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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짐승이 황자였다 (7)화 (7/141)

7화

2층 프라이빗 룸에는 갈수록 예뻐지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남자애가 저리 예뻐서야, 클리프가 생각하며 활짝 웃어 보였다.

“사무실로 올라오라니까 굳이 여기서.”

“어차피 화장품만 드리고 가야 해요.”

“그래도 오랜만인데 대화라도 나누면 좀 좋아?”

“할 일이 많아서 그래요. 죄송해요.”

늘 이런 식이다.

조금만 시간을 가져 보려 해도 칼같이 잘라 버려 도통 잡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아웅다웅도 오 년이라, 클리프는 쉽게 포기할 생각 또한 없었기에 능글맞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기에 그래? 쉬운 일이든 어려운 일이든 뭐든 도와주지.”

“괜찮아요.”

“아니야, 이건 내 성의야. 원한다면 로한을 데려가도 좋아.”

“정말로 괜찮아요.”

아렌은 단호하게 거절하며 주섬주섬 천 가방 속 화장품을 꺼내 놓았다.

순간 클리프의 적안이 반짝하고 빛나며 빠르게 상품을 훑어보았다.

이에 응하듯 아렌이 줄줄이 설명을 읊었다.

“이번에 만든 샴푸랑 컨디셔너엔 각각 로즈메리 허브랑 아르간 오일을 넣어 만드셨대요. 샴푸는 사용감이 부드러울뿐더러 모발을 탄력 있게 만들어 준다고 하셨고, 컨디셔너는 뭐 아시다시피 엉킴을 방지해 주고요. 이건 각각 스무 개씩, 바디 워시랑 천연 치약은 저번에 드린 것과 동일해요.”

“특별 주문 건은?”

“……여기, 남성용 로션 다섯 개. 토마토가 들어가서 피부 자극이 없고 미백에 효과가 좋다고 하셨어요. 남성 향수 특유의 향을 싫어하시는 분들도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대요.”

“오오……! 역시 내 은인! 나의 천사!”

겉보기엔 비슷비슷해 보이는 용기의 화장품들이었으나 클리프는 이것들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 알고 있었다.

석 달에 한 번이 아니라 한 달에 한 번씩 와 주면 좋으련만.

혼자 만드는 것이라 하니 이해는 되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거였다.

“참, 그리고 이거.”

“응? 이게 뭐야?”

그때 클리프의 넓은 손바닥 위로 웬 연고 통 하나가 떨어졌다.

이건 주문 목록에 없던 건데? 그리 생각하던 찰나, 아렌이 덧붙였다.

“왜, 저번에 황후 폐하께서 환절기 때마다 얼굴에 자꾸 뭐가 나신다고 하셨다면서요.”

“그랬지……?”

“티트리 연고에요. 저녁 세안 후 피부에 올라온 곳에 바르고 자면 아침엔 빨갛던 것들이 싹 가라앉을 거라셨어요. 특별 선물.”

순간 클리프의 눈동자가 크게 벌어지며 감동으로 물들었다.

그걸 기똥차게 기억하고 말을 전해 주다니!

덕분에 황후에게 점수를 더 딸 수 있게 된 것이다.

클리프는 진심으로 아렌을 덥석 끌어안고 싶어졌다.

“자꾸 이러면 내가 대금을 올리고 싶어지잖아!”

“그럴 줄 아셨는지 됐다고 전해 달라셨어요. 빚지는 건 딱 질색이라고.”

“그럼 만나서 감사 인사만이라도 전하면 안 될까?”

“매번 똑같은 거 물어보는 게 지겹지도 않으세요? 어차피 안 될 거 아시잖아요.”

“하다못해 내 방에 있는 선물이라도 전해 줘!”

“빚지는 거 싫다고 가격도 안 올리시는 분인데 선물을 퍽이나 받으시겠네요.”

“아레엔-, 제발, 응? 진짜 아주 잠깐이라도. 아니, 얼굴 안 보고 대화만이라도 할 수 없을까? 응?”

“대답은 늘 같아요. 안 돼요.”

매번 올 때마다 반복되는 대화에 종지부를 찍듯 아렌이 손을 내밀었다.

대금을 달라는 뜻이었다.

재료비를 제한 순수 매출의 50%.

누군가는 밑지는 장사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렌의 생각은 한결같았다.

‘클리프는 좋은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꼬투리를 잡히고 싶진 않아.’

아렌이 구태여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상회를 통해 거래를 하는 이유는 나이라는 제약 때문이었다.

보호자가 없는 미성년이 살롱을 차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훗날 살롱을 차렸을 때 클리프에게 이런저런 명목으로 잡히고 싶지는 않아 내린 결정이었다.

그리고 따지자면 그에게 도움을 받긴 했다.

천연 화장품에 대한 지식은 많으나 화장품에 들어가는 다양한 추출물은 아렌이 할 수 없는 것이어서 부득이하게 연금술 공방에 의뢰를 해야만 했다.

당연하지만, 없는 걸 추출하라는 게 아니고 있는지 모르는 걸 추출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금술사의 입장에선 없는 물질을 추출하라는 의뢰나 마찬가지였기에 길길이 날뛰었고, 그걸 클리프가 온몸으로 막아 주었다.

물론 그녀의 설명을 바탕으로 한 수백 번의 시도 끝에 성공적으로 추출되었을 땐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어 누군지 제발 한 번만 만나게 해 달라고 빌긴 했지만.

“진짜 이럴 거야? 이렇게 매정하게 굴 거냐고!”

“네. 빨리 주세요. 저 바빠요.”

클리프가 “너무해…….” 하며 입을 비죽이든 말든 아렌은 신경 쓰지 않았다.

결국 그는 순순히 대금만 지불하는 수밖에 없었다.

“로한. 가져와.”

매번 정해진 양만 가져오는 데다 특별 주문 건의 판매액도 미리 정해 두기 때문에 대금도 거의 일정했다.

로한이 묵직한 자루를 들고 오자마자 아렌의 얼굴 위로 히죽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돈 받을 때가 최고라니까!

절로 마음이 든든해졌다.

“아무튼 전 가 볼게요. 그럼 잘 지내세요.”

돈 자루는 물론이고 연금술 공방에서 온 재료들까지 가방에 모두 챙겨 넣은 아렌은 이제 제 볼 일은 다 봤다는 듯 인사하곤 총총 상회를 나섰다.

더없이 홀가분한 걸음이었으나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클리프의 눈동자엔 아쉬움이 한가득이었다.

사실 안 봐도 예상은 가지만 아렌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걸 알려줄 수도 없거니와 당장 해야 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우선 잡화점에 들러 필요한 물건들을 사고, 다음으론 우체국에 들러 대필을 맡기는 대신 직접 편지를 써서 부쳤다.

가문의 문양이 그려진 우표 하나만 사면 저 같은 평민도 귀족가에 편지를 보낼 수 있었다.

물론 그 가주에게까지 올라가느냐 마느냐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렇게 편지까지 다 써서 보낸 아렌은 마지막으로 정육점에 들러 신난 목소리로 외쳤다.

“돼지 뱃살 부위에 비계 떼지 말고 붙여서 주세요!”

“꼬맹아, 아저씨가 누누이 말했잖니. 지방이 많이 붙으면 느끼해서 맛이 없어요.”

“저도 누누이 말했잖아요, 하나도 안 느끼하다니까요? 그냥 붙은 채로 줘요!”

“하, 이것 참……. 그래, 그래도 중량 가격은 똑같다. 알겠지?”

“네!”

본디 월급날엔 맛있는 걸 먹는 것이다.

아렌은 삼겹살까지 야무지게 산 뒤에 서둘러 걸음을 놀렸다.

델리움 영지 외곽에 자리한 버려진 여관 뒤쪽, 아무도 오가지 않는 좁은 산길에 작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 * *

테시우스는 해가 중천에 뜨고서야 부스스 눈을 떴다.

털로 만든 망토를 뒤집어쓴 듯 전신이 후끈거렸다.

후덥지근한 열기에 고개를 돌려보니 몸 위에 어젯밤 아렌과 함께 덮고 잔 담요가 올라가 있었다.

‘……아렌은 어디 있지?’

테시우스는 아렌을 찾아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그런데 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짐승의 예민한 감각을 곤두세워도 마찬가지였다.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어딜 간 거지?’

보아하니 자리를 비운 것 같은데, 그의 빈자리를 채운 건 전날 저녁에 맡은 고소한 냄새였다.

동굴 중앙, 펼쳐진 낮은 상 위로 쟁반같이 넓은 접시가 하나 놓여 있었다.

어제 아렌이 먹여 준 그 음식이었다.

이미 온기를 잃은 접시 옆엔 작은 쪽지가 끼워져 있었다.

‘나 잠깐 마을에 다녀올게. 배고프면 이거 먹어.’

조만간 다녀온다더니 그게 오늘이었나.

테시우스는 잠시간 접시를 물끄러미 쳐다보았으나 금세 몸을 돌렸다.

배는 고팠지만 먹고 싶지 않았다.

짐승처럼 그릇에 얼굴을 처박는 게 싫어서가 아니라 기왕 먹는다면 아렌과 함께 먹고 싶었다.

‘잠깐 다녀온다고 했으니까. 금방 올 거야.’

주인 없는 빈집에서 딱히 할 일은 없었다.

텃밭은 함부로 손댔다간 망칠 것 같아 구경만 했고, 닭장엔 한 번 가까이 갔다가 닭들이 질겁하며 미친 듯이 울어 대기에 멀찍이 떨어져야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렸으나 해가 지기 시작하는데도 아렌은 돌아오지 않았다.

‘혹시 무슨 사고라도 났나? 발을 헛디딘 거면 어떡하지?’

원래의 그였다면 다른 쪽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짐승의 씨가 말랐다던 산에 나타난 흑표범.

황성에서도 그 가죽을 보기 힘들 정도로 귀한 흑표범이 나타났다니 어쩌면 신고를 하고 저를 잡아가길 기다릴 수도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을 터다.

하지만 그는 의심은커녕 아렌을 걱정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험한 산인데 발을 잘못 디뎌 구르진 않았을까, 발목을 삐어 올라오지 못하는 건 아닐까, 많이 다쳐 정신을 잃었으면 어쩌나 등등.

테시우스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그만큼 아렌은 그에게 있어 고작 하루 만에 마음속 경계심을 모두 허물고 성큼 들어온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초조히 기다리던 테시우스는 저물어가는 태양이 주홍빛 노을을 뿜어내기 시작하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은 모르지만 아무래도 아렌을 찾아봐야 할 것 같았다.

테시우스는 그가 했던 것처럼, 개구멍을 막은 돌덩이를 치운 뒤 몸을 비집고 들어갔다.

나와서는 이파리가 무성한 나뭇가지로 입구를 가리는 것도 잊지 않고 잠시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길도 모르는 판국에 믿을 건 동물의 육감밖에 없었다.

테시우스는 전신의 감각을 곤두세웠다.

아렌이 쓰던 화장수에서 나던 꽃 냄새와 사박대던 작은 발소리를 떠올리려 애썼다.

‘어디쯤에 있을까.’

원체 몸이 작고 말라서인지 집 주변에 찍힌 발자국은 무성하기만 할 뿐 희미했다.

길도 제대로 닦여 있는 곳이 없어 최대한 후각과 청각에 의지해야 했다.

테시우스는 산을 빙 둘러 걸어가는 식으로 아렌을 찾아 헤맸다.

유일하게 기억하는 길인 계곡에도 한 번 들렀다가, 다른 곳보다 조금 더 완만해 보이는 장소를 찾아 기웃대다가, 나중엔 진짜 표범처럼 나무 위에 훌쩍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기도 했다.

그래봤자 수풀처럼 빽빽한 잎사귀에 시야가 가려져 아무 소득도 얻지 못했지만.

그러나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하던가.

테시우스는 장장 한 시간 만에 저가 기억하는 혼잣말을 포착했다.

정확히는, 흥얼거리는 음률이 들어간 노래 같은 목소리였다.

“……겹살, 오늘은 삼겹살, 너무 좋아아-. 쌈장에 김치, 고추에 마늘, 지글지글 고기-. 오늘은 삼겹살이야, 맛있는 삼겹살!”

들리긴 들리는데 몇몇 단어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어쨌든 아렌을 찾았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무척 기뻤다.

테시우스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네 발로 달리는 짐승의 몸에 적응했다는 사실에 놀랄 틈도 없었다.

머릿속엔 오직 아렌, 그 하나만이 가득 차 있었다.

“……크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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