄 알았는데, 설마 데리러 온 건가 하고 생각하던 찰나 테오는 꽤 늠름한 자태로 입을 쩍 벌리며 울어 보였다.
그 모습에 아렌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야? 설마 마중 나와 준 거야?”
마중은 아니고!
그냥 안 오길래 걱정돼서!
반면 테시우스는 아렌의 말에 마치 대답하듯 울어 보였는데, 당연하지만 아렌의 귀엔 “크릉, 크르릉.” 하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아무튼 고마워. 참, 나 고기 사 왔다? 너 고기 좋아해?”
고기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
테시우스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아렌의 옆에 딱 붙어 섰다.
기다란 꼬리가 살랑거렸으나 작은 입에서 조잘조잘 나오는 이야기에 한껏 집중하다 보니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오늘 내가 진짜 맛있는 거 해 줄게. 이거 한번 먹어 보면 소고기 스테이크는 생각도 안 날걸?”
“크릉…….”
“진짜라니까? 돼지고기가 소고기보다 맛있을 수가 있구나 싶을 거야. 장담해!”
물론 테시우스는 아렌의 말을 믿지 않았다.
달팽이에 이상한 냄새가 나는 진흙 덩어리를 넣은 스튜를 끓여 먹었으니까.
웬만하면 그냥 굽는 족족 달라고 조를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낮 동안 혼자 있을 땐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었는데 아렌과 함께 돌아오고 나니 어딘가 비어 있던 게 꽉 채워진 기분이 들었다.
테시우스가 미묘하게 수염을 씰룩이는 사이 아렌이 팔을 걷어붙이고 외쳤다.
“오늘은 밖에서 구워 먹을 거야.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나도 도와주고 싶은데.
뭉뚝한 앞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바쁘게 움직이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렌은 곧 동굴 안에서 여러 가지를 가져왔다.
기다란 나무 막대며, 어제 본 것과 비슷한 냄새가 나는 빨간색의 채소 절임이며, 조금은 쿱쿱한 냄새가 나는 진흙이며,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것들이 한가득이었다.
그렇게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한 지 삼십 분이 지난 뒤, 테시우스의 앞에 온갖 것들이 담긴 접시가 한가득 올라간 상이 놓였다.
“이건 삼겹살이라는 거야. 돼지의 뱃살 부분인데 지방층이 두꺼워서 엄청 느끼할 것 같지? 근데 진짜 하나도 안 느끼해. 내가 보여 줄게.”
아렌은 흥흥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화로 위에 널찍한 불판을 올렸다.
열전도율이 좋은 돌로 만들어진 불판은 금세 뜨겁게 달구어졌다.
그리고 달궈진 불판 위에 길쭉한 삼겹살을 한 줄 올리자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크으으, 이거지!’
이 소리, 이 냄새!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고 잊고 싶지도 않은 맛!
나만 알고 있기도 아까운 특별한 바비큐!
아렌은 벌써부터 군침이 돈다는 듯 아직 선명한 분홍빛 육질을 보고도 침을 꿀꺽 삼켰다.
물론 한 줄에서 끝낼 그녀가 아니었다.
불판 면적의 2/3가 고기로 채워진 뒤엔 배추김치가, 그다음엔 얇게 저민 마늘이 빈 공간을 채웠다.
“…….”
테시우스는 조금은 멍한, 또 조금은 신기한 눈으로 아렌이 하는 걸 쳐다보았다.
그는 정말로 이 돼지고기에 진심인 것처럼 보였다.
불판에 고기를 올린 후론 입도 꾹 다문 채 거의 노려보듯 뒤집을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너무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 건가?’
테시우스야 황성에서 살 때 하루도 빠짐없이 육류가 나오다 보니 별 감흥이 없었지만 아렌은 아닌 것 같았다.
되도록 그가 배불리 먹게끔 자기는 조금만 먹고 자리를 비켜 줘야 할 듯싶었다.
물론 입 안에 고이는 침은 별개였지만.
곧 아렌이 고기를 한 번 뒤집자 촤악 하는 기름 소리와 함께 보기 좋은 갈색빛으로 노릇하게 구워진 단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간의 시간이 더 흐른 뒤 양면이 완전히 익자 아렌은 집게로 들어 올린 뒤 가위로 싹둑싹둑 잘랐다.
“일단 맛을 먼저 봐야 하니까 처음엔 작은 걸로 줄게.”
첫 번째는 기름장이었다.
아렌은 짭짤한 소금과 후추를 넣은 기름장에 삼겹살 한 점을 푹 담근 뒤 내밀었다.
테시우스도 일찍이 맡아 본 고소한 냄새였기 때문에 군말 없이 입을 벌렸다.
그리고 잠시 후, 길쭉하던 동공이 옆으로 넓게 벌어졌다.
‘정말 하나도 안 느끼하잖아?’
육즙을 느끼기엔 너무 작아서 잘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기름에 담갔다 뺀 것인데도 전혀 느끼하지 않다는 점이다.
짭짤하고 고소했으며, 쫄깃하고 부드러웠다.
무엇보다 이런 독특한 풍미가 느껴진다는 게 놀라웠다.
반면 아렌은 동공이 잔뜩 확장되어서는 냠냠 소리를 내며 먹는 모습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맛있지? 하나도 안 느끼하고.”
“크릉!”
“좋아, 다음으로는 쌈장이야. 이거랑 먹으면 완전히 반해 버릴걸.”
“…….”
그러나 아렌이 어제 본 것보단 덜하지만 마찬가지로 진흙같이 붉은 기가 도는 소스를 묻혀 내밀자 테시우스가 못 미덥다는 듯 콧등을 찌푸렸다.
왜 자꾸 이런 걸 먹지?
그냥 조금 전에 준 거랑 똑같은 걸로 주면 안 되나?
그가 은근히 고개를 돌리며 회피하자 아렌이 간절한 투로 말했다.
“진짜 한 번만 먹어 봐, 절대 후회 안 해. 엄청 맛있는 거야!”
“…….”
“이 고기랑 제일 잘 어울리는 소스야. 딱 한 번만 먹어 보라니까?”
얼굴을 돌리는 곳마다 아렌의 손이 집요하게 따라왔다.
정말 진심으로 못 미덥고 믿음이 안 갔지만 그의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제발…….
하고 눈으로 대신 말하는 듯했다.
‘맛없으면 바로 뱉어 버릴 거야.’
결국 테시우스는 마지못해 입을 벌리고 말았다.
그제야 아렌이 씨익 웃으며 쌈장을 묻힌 삼겹살을 넣어 주었다.
바로 그 순간!
‘이게 뭐야……!’
마치 새로운 세상에 온 듯 파앗 하며 사방이 밝아졌다.
구름 위에 몽실몽실 떠다니는 느낌이란 이런 것일까.
그야말로 완벽했다.
아주 짜지도, 싱겁지도, 아주 맵지도, 아예 안 맵지도 않았으며, 고소함 뒤에 따라오는 풍미가 일품이었다.
삼겹살은 순식간에 입 안에서 사라졌고 어느새 그는 입을 벌리고 있었다.
“컹……. 크르릉, 크앙……! 캉!”
이거 진짜 뭐야?
뭔데 이렇게 맛있어?
텃밭에서 퍼온 진흙 아니었어?
어떻게 황실 주방장보다 소스를 잘 만드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아 테시우스가 연신 왕왕거렸다.
물론 아렌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대신 얼굴에서 보이는 놀란 기색이 그가 얼마나 흥분했는지를 대변해 주고 있었다.
“봐봐, 내가 후회 안 한다고 했잖아.”
“크릉!”
그러니까!
솔직히 안 믿었는데 진짜 그러네!
“너 한 입, 나 한 입, 번갈아 가면서 먹자.”
“컹!”
“자, 아- 해.”
그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벌리면 아렌이 큼지막한 삼겹살을 쑥 넣어 주었다.
테시우스가 열심히 씹는 동안엔 제가 먹을 쌈을 만들었다.
텃밭에서 따온 푸릇한 상추에 삼겹살 한 점, 슬슬 노릇해지는 마늘에 쌈장과 구운 김치까지 올려 모은 뒤 한입에 넣었다.
와삭하고 씹히는 소리와 함께 상추 속에 감춰진 고기와 쌈장이 튀어나왔다.
그래, 이 맛이었어!
아렌은 감격 어린 눈으로 입 안의 삼겹살을 한껏 음미하면서도 열심히 먹여 주며 즐거운 저녁 식사를 만끽했다.
* * *
그야말로 완벽한 식사였노라, 말할 수 있었다.
기껏해야 돼지고기, 딱히 육즙이랄 것도 없는 줄로 알았던 고기에서 이만한 풍미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못내 놀라웠다.
이를 읽기라도 한 듯 아렌이 뒷정리를 하면서도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거 알아? 돼지 목살로도 스테이크를 만들 수 있는 거? 두툼하게 잘라서 숯불에 구우면 되는데 고기가 아주 싱싱하면 소고기처럼 살짝 덜 익혀 먹어도 괜찮대. 그렇게 구운 고기는 처음엔 무조건 굵은 소금에 찍어 먹어야 해! 한 입 씹으면 육즙이 확 뿜어져 나오면서 훈연향이랑 짭짤한 맛이 동시에 느껴지거든. 나도 엄청 오래전에 먹긴 했지만 아직도 그 맛이 생각나.”
이제 보니 아렌은 단순히 고기에만 진심인 게 아니라 음식 자체에 진심인 것처럼 보였다.
식탐이 많다기보단 뭐랄까, 무슨 음식이든 최대한 맛있게 먹어야 한달까.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그 방법을 계속 연구하고 생각하고 최상의 조합을 내려는 열정 어린 요리사를 보는 기분이었다.
‘귀여워.’
테시우스는 조잘조잘 떠드는 아렌을 쳐다보면서도 속으로 피식피식 웃었다.
덩치는 조막만 한 게 야무지긴 성인 못지않으면서 또 한낱 음식에 들떠 떠드는 모습을 보자니 보통의 어린아이 같아 퍽 귀여웠다.
아무튼 여러모로 즐거운 식사였다.
그때 모든 뒷정리를 마친 아렌이 천 가방을 문득 쳐다보더니 “아차.” 하며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깜박하고 말을 안 했네. 오늘 우체국에 가서 편지를 부치고 왔어. 만나고 싶으면 일주일 안에 회신해 달라고 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보자.”
테시우스는 말없이 고개만 까닥였다.
사실 오웬 백작가는 실존하는 가문이 아니었다.
한때는 실존했으나 지금은 몰락했고, 대부분의 사람은 몰락한 지도 모르는 가문이었다.
이름만 남은 허울뿐인 가문처럼 적당한 가면이 따로 있을까.
해서 바스토르는 귀족파의 동태를 확인할 요량으로 오웬 백작가를 사들였다.
어쨌든 며칠 뒤 백작가에 아렌의 편지가 도착하면 금세 바스토르에게 전해질 터였다.
‘그러고 보니 만나면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아렌을 데려가도 괜찮을까?’
테시우스는 미묘하게 미간을 좁혔다.
일단 이 모습으론 그를 만날 수 없다.
바스토르는 편지만으로도 저를 믿을 테지만, 사람 눈에 너무 띈다는 게 문제였다.
그렇다고 아렌을 보내 말을 전하자니 혹시나 제 진짜 정체를 알고 겁먹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언제까지고 이 모습으로 있을 수는 없는데. 어떻게 해야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오, 테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크릉……!”
그때 테시우스가 깜짝 놀라 몸을 한 번 떨었다.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온 아렌이 말을 건 것이다.
“불러도 대답이 없어서. 그보다 이것 봐, 오늘 잡화점에 가서 사 왔어.”
놀라서인지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이를 알 리 없는 아렌이 히죽 웃어 보이며 손에 쥔 것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